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억을 듣는 회사원-178화 (178/223)

<기억을 듣는 회사원 178화>

179. 하지만 분명 같은 레시피입니다

“이사님 축하해!”

능글맞은 표정의 김태하 차장이 내 방으로 들어왔다.

“뭐가?”

“투비팩 말이야. 미국 우유 회사랑 계약했다면서? 어디더라?”

투비팩 미국 영업 담당자는 전략기획부의 신인성 과장.

그는 미국으로 넘어가 겨우 일주일 만에 첫 번째 계약을 따냈다.

그것도 미국 내 10% 이상의 점유율을 가지고 있는 블루 다이아몬드와 말이다.

이로써 우리가 얻게 될 수익은 연간 10억 원 정도.

아직은 적은 금액이지만, 이는 시작일 뿐이다.

“블루 다이아몬드.”

“그래, 맞아. 거기.”

“인성 과장한테 들었어?”

“응. 아주 신나서 떠들더라. 솔직히 인성이는 사무실보다는 현장이 더 어울리긴 하지. 그리고 미국에서 오래 일해서 그쪽에 빠삭하잖아.”

“그래.”

“기억나? 내가 인성이가 딱이라고 추천했던 거?”

“그래서 인성 과장을 담당으로 둔 거야.”

“진짜?”

“응, 그룹폰 사람들은 네가 잘 알잖아.”

내가 순순히 동의하자, 김태하 차장은 고개를 좌우로 틀며 나를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봤다. 그리고 내 이마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열은 안 나는데……. 어디 아파?”

“뭐야?”

“개 싸가지 원지훈이가 순순히 동의하다니. 오늘 뭐 잘못 먹은 거 같은데?”

나는 미간을 좁히며, 내 이마에 올린 그의 손을 가리켰다.

“이거 안 치우냐? 진짜 개 싸가지가 뭔지 보여 줄까?”

내 말을 들은 김태하 차장은 이마를 살짝 내려치고 씩 웃었다.

마치 고등학교 때 장난을 치던 것처럼.

“어쭈? 감히 차장 나부랭이가 이사님 이마를 쳐?”

“그래서 왜? 자르려고? 자를 테면 잘라! 노동청에 확! 그리고 차장 나부랭이? 차장들 싹 모아 볼까?”

“아니, 그 전에 폭행치사로 신고할 거다.”

“폭행? 증거 있어?”

“증거 없으니까 두드려 패 볼까?”

나는 고등학교 때처럼 김태하의 목에 헤드록을 걸며 장난쳤다.

그 순간, 이예나가 빼꼼히 문을 열고 고개를 들이밀었다.

“저, 이사님. 레슬링 중에 죄송한데요…….”

“아! 예나 씨……. 이거 장난이야. 장난!”

깜짝 놀란 김태하 차장이 나를 밀어냈고, 나는 딴 곳을 보며 헛기침을 했다.

“흠……. 흠…….”

“최충연 팀장님이 기다리시는데 어떻게 할까요? 좀 급하신 거 같은데…….”

“아, 그래? 들어오시라고 해. 그리고 예나 씨 그냥 인터폰으로 하지.”

“했는데, 답이 없으셔서요.”

너무 시끄러워서 못 들었나 보다.

“아……. 그랬나? 미안.”

“그럼 들어오시라고 하겠습니다.”

“그래.”

내 답에, 김태하 차장은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다소 상기된 표정의 최충연 팀장이 들어왔다.

오늘 그는 조금 이상해 보였다.

평소 인상을 잘 쓰지도 않고, 매일 웃는 표정의 그인데…….

“앉으세요. 팀장님 무슨 일 있어요?”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이러려고 커머스를 시작했나 봅니다.”

“바론이요?”

“네. 바론이요. 진짜 내가 어이가 없어서.”

나는 찻잔에 뜨거운 차를 따라 그에게 건네며 물었다.

“무슨 일인데요?”

“씨앤코리아라고 오프라인 마트에만 치킨너겟을 납품하던 회사가 있어요. 거기 대표가 제 친구인데, 이 바보 같은 놈이 디몰이랑 계약했더라고요.”

씨앤코리아.

아는 곳이었다.

디몰에서 식품 카테고리를 오픈한 일주일 동안 매출 1위를 하던 치킨너겟 제조사.

제품이 괜찮아 보여서 나도 주문을 해 봤다.

겉은 바삭하고 살은 퍽퍽하지 않아 꽤 기억에 남는 제품이었다.

“씨앤코리아면 치킨너겟, 맞죠?”

“네. 맞아요.”

“그런데 거긴 왜요?”

“그 등신이 말이죠. 바론이 던진 투자금에 홀딱 넘어가서 계약했더라고요. 모르면 좀 묻던가. 근처에 친구가 있는데 그걸 그냥……. 어휴.”

“얼마나 투자했는데요?”

“겨우 3억이요.”

“근데 무슨 문제 있어요?”

“어제 그놈이 술 한잔하자고 해서 마셨거든요. 근데 레시피를 뺏겼답니다. 바론이 똑같은 레시피로 해서 지난주에 출시했답니다.”

“쌀 치킨너겟?”

바론이 지난주에 출시한 쌀 치킨너겟.

마트의 주요 위치에 진열되어 있고, TV 광고도 빵빵하게 돌리고 있어서 잘 알고 있다.

무엇보다 소비자의 평가도 좋았다.

이렇게 바삭하고 살이 통통한 치킨너겟은 처음이라면서 말이다.

“네, 맞아요. 그거 원래는 씨앤코리아 제품입니다.”

제조사에서 레시피를 뺏기는 일은 종종 일어난다.

그리고 결과는 언제나 강자의 편을 들어 줬다.

“그래서 그냥 가만있는데요?”

“신문사에 투고도 하고, 변호사 찾아다니고……. 해 볼 건 다 해 봤답니다. 근데 달걀로 바위 치기죠. 바론 법무 팀과 홍보 팀을 어떻게 이겨요.”

우리나라 최고의 식품 기업인 바론.

그들의 홍보 팀과 법무 팀은 가히 최고라 불린다.

홍보 팀은 우리 BO푸드 인원의 두 배나 많고, 법무 팀은 화려한 명함을 가진 인물들이 즐비하다.

나는 고개를 좌우로 젓고 차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서 우리가 나서자는 겁니까?”

“그게……. 후……. 아닙니다. 아무래도 이건 좀 그렇겠죠?”

실망한 표정의 최충연 팀장.

내가 흥분하고 나서 줄 것으로 생각했었나 보다.

하지만 이번엔 우리도 나설 명분이 없다.

씨앤코리아는 우리와 계약한 제조사도 아니고, 단순히 최충연 팀장의 친구일 뿐이다.

“네. 이번엔 좀 힘들겠네요.”

내 답을 들은 최충연 팀장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테이블을 내려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사님!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어떻게요?”

“씨앤코리아가 우리와 PB 계약을 하면요? 치킨너겟이 우리의 브랜드를 달고 출시하면 얘기가 달라지는 거 아닙니까?”

“팀장님. 마음은 알겠는데, 그래도 그건 좀 그러네요.”

“아뇨. 충분히 됩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디몰의 유통 계약은 특정 브랜드의 독점 판매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제품의 브랜드명을 걸고 계약했겠죠. 하지만 제조사가 자신의 브랜드를 포기하고 PB로 납품한다면, 이건 말이 달라집니다. 완전히 다른 새 브랜드니까요.”

묘하게 설득력이 있다.

일전에 감자칩 회사도 자신의 브랜드를 팔면서 대형 마트와 별도의 PB 계약을 한 적이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 들어와 있는 PB 제품들도 자신의 브랜드 제품을 팔면서 계약한 경우가 다반사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편법일 뿐.

이를 정당화할 수 있는 명분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소비자들을 인정시킬 수 있다.

“그래서 그런 양아치 짓을 하자는 겁니까?”

“이게 왜 양아치예요? 제조사가 정당하게 계약서에 위반되지 않는 판로를 찾는 겁니다.”

“…….”

“그리고 정말 레시피를 훔쳤다면, 계약을 어긴 것은 바론입니다. 바론이 먼저 계약 조항을 어긴 겁니다.”

이건 최충연 팀장의 말이 맞다.

바론이 레시피를 훔쳤다면 비밀 유지 조항을 어겨 자연스럽게 계약이 파기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럼 레시피를 훔쳤다는 것을 찾는 것이 우선이겠군요.”

“네. 혹시나 문제가 되면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책임지고 옷 벗겠습니다.”

최충연 팀장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고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변태도 아니고 옷은 왜 벗어요?”

“네?”

“일단 좀 볼 수 있을까요? 팀장님 친구라는 씨앤코리아 대표님이요.”

최충연 팀장은 내 얼굴을 보며 씩 웃었다.

“고맙습니다.”

“일단 입점, 투자 계약서랑 메일이나 메시지로 주고받은 내용을 정리해 달라고 하세요. 한번 찾아보죠. 팀장님의 말처럼 문제가 없을지.”

“예. 알겠습니다.”

* * *

며칠 후,

내 방으로 회색 공장 점퍼를 입은 한 남자가 들어왔다.

“씨앤코리아의 최무진입니다.”

정갈한 8대2 가르마와 옅은 눈썹.

매서운 눈매와 툭 튀어나온 광대가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옆구리에 손지갑을 끼고 있는 거구의 그는 얼핏 보면 사채를 받으러 온 것 같았다.

“원지훈입니다. 앉으시죠.”

내가 테이블을 향해 손짓하자, 최무진 대표는 차가운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나는 구석으로 가서 차를 준비하며 입을 열었다.

“커피 드릴까요?”

“그냥 시원한 물 한 잔 주십시오.”

커다란 잔에 물 두 잔을 받아, 테이블로 돌아왔다. 최무진 대표는 벌컥벌컥 물을 들이켜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희 상황은 들어서 아시죠?”

“네. 최충연 팀장님께 들었습니다.”

“솔직히 연락 주신 거 듣고 좀 의외라 생각했습니다. 무슨 방법이 있겠습니까? 치킨너겟은 우리 직원들이 밤낮을 안 가려서 만든 제품입니다.”

최무진 대표는 의자를 앞으로 당겨 앉으며 내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씨앤코리아 직원이 몇이죠?”

“스물이 조금 넘습니다.”

“PB 계약에 대해서는 들으셨죠?”

“네. 충연이, 아니 최 팀장에게 들었습니다.”

“그래요. 대표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가능할 거라 보십니까?”

“네. 충분히 가능합니다. 비슷한 대법원 판례가 있었고, 우리 계약서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투자금은요?”

“말씀하시면 바로 상환하도록 하겠습니다.”

꽤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최무진 대표.

하지만 나는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밤새 계약서와 주고받은 메일, 메시지 등을 뒤져 봤지만 바론의 처사에는 약간의 빈틈도 없었다.

“바론은 큰 회사입니다. 법무 팀과 회계 팀의 파워도 상상 이상이고요. 그래도 해 보시겠습니까?”

“네. 우리 제품을 찾을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다 하겠습니다.”

최무진 대표는 이를 악물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나는 짧은 한숨을 내쉬고, 노트를 펼쳐 메모를 시작했다.

“후……. 그럼 하나씩 짚어 보죠. 바론의 제품이 씨앤코리아의 제품과 같은 레시피라는 증거가 있습니까?”

“아니요. 하지만 분명 같은 레시피입니다.”

“바론의 레시피를 보신 적이 있으세요?”

“그건 아니지만…….”

“그럼 카피라는 확실한 근거도 없는 거잖아요. 어떻게 확신하시는 겁니까?”

“김진준, 그놈이 우리 공장에 일주일간 파견을 나왔습니다.”

제조 과정을 봐도 모든 레시피를 파악할 수는 없는 법.

이건 솔직히 억지다.

“그건 아무런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아닙니다. 정말 그놈입니다. 그놈이 우리 공장에서 훔쳐 간 겁니다.”

“대표님. 그렇게 무턱 대고 우기기만 하시면 저희도 도와 드릴 수가 없습니다.”

최무진 대표는 부들부들 주먹을 떨며 물이 담겨 있던 물잔을 건드리고 말았다.

테이블 위로 쏟아진 물.

나는 재빨리 그가 마셨던 물잔을 잡았다.

<아니면 어떡하지? 바론이 우리 레시피를 훔친 게 아니면?>

<아니야. 분명 똑같은 맛과 육질이었어. 소스와 닭 삶는 육수를 훔친 게 분명해. 그게 아니면 절대 그 맛이 나올 수 없어.>

<바론이 정말 그랬을까?>

<맞아. 바론 그 새끼들 그런 놈들로 원래 유명하잖아.>

자신도 확신하지 못하는구나.

이러면 답이 없다.

나는 엎질러진 물을 닦아내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 바론이 씨앤코리아의 레시피를 훔쳤다고 확신하십니까?”

“네. 확신합니다.”

“만약 대표님이 틀렸다면 PB를 제안한 저희도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럼 제가 옷을 벗겠습니다.”

옷 벗는 게 무슨 유행인지.

최무진 대표는 최충연 팀장과 똑같은 말을 했다.

“일단 레시피를 훔쳤다는 증거를 찾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전까지는 저희도 어떤 제안을 드릴 수 없습니다.”

“이사님. 혹시……. 저와 같은 처지의 제조사들이 있는데, 만나 보시겠습니까?”

“네?”

“바론에게 레시피를 뺏긴 제조사들이요. 이번 일 때문에 몇몇 제조사들을 만나 봤는데, 저랑 똑같은 피해를 본 제조사들이 꽤 있더군요.”

똑같은 피해를 본 제조사들이라…….

혹시 거기서는 뭔가 단서를 찾을 수 있을까?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일단 그렇게 해 보죠.”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아직 아무것도 단정 지을 수 없다.

바론과의 악연으로 그들의 잘못을 무턱대고 믿을 수만은 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최무진 대표의 말이 맞는다면.

그리고 다른 제조사들도 똑같은 피해를 보았다면.

절대로 묵인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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