<기억을 듣는 회사원 182화>
183. 눈 좀 풀어요
일주일이 지났다.
그 사이에도 바론에서 출시한 카피 제품들은 여전히 날개 돋친 듯이 팔렸다.
이는 이미 예상했던 일이다.
본부장이, 그것도 바론이 아닌 디몰의 본부장이 바론의 제품들을 한 번에 날려 버리긴 어려웠을 것이다.
내 방으로 들어온 법무 팀의 강일선 부장.
그는 미간을 좁히며 어떻게든 나를 설득하려 했다.
“이사님, 정말 해볼 생각이세요?”
“네. 해야죠.”
“후……. 증거가 하나도 없어요. 그리고 명분도 없고요. 굳이 우리가 끼어들 명분이요.”
“명분은 충분합니다.”
“PB 제품들이요?”
“네. 이 제품들은 이제 우리 제품들입니다.”
“이거 다 억지로 가져오신 거잖아요.”
“아뇨. 제품이 좋아서 가져온 겁니다.”
이미 반쯤 체념한 강일선 부장.
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요. 그래. 그럼 어떻게 우겨 맞춰서 명분은 생겼다고 하죠. 근데 증거는 어쩌시겠습니까?”
“증거는 공판 전에 반드시 가져오겠습니다.”
강일선 부장은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리고 긴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그 노트요?”
“네.”
“만약 못 가져오면? 못 가져오면 어쩌시려고요? 그럼 정말 우리만 바보 꼴이 되는 겁니다.”
“…….”
“그리고 바론이 가만있겠어요? 잘못하면 이 PB들 출시하지 못할 수도 있어요. 이 재판 때문에 PB들을 내놓는 거 자체가 문제가 될 수 있다고요.”
“무슨 일이 생기든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
한참 동안 말이 없는 강일선 부장.
그는 마지못해 한다는 표정을 하고 답했다.
“그래요. 해보죠. 대신 공판 전에 증거를 확보한다는 가정하에 하는 겁니다. 만약 그때까지 오지 않으면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네. 저도 그 정도는 압니다.”
“정말 책임은 이사님이 지신다고 했습니다.”
“네.”
“그리고 이사님. 제가 인생 선배로 한마디만 더 드려도 될까요?”
“네. 말씀하세요.”
“사람은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겁니다. 자신이 불리하면 언제든 빠질 수 있다고요. 제가 그런 사람 어디 한둘 본지 아십니까?”
“이번엔 부장님도 새로운 사람을 보겠군요.”
내 답을 들은 강일선 부장은 실소를 내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알았어요. 알았어. 그렇다고 치죠. 분명 책임은 이사님이 전부 지신다고 했습니다.”
“네. 그러겠습니다.”
강일선 부장은 수차례 확인하고 내 방에서 나갔다.
그가 나가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마성근 팀장이 초조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이사님. 이사님.”
“무슨 일 있나요?”
“영민이 이 새끼. 연락이 안 됩니다. 완전 전화기 꺼 놓고 잠수 탔다고요.”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했다.
그때 들려왔던 기억들.
조영민 대표는 분명 후회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 늦지 않았다는 말을 여러 번 되뇌었다.
올 것이다.
반드시 늦지 않게 올 것이다.
“조금만 기다려 보죠. 공판은 7일 후니까.”
“만약 안 나타나면요?”
초조한 표정의 마성근 팀장.
나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씩 웃으며 말했다.
“올 겁니다. 마 팀장님 친구잖아요.”
“…….”
“우리 조금만 기다려 주죠.”
* * *
다시 일주일이 지났다.
하지만 여전히 연락되지 않는 조영민 대표.
마성근 팀장은 매일 같이 그에게 전화했지만, 일주일 내내 전화기는 꺼져 있었다.
“역시 박정연 대리의 말이 맞았습니다. 사이즈를 줄이고 안에 다른 재료들을 넣었더니 식감이 풍성해졌어요. 오히려 호두가 독이었던 거 같네요. 하하.”
테스트 제품들을 찍어 낸 최충연 팀장이 신이 나서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공판은 오후 4시.
그전에 연락이 올 거로 생각했는데…….
고개를 숙여 울리지 않는 휴대전화를 바라봤다.
그때.
“이사님! 이사님!”
“아……. 네?”
“제 얘기 듣고 계시죠?”
“네. 듣고 있어요. 치킨너겟은 어떻죠?”
“일단 그게 문제입니다. 씨앤코리아 설비가 오랫동안 쓰지 않아서 고장이 났어요. 일단 설비 수리하는 것만 앞으로 3일은 더 걸릴 거랍니다.”
“그렇군요.”
“다른 제품들은 이상 없나요?”
“네. 다른 제품들은 이미 테스트를 마쳤습니다. 포장 디자인이 넘어오면 바로 등록할 수 있습니다.”
“수고했어요.”
“아시님. 혹시 창해에서는 연락이 왔나요?”
“문자 보내 놨으니까, 곧 올 겁니다.”
나는 걱정하는 최충연 팀장의 어깨를 툭 치고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 * *
오후 3시.
서울 중앙 지방 법원 1층.
“거 봐요.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안 올 거라고 했잖아요.”
“…….”
“며칠만 넘기면 공소시효도 끝나는데, 미쳤다고 나타나겠어요? 제가 볼 때는 조영민인지 뭔지 그 사람 뒷돈까지 해 먹은 겁니다.”
법무 팀의 강일선 부장은 거의 울상이 되어 있었다.
나는 울리지 않는 휴대전화를 내려다보며, 벤치에 앉았다.
“날씨가 좋네요.”
“지금 날씨 얘기가 나오십니까?”
강일선 부장은 내 옆에 앉아 투덜거렸다.
그때, 법원으로 천천히 들어가던 남자가 우리의 앞으로 다가왔다.
“원지훈 이사님?”
디몰의 김진준 본부장.
그는 손목의 시계를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
“창해푸드 조영민 대표님은 만나셨나?”
김진준 본부장이 비아냥거리며 물었다.
이놈 뭔가 알고 있구나.
아니, 어쩌면 미리 손을 써 놨구나.
분명 그때는 메모한 노트가 내 손에 있다는 것을 알고 겁을 먹고 있었는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너야?”
“갑자기 왜 이러실까? 눈 좀 풀어요. 눈 좀.”
“…….”
“이따 안에서 봅시다.”
그는 내 어깨를 툭 치고 법정의 안으로 들어갔다.
오후 3시 30분.
우린 30분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강일선 부장은 이미 패배를 직감했을 것이고, 나는 울리지 않는 휴대전화를 계속해서 만지작거렸다.
“들어가시죠.”
“조금만 더 이따가 들어가죠.”
“그런다고 오겠어요? 3시 30분입니다. 그 인간은 안 와요.”
“올 겁니다.”
“이사님. 진짜 하나만 물어봅시다.”
“…….”
“그 사람 아는 사람인가요? 도대체 뭘 믿고 온다는 겁니까?”
“후회하고 있으니까요. 반드시 바로잡으려 할 겁니다.”
“그럼 벌써 오고도 남았어야죠.”
버럭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강일선 부장.
나는 아무런 말없이 입구 쪽을 바라봤다.
그때였다.
법원의 1층 입구에 낯이 익은 차가 멈춰 섰다.
마성근, 분명 마성근 팀장의 차다.
조수석의 문이 열리고, 허겁지겁 달려오는 한 남자가 보였다.
“잠깐! 잠깐만요!”
머리를 흩날리며 달려오는 남자.
창해푸드의 조영민 대표다.
한 손에 시꺼먼 노트를 들고 달려오는 그는 분명 조영민 대표였다.
나는 씩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늦으셨군요.”
“죄송합니다. 후…….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요. 이제라도 오셨으니 됐습니다.”
나는 조영민 대표가 내미는 노트를 받아 강일선 부장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그에게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옳은 결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저……. 이사님! 잠깐만요!”
“네?”
“이거……. 이것도 재판에 도움이 될 거 같아서 가져왔습니다.”
조영민 대표는 뒤를 돌아 차가 멈춰 선 곳을 바라봤다.
뒷좌석에서 커다란 종이가방을 들고 흐뭇한 미소를 짓는 마성근 팀장.
그는 내 앞까지 걸어와 종이가방을 건네며 말했다.
“아신님. 부장님. 이거 가져가셔야죠.”
“이게 뭡니까?”
“며칠 전에 김진준, 그 인간이 준 거랍니다. 제가 아주 꽁꽁 싸매들고 왔어요.”
나는 종이가방 안을 살펴봤다.
신문지로 대충 위를 덮어 놨는데, 한쪽 구석으로 주황색의 오만 원권 지폐의 끝이 보였다.
“얼마입니까?”
“꼴랑 3천이요…….”
“너무 쉽게 봤군요.”
“그러니까 말이죠. 내 친구를 겨우 3천에 사겠다는 발상 자체가 참 재수가 없네요. 그렇죠? 그리고 강 부장님! 이거 증거가 될 수 있죠?”
하지만 강일선 부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현금이라 좀 힘들 수도 있어요. 출처를 따내는 데 시간이 좀 걸려서…….”
“제가 누굽니까. 물론 그 출처도 가져왔죠.”
마성근 팀장은 씩 웃으며, 주머니에서 USB 메모리를 꺼냈다.
“영민이 차에 있던 블랙박스입니다. 요즘 기술이 좋아서 말까지 다 나오던데요?”
환하게 웃는 강일선 부장.
그는 USB를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마성근 팀장이 강일선 부장의 손을 피하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부장님. 제 친구 의심했었다면서요?”
“아, 그건…….”
“이제 좀 사람 좀 믿고 살아요. 아무리 법이 좋다고 해도, 사람이 먼저니까.”
“알았어요. 알았어. 그거나 빨리 줘요. 증거물 등록하려면 시간 없으니까.”
강일선 부장은 USB와 종이가방을 들고 안으로 허겁지겁 들어갔다.
나는 조영민 대표를 보고 씩 웃으며 말했다.
“이제 준비하셔야죠.”
“네?”
“직원들 불러서 다시 공장 돌릴 준비요. 자세한 얘기는 마 팀장님이 해 줄 겁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조영민 대표의 기억을 들었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그가 이 모든 것들을 곧 바로잡을 것을 말이다.
* * *
오후 4시.
나와 강일선 부장, 그리고 우리가 고용한 변호사가 나란히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자신의 변호사와 앉아 있던 김진준 본부장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팔짱을 꼈다.
자신 있다 이건가?
나는 그의 태도를 보고 묵묵히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재판이 시작되고.
“세상에 유사한 제품은 많습니다. 특히 음식은 더 하다는 것을 재판장님도 아실 겁니다. 이를 두고 레시피를 훔쳤다고 무턱대고 의심하는 것은 BO커머스의 일방적인 주장입니다. 듣기로는 BO커머스에서 이 제품들을 모아 PB 제품을 만들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오히려 BO커머스가 바론의 제품을 훔치는 거로 보이는군요.”
이는 이미 예상한 공격이다.
상대 변호사의 말이 끝나자, 우리 쪽 변호사가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일어났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긴급 증거물 채택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의 말이 끝나고, 법정에 걸린 스크린에 노트의 내용이 보였다.
얼굴이 잿빛으로 변한 김진준 본부장.
그는 스크린을 멍하니 바라보며 완전히 얼어 버렸다.
“저희 쪽에서 제출한 증거물은 김진준 씨의 노트입니다. 총 일곱 개의 제조사에 파견을 나갔고 그쪽의 레시피와 설비에 대해 정확히 기록해 놨습니다. 심지어 누구를 스카우트할 것인지까지 적혀 있더군요. 이래도 아니라고 하시겠습니까?”
신이 난 우리 쪽 변호사.
방청하는 자리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재판은 기울었다.
이 노트만으로 많은 것들이 설명됐으니까.
우리 변호사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김진준 씨는 이를 감추기 위해 3천만 원이라는 돈을 뇌물로 주고, 은폐하려는 시도까지 했습니다.”
스크린에 선명하게 나오는 블랙박스의 영상.
화면이 아주 깔끔하게 나왔다.
각도도 좋고, 일부러 찍었다고 의심이 갈 정도다.
거기에 음성까지 더해지니, 바론 쪽의 변호사는 고개를 숙이고 절레절레 저었다.
이제 어떻게 빠져나갈 것인가?
이렇게 증거가 차고 넘치는데 어떻게 빠져나갈 것인가?
나는 반대편 자리를 바라봤다.
얼어 버린 둘의 모습이 가관이었다.
“최종 선고는 6월 17일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재판은 10여 분 만에 끝이 났다.
참 허무하다.
준비는 일주일 내내 했는데…….
나는 강일선 부장과 변호사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김진준 본부장의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눈 좀 풀어요. 눈 좀. 그러다 눈에서 레이저 나오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