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억을 듣는 회사원-174화 (174/223)

<기억을 듣는 회사원 174화>

175. 먹는 거로 장난치면 다쳐요

* * *

상상하는 것만으로 답이 나오지 않는다.

답을 찾기 위해서는 문제의 시작을 직접 만나 보는 것이 좋다.

“이사님. 이 건물 3층입니다.”

신선팀의 최지섭이 새로 지은 듯한 건물을 가리켰다.

강남 한복판의 30층짜리 건물.

이 커다란 건물의 3층을 통으로 쓴다면 분명 규모가 크다는 것인데…….

나와 최지섭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3층.

벽에는 브론드라는 회사의 로고가 요란하게 적혀 있었다.

최지섭은 주변을 살피며, 긴 복도의 끝으로 향했다. 그리고 굳게 닫힌 유리문 옆의 초인종을 눌렀다.

- 네. 브론드입니다.

“마켓 프레시 최지섭입니다. 김도엽 팀장님 뵈러 왔습니다.”

철컥!

문이 열리고, 김도엽 팀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다가왔다.

심한 곱슬머리의 그는 머리카락을 짧게 자른 상태였고, 안이 더웠는지 하얀 와이셔츠의 소매를 걷고 있었다.

“지섭 씨 오랜만! 잘 지냈어요?”

“네, 잘 지냈습니다. 그리고 여긴 저희 이사님이십니다.”

최지섭이 나를 소개하자, 김도엽 팀장은 허리까지 숙이며 인사를 했다.

“브론드의 김도엽 팀장입니다.”

“네. 원지훈입니다.”

“안으로 드시죠. 대표님께서 기다리십니다.”

“대표님이요?”

“네, 오신다는 얘기 듣고 저희 대표님이 직접 뵙고 싶다고 하셔서…….”

말끝을 흐리며, 이맛살을 찌푸리는 김도엽 팀장.

그는 입구와 가장 먼 곳에 있는 대표이사실을 가리켰다.

나는 그의 뒤를 따라 걸어가면서, 앉아 있는 직원들을 둘러봤다.

기분 탓인지 몰라도, 통화를 하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그들이 뭔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아이고! 원지훈 이사님께서 직접 와 주시고!”

대표이사실의 문이 열리고 머리가 벗겨진 60대로 보이는 남자가 양팔을 벌렸다. 그리고 나를 얼싸안고 내 등을 두드렸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

“정말 반갑습니다. 내가 언제 원 이사님 한 번 찾아갈까 했어요. 하하하.”

나는 무안한 표정으로 그를 떼어 내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고맙습니다.”

“자자, 빨리 들어와요. 오늘 특별히 귀한 차를 준비했으니까.”

대표이사실.

언제부터 우렸는지, 은은한 차 향기가 가득했다.

사무실 안을 둘러봤다.

진열장에는 전 세계의 기념품들이 가득했고, 책상과 소파 앞의 테이블에도 생전 처음 보는 희귀한 물건들이 빼곡히 놓여 있었다.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주머니의 명함을 꺼냈다.

“향이 좋네요. 원지훈이라고 합니다.”

브론드의 대표이사는 내가 내민 명함을 보고, 자신의 책상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그리고 책상 위의 명함 통을 들고 와, 나와 명함을 교환했다.

“김갑종입니다. 자자! 차 식기 전에 빨리 들어요. 내가 귀한 손님들 온다는 말에 우렸으니까 사양하지 말고 들어요.”

김갑종.

처음 듣는 이름이다.

이 정도 규모의 유통사 대표라면 이름 한 번쯤은 들어 봤을 텐데…….

“네. 잘 마시겠습니다.”

우린 가죽이 반들반들한 고급 소파에 앉아, 찻잔의 차를 마셨다.

설탕을 녹였나?

이게 도대체 무슨 맛인지.

너무 달아서 쓰게 느껴질 정도였다.

“어때요?”

김갑종 대표는 눈가에 자글자글한 주름을 보이며, 부담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나는 환한 미소로 그의 관심에 대응했다.

“아주 좋네요.”

“이거 제가 세네갈에서 직접 가져온 차입니다. 세네갈 말로는 아따야라고 하는데, 오늘 이렇게 귀한 분들께 대접을 하네요.”

“아……. 이게 세네갈의 차군요. 한국에서 세네갈의 차를 다 마시고 참 신기하네요.”

“그래서 제가 특별히 대접해 드린 겁니다.”

“세네갈이 그렇게 좋다던데, 저도 내년에는 꼭 가 볼 생각입니다.”

“그래요? 그럼 제가 세네갈에 대해 조금 설명해 드릴까요?”

“네. 그럼 저야 고맙죠.”

내가 관심을 보이는 것처럼 하자, 김갑종 대표는 신이 나서 말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세네갈 문화와 종교 등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는 사이, 나는 끊임없이 찻잔과 테이블 위의 물건들을 오른손으로 훑었다.

<내년에는 케이프타운에서 한 1년 살다 와야겠어.>

<카이로에서 차 한잔 했으면 좋겠다.>

<모이셔스 참 좋았지.>

케이프타운, 카이로, 모이셔스.

그의 기억은 아프리카의 주요 관광지에 대한 것뿐이었다.

그리고 이 잡다한 소품과 찻잔, 명함 등에서는 일과 관련된 기억이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10분쯤 지났을까?

아프리카에 대한 설명을 한참 동안 하던 김갑종 대표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유럽 사람들 휴가는 아프리카로 간다고 하잖아요. 원 이사님도 시간이 되시면 꼭 아프리카에 다녀오세요.”

“아……. 네. 그러겠습니다.”

내 답이 끝나자, 김갑종 대표의 옆에 앉아 시큰둥한 표정으로 있던 김도엽 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 얘기는 저쪽 회의실로 가서 하시죠.”

“왜? 김 팀장 여기서 하지?”

김도엽 팀장의 말에 김갑종 대표가 미간을 구겼다.

“김 이사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 그럼 그래요.”

“네.”

김 이사라는 말에 순순히 그러라고 하는 김갑종 대표.

뭔가 이상하다.

내가 그들을 살피는 사이, 김도엽 팀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김갑종 대표에게 고개를 숙이고, 우릴 다른 회의실로 데려갔다.

나는 그의 뒤를 따라가며 생각했다.

브론드의 설립일은 작년 12월.

겨우 5개월 된 회사다.

대표이사의 물건들 대부분에서는 여행에 대한 기억만 들린다.

일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관심도 없는 것인가?

그리고 무시하는 듯한 김도엽 팀장의 표정과 말투.

김 이사라는 말에 쩔쩔매는 듯한 행동.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바지사장.

김갑종은 브론드의 껍데기 대표일 뿐이다.

대표이사실 바로 옆 회의실.

김도엽 팀장이 문을 열자, 안에 앉아 있던 젊은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의 온몸에는 명품이 휘감겨 있었다.

뒤로 말끔히 넘긴 머리에 잡티 하나 없는 얼굴.

또한, 향수를 얼마나 뿌려댔는지 회의실에 그의 향수 냄새가 진동했다.

가만 생각해 보니, 이 사무실 처음부터 이상했다.

해산물 유통을 하는 곳에 비린내가 전혀 나지 않았다.

직원들의 흰 셔츠는 깔끔했고, 분주하게 움직였지만 뭔가 계속 어색했다. 마치 할 일이 없는 사람들이 일을 억지로 만들어 하는 것처럼.

“김태곤입니다.”

그는 나와 최지섭에게 차례로 명함을 건네고, 곧바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차분한 표정으로 본론을 꺼냈다.

“마켓 프레시에서 얼마나 사들일 수 있겠습니까?”

“글쎄요. 그건 브론드에서 어떻게 해 주냐에 달려 있겠죠.”

“국내산 장어가 킬로에 6천200원입니다. 이 단가로도 부족하다는 말입니까?”

“먼저, 키조개랑 쭈꾸미 얘기 먼저 하시죠.”

“키조개랑 쭈꾸미요?”

김태곤 이사와 함께한 이 회의 테이블.

쉴 새 없이 전달되는 기억들 때문에 정신을 차리기 힘들 정도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주 안에 처리해야 돼.>

<냉동으로 들어가면 반도 못 받아.>

<싸다고 들여왔다가 이게 무슨 꼴이야. 내가 그 조선족놈 말을 듣는 게 아니었는데.>

<마켓 프레시는 사입이니까. 한 번에 털어 낼 수 있어.>

<바론 놈들은 좀 대충 좀 넘어가지. 이거 전문가도 절대 구분할 수 없다니까.>

이렇게 생각이 많은 사람은 또 오랜만이다.

덕분에 그와 대화를 시작한 3분 만에 모든 것을 파악했다.

바론이 사입한다는 말에 중국산 활장어를 들여왔고, 중국산인 것이 걸려서 이제는 넘길 곳이 없다는 것을.

나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태안의 쭈꾸미랑 장흥의 키조개를 이번에 많이 사들이셨던데, 저희도 쭈꾸미랑 키조개를 사입할 수 있을까요?”

“그건…….”

“3톤 정도면 됩니다.”

“…….”

“왜요? 바론이 다 가져갔습니까?”

바론이라는 말에 흠칫 놀란 김태곤 이사.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머리를 긁적이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아시면서……. 하하.”

“전부 다 바론에 들어간 겁니까?”

“네…….”

“브론드는 자본금이 꽤 많은 회사인가 보네요. 장어에 쭈꾸미, 키조개까지 하면 얼추 60억 이상 될 텐데.”

그때, 들려오는 그의 기억.

<버르장머리 없는 어린년이 돈이 많긴 하지.>

<할머니 빽 믿고 설치는 꼴도 재수 없지만…….>

이제 이 브론드라는 회사가 누구의 돈으로 움직이는지 알겠다.

할머니 빽 믿고 설친다는 버르장머리 없는 어린년.

바로 김선녀 여사의 손녀인 이현아 대표다.

또한, 바지대표를 놓고 움직이는 것 또한 그들의 수법 중 하나다.

만약 일이 잘못되면 꼬리를 자를 수 있으니까.

김태곤 이사는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유통하려면 그 정도 자본은 있어야죠.”

“그래요?”

“쭈꾸미랑 키조개가 필요하시면 제가 추가로 좀 알아보겠습니다. 그리고 장어는…….”

나는 한 손을 올려 그의 말을 끊어 냈다.

“이사님 말씀 도중 죄송한데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아까 마신 차가 좀 이상했나 보네요.”

“아……. 네.”

밖으로 나와, 곧바로 정진택 차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다시 회의실로 돌아와 태연한 표정으로 그들을 마주했다.

“확인을 해 봤는데, 장어는 저희도 충분하다고 하네요. 쭈꾸미랑 키조개 얘기 계속하시죠.”

“아……. 그럼 좋습니다. 킬로당 5천200원. 대신 전량 매입해 주시는 조건은 어떻습니까?”

“…….”

“이 정도면 훌륭한 단가라고 생각하는데요?”

꽤 급하구나.

나는 손목의 시계를 확인하고 씩 웃으며 물었다.

“중국산 활장어를 그 단가에 파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중국산이요?”

“네. 중국산이잖아요.”

“누가 그럽니까?”

“물어볼까요?”

“누구한테 묻겠다는 겁니까?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나는 태연한 표정으로 주머니의 휴대전화를 꺼냈다. 그리고 전화번호부에서 이현아 대표를 찾아 스피커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어. 오빠! 오랜만이네. 무슨 일이야?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김태곤 이사와 김도엽 팀장의 얼굴이 잿빛으로 변해 버렸다.

“잘 지냈어?”

- 아니. 잘 못 지냈지. 요새 내가 얼마나 바쁜지 알아?

“해산물 유통하느라 바쁜가 보지?”

- 해산물? 그게 무슨 말이야?

“현아 대표. 어색하다. 여사님은 연기 잘하시던데, 넌 공부 좀 해야겠다. 그것도 아주 많이.”

-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나 바빠.

“그럼 하나만 묻자. 중국산 활장어. 이거 네가 지시했어?”

- 으……. 응?

“잘 들어. 만약 네가 이 뒤에 있었다면 절대로 쉽게 끝나지 않을 거야. 현아 대표도 잘 알지? 나 이런 거 한 번 물면 절대 안 놓는 놈이라는 거.”

내 말에, 이현아 대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크게 소리쳤다.

- 아니야! 나도 피해자야! 난 진짜, 국내산 가져오라고 돈 내줬는데, 그놈들이 멋대로 중국산 들여 온 거야. 나도 몰랐다고!

“그래. 현아 대표는 몰랐다는 말이지?”

- 응. 정말 하늘에 맹세해. 그놈들이 날 속인 거야.

황급히 꼬리를 끊어 내는 이현아 대표.

그녀는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적어서 이런 실수를 자주 했다.

오죽했으면, 그녀의 할머니도 참지 못하고 병원에서 나왔을까?

나는 씩 웃으며, 사시나무처럼 부들부들 떠는 김도엽 이사를 바라봤다.

“증거 있어?”

- 물론 있지. 김태곤 이사랑 통화 내용 녹음한 거 있어.

이제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브론드라는 회사는 김선녀 여사의 돈으로 키조개와 쭈꾸미를 사들였고, 장어를 매입하는 과정에서 차액을 남기기 위해 중국산을 국내산으로 둔갑해 들여온 것이다. 바지대표까지 세워 가면서.

내가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자, 김태곤 이사는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 했다.

하지만.

“스톱!”

뒤늦게 상황을 이해한 최지섭이 재빨리 회의실의 문을 막아섰다.

나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김태곤 이사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요. 이제 올 시간 다 됐으니까.”

그때, 밖에서 들리는 남자들의 허스키한 목소리.

“모두 손 머리! 다들 일어나서 벽 쪽으로 붙습니다!”

“벽으로 붙어요!”

“거기! 빨리 움직여요! 빨리!”

“책상에서 쏜 떼세요!”

사무실로 들이닥친 경찰들이다.

30분 전, 정진택 차장에게 신고하라고 했고, 그는 평소 잘 알던 검사 친구에게 바로 전화를 걸겠다고 했다.

이렇게 빨리 경찰이 들이닥친 것을 보면,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나 보다.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문 김태곤 이사의 가까이 다가가 씩 웃으며 말했다.

“먹는 거로 장난치면 다쳐요.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