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177화>
178. 원지훈 이사님이 제 징크스였나 봐요
인천 남동 공단의 제이 스킨 사옥.
붉은 벽돌 외관의 3층 건물에 담쟁이덩굴이 가득했다.
잘 정돈된 화단에서 진한 풀 내음이 풍겨 왔고, 삭막한 공단의 다른 건물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김민정 팀장은 주변을 둘러보고 기분이 좋았는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건물이 참 예쁘네요. 어제 이사회에서는 결정이 난 건가요?”
“네.”
“제이 스킨에는 얘기했어요?”
“네. 재무제표도 준비해 달라고 했습니다.”
어제 늦은 시간까지 이어진 이사회.
김지영 대표와 나를 포함한 이사들은 새로운 코스메틱 카테고리의 총괄로 유이나 대표를 원했다. 또한, 가능하면 제이 스킨까지 인수해서 가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아, 그렇군요. 이사님 우리 잠깐 숨 좀 쉬고 가요.”
“숨이요?”
“네. 여기 좋잖아요. 나무도 많고 화단도 예쁘고.”
눈을 감고 양팔을 벌린 김민정 팀장.
그녀는 상쾌한 표정으로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나는 그녀를 두고 한쪽 구석으로 가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건데?”
“모르지. 대표님 생각을 내가 어떻게 알겠어.”
골목이 꺾이는 부분에서 들려오는 여자들의 목소리.
제이 스킨의 직원인가?
나는 벽에 바짝 붙어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왜 마프래? 거긴 먹을 거만 팔잖아.”
“내 말이……. 디몰이 우리랑 더 잘 맞을 텐데 말이야.”
“그나저나 디몰에서 제안 온 거 맞아?”
“맞다니까. 내가 그쪽 이사랑 미팅하는 거 똑똑히 봤어.”
“그냥 미팅하는 것만 본 거잖아.”
“그냥 본 거만 가지고 이러겠어? 내가 지나가다가 얼핏 들었단 말이야. 매각 어쩌고 하는 얘기를.”
“그래?”
“응, 대표님 저번 주에 회사 많이 안 나오셨잖아.”
“아……. 그래서 그랬나?”
디몰이 제이 스킨과 접촉을 했단 말인가?
코스메틱은 우리가 먼저일 것으로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없구나.
나는 담배를 끄고, 김민정 팀장이 있는 곳으로 갔다.
“민정 팀장님. 산림욕 다 했어요?”
“산림욕? 아……. 이거요?”
“끝났으면 가죠.”
“잠깐만요 이사님.”
갑자기 나를 불러 세우는 김민정 팀장.
그녀는 내 눈을 뚫어지게 보며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코스메틱 BM들 상대하기 힘드셨죠?”
“좀……. 그렇더라고요.”
“제가 이쪽 BM들은 잘 알아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저한테 다 맡기세요.”
“정말 그래도 되겠어요?”
“물론이죠.”
김민정 팀장은 어깨를 쫙 펴고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씩 웃고 고개를 끄덕였다.
* * *
잘 정리된 제이 스킨의 사무실.
나무 데크와 초록의 가구들이 가득했다.
사무실 곳곳에는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걸려 있었고, 화장품 회사라 그런지 냄새까지 산뜻했다.
“된장찌개 냄새 풀풀 나는 우리 사무실보다 훨씬 좋네요.”
김민정 팀장은 주변을 둘러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는 씩 웃고, 우리를 맞이하러 나온 여직원을 바라봤다.
“마켓 프레시에서 왔습니다.”
“네. 대표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쪽으로 가시죠.”
건물의 2층, 한쪽 구석에 마련된 대표이사실.
투명한 유리 벽 안에 있던 유이나 대표는 우리를 보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환한 미소와 함께 손을 내밀었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무실이 좀 작죠?”
“아닙니다. 좋아요. 아주 좋아요.”
김민정 팀장이 손사래를 치고, 자신의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유아동 카테고리의 김민정입니다. 이전 그룹폰 때는 코스메틱을 담당했었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그나저나 대표님 베이스 뭐 쓰세요?”
“네?”
“비비는 바르신 거죠?”
“아……. 그게.”
“설마 쌩얼이에요? 어머. 감동이네. 감동.”
“고맙습니다.”
유이나 대표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김민정 팀장은 나를 힐끔 보며 자신이 한 건을 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간단한 인사가 끝나고, 우린 대표이사실로 들어갔다.
문이 그대로 열린 채로.
이래서 다른 직원들이 들을 수 있었던 것이구나.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열린 문을 닫고, 유이나 대표에게 물었다.
“여기 블라인드를 좀 쳐도 될까요?”
“아……. 네. 제가 해야 했는데.”
유이나 대표는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나 내가 있는 반대편의 블라인드를 내렸다.
나는 블라인드를 내리기 위해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그때 들려오는 그녀의 기억.
<에센스 라인에서 또 트러블이 났다고?>
<카모마일 때문에 트러블이 나는 사람은 없을 텐데.>
<어떤 학술지에도 나리시스가 트러블을 일으켰다는 내용은 없어.>
<에센스 라인은 욕심이었나?>
<이 상태로 출시할 수는 없어.>
그리고 다른 블라인드 손잡이에서 들려온 기억.
<미백 라인에서 알부틴 쓰는 제품들은 많잖아. 올리브도 그렇고.>
<왜 이렇게 보습이 약하지? 지속력을 늘려야 해.>
<판테놀이 문제였을까?>
<일단 미백 라인은 보류해야겠어.>
수많은 생각들.
김민정 팀장이 틀렸구나.
제이 스킨은 에멀젼 하나에만 집중한 것이 아니었다.
미백, 에센스, 파우더 심지어 색조까지.
수많은 제품을 연구하고 출시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모두 출시하기 전에 폐기하고 말았다.
왜 힘들게 개발한 제품을 폐기했을까?
보통 코스메틱 회사들은 소비자의 피부를 100% 맞추지 못한다.
아무리 저자극이라고 해도 맞지 않는 사람이 생긴다는 것은 코스메틱을 잘 모르는 나도 알고 있다.
나는 블라인드를 모두 치고 자리에 앉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제 제이 에멀젼을 좀 찾아봤는데, 좋은 평들이 자자하더군요.”
“감사합니다.”
“다른 라인은 준비 안 하세요?”
“네. 저희는 에멀젼 하나라도 완벽하게 하자라고 생각했어요. 지금 영업 이익도 괜찮고……. 이거 말씀하신 자료입니다.”
유이나 대표는 테이블 위의 두툼한 서류 봉투를 내게 밀어 줬다.
이곳에 오기 전 약식 재무제표를 준비해 달라고 했는데, 그 문서인가 보다.
내가 봉투를 열어 보는 사이, 김민정 팀장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에센스나 미백 라인은 어때요?”
“네?”
“만약 저희와 함께하시면 자연스럽게 PB도 만지게 될 텐데. 그때 도전해 보시면 어떨까 해서요. 아깝잖아요.”
“그런가요?”
“네. 기다리는 고객들도 많을 거예요.”
“그럼 더 신중히 해야죠. 기다리시는 고객이 많으시니까. 음료수도 좀 드세요.”
유이나 대표는 테이블 중앙에 있는 음료수를 가리켰다.
김민정 팀장은 눈웃음을 지어 보이고, 음료 두 개를 가져와 하나는 내게 줬다.
그때, 출력한 재무제표에서 들리는 기억.
<170억이면 후하게 쳐 줬는데, 왜 그걸 마다해?>
170억? 디몰이 던진 인수금 액인가?
그리고 이 목소리는 유이나 대표의 목소리가 아니다.
회계를 담당하는 직원인가?
내가 재무제표를 보는 사이, 김민정 팀장은 유이나 대표의 환심을 사기 위한 대화를 이어 갔다.
화장품 얘기, 아이 얘기, 남편 얘기 등등.
여자들만이 할 수 있는 대화였다.
이래서 자신에게 맡기라고 했나 보다.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재무제표의 내용과 안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그렇게 10여 분 후.
“대표님.”
내 목소리에 편하게 대화를 나누던 유이나 대표가 답했다.
“네?”
“일단 제가 볼 때는 이상이 없네요. 저희 법무팀에 전달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옅은 미소를 짓는 유이나 대표.
이제 그녀의 마음을 들어 볼 차례다.
“그리고 대표님. 이건 좀 힘든 얘기가 될 수 있는데요. 물어도 될까요?”
“네. 괜찮습니다.”
“재무제표를 보면 깔끔한 회사인데 왜 매각까지 고민하시는 겁니까? 제가 코스메틱은 잘 몰라도 충분히 다른 라인을 출시하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자본이 많으면 새로운 제품 출시나 마케팅에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습니다.”
“그럼 아예 다른 라인은 시도도 안 해 보신 건가요?”
“네.”
거짓말이다.
지금까지 수도 없이 새로운 라인을 만들고 지웠으면서.
나는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 다시 질문을 이었다.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묻죠.”
“네. 편하게 해 주세요.”
“디몰의 제안은 왜 거절하신 건가요?”
당황한 표정의 유이나 대표.
그녀는 음료수를 들이켜고 잠시 고민하다 답을 했다.
“금액이 맞지 않아서요.”
이 또한 거짓말이다.
회계를 담당하는 직원이 170억이면 후하다고 했다.
그리고 재무제표를 봐도 이는 역시 후하게 쳐 준 것이다.
“주총에서 논의해야 하지만, 일단 제 예상에는 120억 근처가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대금도 현금이 아닌 주식의 형태로 나갈 겁니다.”
“네.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디몰도 그 정도의 조건이었습니다.”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답하는 유이나 대표.
디몰이 제시한 금액에서 50억이나 모자라는 데도 단숨에 수락했다.
전혀 협상도 하지 않고 말이다.
나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다시 질문을 이었다.
“괜찮으세요?”
“다른 직원들과 상의는 해 봐야겠지만, 어차피 90% 이상 제 지분입니다. 또 재무제표를 봐도 그 금액이 맞고요.”
“후회하지 않으시겠어요?”
“마켓 프레시는 성장 가능성이 있는 회사잖아요. 그 회사의 지분을 받으면 저야 좋은 거 아닙니까?”
도대체 이유를 모르겠다.
더 높은 금액을 제시한 디몰의 제안을 거절하고, 조건을 협상도 하지 않는 이유를.
계속 속이려 한다면 방법은 하나뿐.
조금 전의 기억을 찾아야 한다.
나는 그녀와 마주한 테이블에 오른손을 올리고 들려오는 기억에 귀를 기울였다.
<에센스는 연구 중이던 제품에서 조금만 수정하면 될 거야.>
<에멀젼 때도 해냈잖아. 이번에도 잘할 수 있을 거야.>
그때 내 머리를 스치고 가는 기억.
유이나 대표는 나도 기억을 못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그녀의 기억 속에는 내가 있었고, 원스몰 당시 전해 줬던 제품의 보완 사항도 간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설마…….
“징크스군요.”
“네?”
사람은 누구나 징크스를 가지고 있다.
3년 전, 작은 회사였던 제이 스킨은 다른 에멀젼의 레시피를 그대로 카피했다.
거기에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했던 성분을 추가했고, 서로 상극의 성분이 있는데도 이를 모르고 샘플을 찍어 냈다.
그리고 그녀는 지인들에게 간단한 테스트를 받았을 것이다.
누구나 그렇게 하니까.
하지만 지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 뻔하지 않은가?
이제 막 사업을 시작하는 친구에게 심한 말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자신감에 찬 제품을 들고 찾은 곳이 우리 원스몰.
나는 무려 70여 가지가 넘는 지적 사항을 만들었다.
그것도 단 하루 만에.
보통의 사람이라면 아마 이를 보고 포기했을 것이다.
재능이 없다며 포기하거나, 땡처리로 팔아치우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유이나 대표는 달랐다.
그녀는 모든 제품을 폐기하고 지금의 완벽한 에멀젼을 만들어 냈다.
나는 더 들추는 것이 그녀의 자존심을 다치게 할 거라는 생각에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냥 그렇다는 말입니다.”
내 말에, 유이나 대표는 고개를 숙이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맞아요. 징크스. 원지훈 이사님이 제 징크스였나 봐요.”
“…….”
“마켓 프레시에서 연락이 왔을 때 얼마나 좋았는지 아세요? 사실, 저희는 여러 제품에 도전했었습니다. 하지만 욕심처럼 제품이 나오질 않더군요. 그때처럼 명확하지 않고 뿌옇기만 했어요.”
“…….”
“도와주시겠습니까? 그때처럼.”
“지적질밖에 못하는 제가 필요하다면 그렇게 하죠.”
내 답에, 유이나 대표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욕심 많은 사람입니다.”
“압니다. 그래서 함께하자고 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