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180화>
181. 당신 자체가 증거니까
이른 아침.
물티슈를 뽑아 파티션에 걸린 명판을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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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몰 식품 사업부
본부장 김진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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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본부장이라는 타이틀이 탐나서 바론에서 디몰로 넘어왔다.
디몰에 출근한 지는 한 달째.
아직 적응되지 않는다.
이 회사는 솔직히 말해서 온갖 잡종들이 다 섞여 있다.
먼저, 최두영 이사.
커머스계의 신화라 불리며, 마켓 프레시의 최구열 이사와 함께 양대 산맥으로 꼽힌다.
그의 첫인상은 놀라웠다.
나를 보는 날카로운 눈은 발가벗겨진 기분이 들게 할 정도였다.
그리고 제품을 보는 정확한 눈과 유연한 대응까지.
MD로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라 부를만했다.
하지만 완벽한 그에게도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혼자 모든 것을 하려는 스타일.
사람 보는 눈이 영 꽝이라는 것이다.
다음은 식품 사업부의 차주영 본부장.
최두영 이사가 얼마나 사람을 모르는지에 대한 첫 번째 증거 1호다.
체인마켓에서 마켓 프레시를 거쳐 지금 이곳까지 왔다.
횡령이라는 큰 범죄를 저질렀는데, 회사는 이를 무시하고 그를 데려왔다.
대신 항상 옆에 붙어 있는 박승연 차장.
최두영 이사의 심복인 그는 차주영 부장을 대놓고 감시했다.
어디 이뿐일까?
우리 디몰에는 치명적인 구멍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식품 사업부의 고동수 본부장.
말만 앞서는 사람이다.
자기 힘으로 일해 본 적이 없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그룹폰과 마켓 프레시를 거쳐왔는지…….
가끔 하는 행동을 보면 한 대 쥐어박고 싶을 정도다.
“진준 부장님! 담배 하나 피우러 갈까요?”
나와 친해지려 노력하는 차주영 본부장.
그는 일이 아닌 사람과의 관계에 몰두하는 스타일이다.
종종 그와 담배를 피우는데, 자기 집안 얘기만 할 뿐 업무에 관한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없다.
“아니요. 오전에 좀 바쁩니다.”
“아……. 네. 그럼 일하셔야죠.”
저 비아냥거리는 것 같은 말투도 기분이 나쁘다.
나는 별다른 대꾸 없이 책상 위에 올려진 결재 서류들을 확인했다.
그렇게 10여 분이 지나, “진준 부장님! 커피 한 잔 어때요?”
식물인간처럼 모니터만 보던 고동수 본부장이 오랜만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딸기 대란 이후로 회사에서 입지가 작아졌다.
평소 졸졸 따라다니던 차장, 과장들이 내게로 줄을 댈 정도였으니까.
“마셨습니다.”
“누구랑?”
“제가 고 부장님께 보고해야 합니까?”
“그러지 말고 나랑도 한잔하자.”
가끔 저렇게 말을 놓는다.
그리고 저 말투는 아주 치가 떨릴 만큼 싫다.
“마셨다니까요!”
“요 앞에 브런치 카페 생겼는데, 거기 케이크 죽여. 진짜 후회할걸?”
“괜찮습니다. 무슨 금요일 오전부터 브런치입니까? 그만하시죠.”
나는 딱 잘라 말하고, 책상 위 서류에 집중했다.
빌어먹을 이 서류들.
다른 회사는 모든 결재 시스템을 전산화해서 이렇게 귀찮지 않다고 하던데…….
후…….
이건 해도, 해도 끝이 나질 않는다.
그래도 오늘은 기분 좋은 일이 하나 있다.
어제 마켓 프레시의 원지훈 이사가 전화를 걸어왔다.
아마도 나를 스카우트하려는 것 같은데…….
드디어 이 구멍들과 빠이빠이 할 수 있겠구나.
최두영 이사에게 다 배우지 못한 것이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뭐 괜찮다.
마켓 프레시에는 최구열 이사도 있고, 요즘 급부상하는 원지훈이라는 놈도 있으니까.
그나저나 얼마를 부를까?
아니면 요즘 핫하다는 마켓 프레시의 주식을 좀 달라고 해 볼까?
생각만 해도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데이터 뽑아왔습니다.”
김용현 차장.
일도 잘하고, 내가 가장 믿는 직원이다.
내가 마켓 프레시에 가게 되면 꼭 데려가야 할 놈이다.
“그래.”
그가 건넨 문서를 넘겨보며, 모니터 화면에 마켓 프레시를 띄웠다.
김용현 차장에게 준 업무는 매일 오전 마켓 프레시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들이 어떤 기획전을 하고, 프로모션을 진행하는지.
상품 진열과 새로 들어온 제품들은 뭐가 있는지를 가장 먼저 확인한다.
적을 알면 백전백승.
아니지. 곧 같은 편이 될 수도 있는데?
나는 씩 웃으며, 마우스의 스크롤을 내렸다.
“본부장님. 무슨 기분 좋은 일 있으세요? 와. 이제 보니까 오늘 슈트 헨리비통이네요?”
김용현 차장이 내 표정을 보며 물었다.
“이제 봤어?”
“이거 400만 원 넘죠?”
“창파하게 왜 그래. 하하.”
얼마 전에 산 명품 슈트.
중요한 날만 입는 가장 아끼는 옷이다.
“오늘 어디 가세요? 혹시 소개팅?”
“아니야. 그나저나 이거 데이터 오늘 오전에 뽑은 거지?”
“네.”
“가정의 달 이벤트에 레토르트 7개나 추가했네. 갈비탕은 진솔 제품이지?”
“네 맞습니다. 근데 부장님 그 많은 데이터를 매일 전부 외우세요?”
“이거 암기하는 법 생각보다 쉬워.”
나는 어릴 때부터 속독과 암기의 신동으로 불렸다.
7살 때, 스타킹이라는 방송에 나가서 특별한 능력을 뽐낼 정도였다.
덕분에 매일 아침 마켓 프레시에 새로 올라오는 제품들을 달달 외울 수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바론에 있을 당시 영세한 기업에 파견을 나가 그들의 레시피를 가져왔다.
상황을 살피는 빠른 눈치와 암기력.
이건 내가 가진 최고의 무기 중의 무기다.
“역시 본부장님이십니다.”
“진솔, 장산, 황민 식품 가서 마켓 프레시에 올린 똑같은 제품 받아와.”
“예. 알겠습니다. 나머지 4개 업체는 어떻게 할까요?”
“거긴 그냥 둬. 며칠 판매량 보고 움직여도 늦지 않아.”
내 말에, 김용현 차장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근데 본부장님. 이건 매번 궁금했던 건데, 본부장님 눈에는 판매량이 보이세요?”
커머스의 로직을 보면 대충 답이 나온다.
많이 팔리고 반응이 좋은 제품들을 위로 올리는 것이 기본이니까.
마켓 프레시의 로직도 그렇다.
일주일간 많이 팔린 상품들이 상단으로 올라오고, 그 전주의 데이터는 2분의 1의 수치로 반영한다.
이걸 어떻게 알았냐고?
지난 한 달 동안 이 사이트의 로직을 알기 위해 밤새 들여본 결과다.
“응.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뭐가 잘 팔리는지 정도는 보여.”
“역시 본부장님이십니다.”
“이따 사무실 들어올 때 라떼 한잔 사오는 거 잊지 말고.”
“네!”
김용현 차장은 내게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 * *
퇴근 시간.
“나 먼저 들어간다. 수고들 해!”
업무를 마무리 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사업부 인원들에게 대충 손을 흔들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그때, 또 달라붙는 거머리들.
“진준 부장! 우리 오늘 한잔 할 건데. 같이 갈까?”
고동수 본부장은 또 반말이다.
“그래요 같이 가요. 오랜만에 본부장들끼리 뭉쳐요. 우리 디몰의 미래를 위해서.”
술잔을 꺾는 시늉을 하는 차주영 본부장.
술자리에서는 지긋지긋한 인생 얘기만 털어놓을 것이 뻔하다.
“약속 있습니다.”
“그래? 누구? 여친 만나나?”
저 반말. 이제 못 참겠다.
“고 부장님! 회사에서 말 좀 가려 하시죠?”
“으응?”
“제가 나이는 어려도 본부장입니다. 앞으로 똑바로 존대하셨으면 합니다.”
마켓 프레시로 이직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일까?
오늘은 제대로 하고 싶은 말을 했다.
고동수 본부장은 내 말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알았어요. 알았어. 난 좀 더 친해져 보려고 한 거지.”
“또!”
“알았어요. 됐습니까?”
“그리고 차 부장님. 일 안 하십니까? 일 좀 하시죠. 그러니까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겁니다!”
“…….”
고개를 푹 숙인 차주영 본부장.
평소 하고 싶은 말을 내뱉었더니 속이 다 시원하다.
나는 씩 웃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리고 엘리베이터에 타지도 못하고 멍하니 서 있는 두 본부장에게 말했다.
“안 타요?”
“아……. 가요. 가.”
* * *
오후 8시 20분.
주인공은 원래 조금씩 늦는 법.
그리고 이런 자리에 너무 빨리 나가면 나에게 마이너스다.
최대한 도도하고 있어 보이는 척.
오늘 입은 이 명품 슈트에 깜짝 놀라겠지?
나는 일부러 천천히 걸어서 원지훈 이사와 만나기로 한 커피숍에 들어섰다.
“원지훈입니다.”
TV에서 보던 것보다 더 잘생겼다.
이 정도 외모면 연예인이나 하지 왜 MD가 됐을까?
그리고 입고 있는 저 슈트.
이번에 헨리비통에서 새로 나온 신상이다.
마켓 프레시 대주주라고 하더니 정말 돈이 많은가 보다.
“김진준입니다.”
인사를 하고 명함을 건넸다.
그는 본부장이라 박힌 내 명함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디몰의 본부장님이셨군요.”
“네. 한 달 전에 디몰로 발령받았습니다.”
“거기 마켓 프레시에서 넘어가신 분들도 좀 있는데, 잘들 지내시죠?”
차주영, 고동수 본부장을 묻는 건가?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주 잘 지내십니다.”
“다행이군요. 앉으세요. 차는 뭐로 할까요?”
“전, 라떼로 하겠습니다.”
커피를 주문하고, 원지훈 이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테이블의 먼지를 오른손으로 계속 털어 냈다.
뭐지? 결벽증이라도 있나?
말은 안 하고 계속 테이블의 먼지만 털어 내고.
뭐 그럼 내가 먼저 선수를 쳐야겠다.
“이사님. 절 부르신 이유가 뭡니까?”
“본부장님 소문이 하도 많아서, 얼굴 좀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요?”
돌려서 말하겠다는 건가?
빨리 본론을 꺼내!
난 마켓 프레시로 넘어갈 준비가 됐으니까.
씩 웃으며, 라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자 원지훈 이사가 천천히 말을 걸어왔다.
“초면에 이런 말씀드리기 영 어렵네요. 제가 이런 거 잘 못해서…….”
“괜찮아요. 친구처럼 편하게 대하세요.”
자 이제 판을 깔아줬으니까.
내 연봉부터 불러라!
말하는 금액의 50% 이상은 올려 칠 테니까.
원지훈 이사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이도 비슷한 것 같은데, 그럼 진짜 친구처럼 대하겠습니다.”
“네.”
“씨앤코리아, 오양 식품, 기린 어묵, 창해 푸드, 영진 실업, 화도 식품. 이 회사들 기억나세요?”
“……!”
“기억 안 난다고는 못하시겠죠. 당신이 레시피를 훔쳐 간 회사들이니까.”
뭐지? 어떻게 알았지?
그리고 오늘 부른 것이 스카우트가 아닌 저 쓰레기 같은 회사들 얘기를 하려는 것인가?
“이봐요. 제 뒷조사를 하고 다니는 겁니까?”
“비싼 밥 먹고, 제가 왜 당신 같은 쓰레기 뒷조사나 하겠습니까?”
“쓰레기요?”
“네. 쓰레기. 같잖은 암기력으로 이들 레시피를 훔쳐 가는 쓰레기.”
“……증거 있습니까? 증거 있냐고요?”
“증거야 많죠. 일단 당신 자체가 증거니까.”
뭐가 이렇게 당당한가?
정말 뭔가 가지고 있다는 것인가?
아니, 그럴 리 없다.
지금까지 법정에서 만났던 그 어떤 기업도 제대로 된 증거를 내민 적이 없다.
“더는 할 말이 없겠군요.”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등을 돌리자, 원지훈 이사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앉아.”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사람을 꿰뚫어 보는 것 같은 차가운 눈빛.
심장이 얼어 버릴 것 같은 기분이다.
“…….”
“다음은 내가 어떻게 할 거 같아요?”
“뭐……. 뭐를 말입니까?”
“난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이 지은 죄를 밝혀낼 겁니다. 이건 정말 기대할 만할 겁니다. 난 한다면 정말 하는 사람이니까.”
“…….”
“그럼 당신은? 뻔하죠. 바론에 징징거리고 매달리겠죠. 하지만 김진준 본부장님도 아시죠? 바론이 꼬리를 쳐 내는 것에 눈 하나 깜짝 안 한다는 것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침착하자. 침착해.
그냥 협박일 뿐이다.
증거가 남아 있을 리가 없다.
잠깐, 창해 푸드에서 잃어버린 다이어리.
혹시 그걸 가지고 있는 것일까?
아니다. 아닐 거다.
창해의 김명법 대표는 소송도 안 걸고, 잠적을 하여 버렸으니까.
내 얼굴을 보고 씩 웃는 원지훈이사.
소름이 돋는 미소다.
“창해 식품에 아주 좋은 걸 두고 가셨더군요.”
“……!”
모든 제조사의 레시피들이 적힌 다이어리를 찾았단 말인가?
아……. 끝이구나. 이제 끝이구나.
나는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자리에 앉았다.
“뭘 원하시는 겁니까?”
“이제 대화가 좀 되는군요. 모든 것을 제자리에 돌려놓으세요.”
“…….”
“이해 안 돼요? 당신이 베껴 만든 바론의 제품들 모두 파기하라는 말입니다.”
“그건 제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일주일 드리겠습니다. 그때까지 소식이 없으면, 저도 제 방식대로 하겠습니다.”
원지훈 이사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의 멍하니 뒷모습을 바라보다 긴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