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173화>
174. 그럼 나설 명분은 있네요
보름 후.
“와…….”
모니터를 보고 있던 김태하 차장이 입을 벌린 채, 탄식을 뱉어 냈다.
나는 조심스럽게 뒤로 가, 그의 어깨 사이로 고개를 밀어 넣었다.
“왜?”
“뭐……. 뭐야! 갑자기!”
내 목소리에 김태하 차장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가 꽉 쥐고 있던 마우스에 손을 올리고 모니터 안의 화면을 확인했다.
“아마존 매출 보는구나?”
“놀랐잖아! 그나저나 이번이 최고 찍은 거지? 두 시간 만에 3만 개 넘게 팔렸잖아.”
“응.”
“해진에서 고래로 바꾼 게 오히려 약이 됐구나. 해진이랑 바론 놈들 지금쯤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을 거야. 그놈들 얼굴을 좀 봐야 하는데. 하하.”
“그러게 나도 갑자기 궁금해졌네.”
“그럼 내가 알아볼까?”
“누구 아는 사람 있어?”
“응. 있지 그럼.”
김태하 차장은 의자를 뒤로 젖히고, 책상 위의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상민아, 잘 지냈어?”
그렇게 한참 동안 통화를 한 김태하 차장은 씩 웃어 보였다.
“전에 우리 팀에 있던 문상민. 기억 안 나지? 그 친구, 해진에 있거든.”
가공식품 팀에서 제조사의 BM으로 이직했다는 직원 얘기는 들었는데.
잘 기억은 안 났다.
“그래? 뭐라는데?”
“대표가 기획전 열리고 바로 히스테리 부려서, BM들 전부 밖으로 피난 나갔대.”
아마존 기획전의 상품 옆에는 실시간으로 판매 개수가 보인다.
그리고 해진식품은 아마 새로고침을 할 때마다 오르는 판매 수치를 보면서 후회했을 것이다.
나는 씩 웃으며, 김태하 차장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바론이랑은 잘 준비하고 있대?”
“아니. 그거도 문제가 좀 있나 봐. 얘가 그런 애가 아닌데, 계속 넋두리를 하네.”
“무슨 문제?”
“계약하고 일주일 만에 납품가를 낮추라고 요구했다네.”
오픈 프로모션 단가를 낮추려는 것이구나.
바론은 오래된 식품 제조회사다.
그리고 처음으로 마트 판매용 제품들만 중량을 줄인 잔머리를 팽팽 돌렸던 회사이기도 하다. 한때, 유통사의 횡포라며 법정까지 갔던 그들인데, 그 짓을 그대로 하고 있구나.
“그래?”
“응. 그래서 더 배가 아픈 거지. 프랜차이즈 강자인 고래가 우리 덕분에 레토르트 시장에 진입했고, 자기네 점유율 줄어들 것이 뻔히 보이니까. 그나저나 그 짧은 순간에 고래는 어떻게 떠올린 거야?”
“전부터 만나 보고 싶었어.”
“하긴 네 머릿속에는 일 빼면 없지.”
“일단 이번엔 보도자료 좀 많이 태워야겠다.”
“본보기를 보여 주자, 이거지?”
“그래. 이런 소문이 퍼지면 바론도 추가 계약하기 힘들 거고, 제조사들도 이탈하기 힘들어질 거야.”
“그래. 당연히 그래야지.”
나는 김태하의 등을 쓰다듬고 내 방으로 향했다.
* * *
일주일 후.
디몰의 배너가 검색 포털 메인에 걸렸다.
배너에는 안전한 먹거리, 믿을 수 있는 바론이 직접 운영한다는 말이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
나는 배너를 클릭해 개편된 디몰의 페이지로 접속했다.
보기 좋게 진열된 상품들.
사용자를 고려한 편리한 UI(User Interface).
모바일에서의 가독성을 높인 디자인.
전체적으로 초록의 이미지를 한 디몰은 이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거의 모든 시스템을 교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넋을 놓고 사이트를 둘러봤다.
그렇게 한 페이지, 한 페이지 확인하며 오픈 이벤트가 진행 중인 상품을 확인했다.
쭈꾸미와 키조개라…….
단가도 괜찮고 사진으로 보기에는 이미지도 좋아 보였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회원가입을 하고 기획 판매 중인 제품을 구매했다.
그때.
- 이사님. 손님 오셨습니다.
인터폰에서 울린 이예나의 목소리에 재빨리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네.”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손님을 맞이했다.
“이사님! 오랜만입니다! 하하하.”
하정민 실장.
장어, 갈치, 홍어, 쭈꾸미, 키조개 등의 해산물을 주력으로 하는 벤더다. 명함은 실장으로 파고 다니지만, 실제로는 직원이 10명 정도 되는 작은 유통사, 이펙트푸드의 대표이기도 하다.
“갑자기 무슨 일이세요?”
“방이 참 근사하네요.”
그는 내 질문에 답하지 않고 방을 둘러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테이블 앞의 의자를 꺼내 털썩 앉았다.
“밖이 많이 따뜻해졌네요. 이번 여름은 꽤 덥겠어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는 하정민 실장.
평소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는 과묵한 사람인데.
오늘은 뭔가 이상하다.
나는 씩 웃고 고개를 끄덕인 후, 구석으로 가서 차를 준비했다.
“비서는 어쩌고, 이사님이 직접 타 주세요?”
“이런 건 제가 해야죠. 녹차 괜찮죠?”
“네. 그러면 이사님이 타 주시는 녹차 한번 얻어 먹어 볼까요? 기왕이면 시원하게 얼음 팍팍 넣어서 부탁드립니다. 하하하.”
차를 가지고 앞으로 가자, 그는 몸을 구부려 재빨리 찻잔을 받았다.
“후……. 별일 없으시죠?”
하정민 실장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또 안부를 물었다. 나는 미간을 좁히며 마시던 차를 내려놓았다.
“무슨 일 있으시죠? 왜 그러세요?”
“아닙니다. 그냥 얼굴이 보고 싶어서 온 겁니다.”
“그래도 이상한데요?”
“정말 아닙니다. 아니에요! 하하하.”
하정민 실장은 두 손으로 손사래를 치며, 크게 웃었다.
그렇게 그는 한참 동안 떠들었다.
정치 얘기, 경제 얘기, 심지어 관심도 없는 축구 얘기까지.
나는 그의 말에 대응하며, 본론이 나오길 기다렸다. 하지만 음료를 다 마신 그는 더는 할 말이 없었는지, 자리에서 슬며시 일어나며 손을 내밀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이렇게 간다고?
함께 했던 테이블에서 들려 왔던 기억도 일과 관련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무슨 일인데 이렇게 속마음을 숨기는 걸까?
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저 오늘 시간 많습니다. 할 얘기 있으시면 더 하셔도 됩니다.”
“아니에요. 그냥 갑자기 이사님 얼굴이 보고 싶어서 온 겁니다.”
“이펙트푸드 직원들은 전부 다 잘 지내죠? 거기 이영선 팀장님도 뵌 지 오래됐네요.”
“네. 모두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럼 전 약속이 있어서…….”
그가 사무실을 나가고, 테이블 위에 놓인 빨간 손수건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에게 돌려주기 위해, 손수건을 집어 들었다.
그 순간 들려오는 기억.
<브론드에서 쭈꾸미를 다 계약했다고? 돈도 없는 놈들인데?>
<키조개는 또 왜? 지금이 철인데 이걸 또 뺏겨?>
<브론드 놈들은 도대체 어디서 돈을 긁어 온 거야?>
지금이 제철인 쭈꾸미와 키조개를 다른 경쟁사에 모두 뺏겼나?
브론드라면 들어 본 적이 없는 업체인데…….
유통하는 벤더들은 자본이 많지 않다.
특히 식품을 주력으로 하는 곳은 더욱 그렇다.
제품의 마진이 크지 않고, 많은 수량을 다뤄야 하기에 일도 많다. 또한, 자칫 실수라도 하면 손해가 커, 잠시라도 긴장을 풀면 안 된다.
나는 손수건을 움켜쥐고 밖으로 걸어나갔다.
“방금 실장님 어디 가셨나?”
“정진택 차장님이랑 회의실로 들어가셨습니다.”
내 질문에, 이예나가 답을 했다.
나는 그녀가 가리키는 회의실로 걸어가 노크를 하고 문을 열었다.
“아! 이사님!”
하정민 실장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내 손에 쥐어져 있는 손수건을 보고 머리를 긁적이며 걸어왔다.
“제가 요새 정신이 이래요. 하핫.”
그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다행이네요. 아직 안 가셔서.”
“네. 이거 딸아이가 선물해 준 건데……. 고맙습니다.”
“저 이사님!”
자리에 앉아 있던 정진택 차장이 나를 불렀다.
밖으로 나가려던 내가 고개를 돌리자,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브론드라는 신생 업체가 이번 해산물을 다 가져갔다고 하네요.”
“…….”
“제가 볼 때는 바론 짓입니다. 바론이 얼마 전에 일부 벤더들에게 크게 투자를 했다고 들었는데, 브론드라는 놈들도 그들 중 하나일 겁니다.”
“흠…….”
“최소한 선은 넘지 말아야죠. 이펙트푸드는 딱 지금 한 철만 보고 사업을 하는 거 아시잖아요.”
그 뒤로도 정진택 차장의 입에서 욕설이 섞인 말들이 쏟아졌다.
그리고 이를 가만 서서 듣고 있던 하정민 실장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절레절레 저었다.
“제가 못나서 그렇죠. 좀 더 일찍 움직였어야 하는데…….”
“실장님! 돈 지랄 하는 놈들을 어떻게 이깁니까?”
정진택 차장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하정민 실장은 긴 한숨을 내쉬며 애써 괜찮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제라도 빨리 여름 아이템 찾아 봐야죠.”
“쭈꾸미랑 키조개는 10년 넘게 거래하던 곳이잖아요! 그런 곳을 뺏겨 놓고선 그런 말이 나옵니까?”
“…….”
“어휴. 진짜 내가 답답해서……. 브론드인지 뭔지는 찾아가 보셨어요? 나 같으면 당장 뒤집어엎었을 겁니다!”
가슴을 치며, 울분을 토하는 정진택 차장.
마치 자기 일처럼 화를 냈다.
나는 둘을 번갈아 보며 천천히 입을 뗐다.
“차장님!”
“네. 이사님!”
“우리는 문제없나요?”
“네. 쭈꾸미랑 키조개는 작년에 미리 계약해 놔서 문제없을 겁니다. 근데, 다음 달에 장어가 좀 문제가 될 거 같아요. 이번에 국내산이 좀 적을 거라고 해서 이펙트에 미리 수입을 좀 요청했는데…….”
“그래요. 그럼 나설 명분은 있네요.”
“네?”
나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 하정민 실장에게 물었다.
“실장님. 브론드라는 업체 전화번호 좀 주실 수 있으세요?”
“아……. 네네.”
하정민 실장은 테이블에 올려 둔 수첩에 번호를 적고, 한 장을 찢어 나에게 건넸다.
“어쩌시려고…….”
“글쎄요.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한 번은 만나 봐야 할 것 같아서요.”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이사님.”
“그리고 실장님. 이거 섭섭한데요?”
“네?”
“저한테는 그런 말 일절 안 하시고 축구, 정치 얘기만 하시다가 진택 차장님께만 얘기하시고, 저랑 더 친했던 거 아니었습니까?”
“아……. 그게.”
나는 씩 웃고, 그의 팔에 손을 얹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잘될 겁니다.”
“네…….”
“제가 그렇게 할 거니깐, 어깨 펴세요.”
그렇게 하정민 실장을 보내고, 나는 곧바로 신선식품 팀의 자리로 갔다. 그리고 팀의 막내인 최지섭에게 전화번호를 주며 말했다.
“지섭 씨. 여기 전화해서 갈치 좀 받아와.”
“여기가 어딘가요?”
“브론드라는 벤더인데, 다음 달 마프에서 프로모션 진행한다고, 단가는 최대한 낮춰야 한다고 해 줘.”
“알겠습니다.”
나는 최지섭의 어깨를 툭 치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20여 분이 지나.
“저 이사님…….”
최지섭이 조심스럽게 내 방으로 들어왔다.
“뭐래?”
“수입이 아니라 국내산 물량을 가져가라고 하네요. 남는다고 하던데…….”
“국내산?”
정진택 차장은 분명, 이번 시즌 국내산 물량이 부족할 것이라 했다.
그의 예상이 틀릴 리가 없는데…….
그렇다면 설마?
“네. 국내산이요.”
“단가는?”
“킬로당 6,200원이요. 제가 관리자에서 작년 데이터 보니까 이펙트푸드에서 7,300원에 받았더라고요.”
“단가도 싸구나…….”
“네. 여기랑 계약하시려고요?”
최지섭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왜 무슨 문제 있어?”
“여기 담당자가 제가 아는 사람이라서요.”
“그래?”
“네. 그리피스에 있던 김도엽 과장인데요. 여기로 이직했나 봐요.”
“그리피스?”
“네. 그리피스요.”
그리피스는 직원 100명이 넘는 큰 벤더다.
납품 수량을 제대로 맞추지 못해서 우리와 트러블이 있었고, 현재는 거래하고 있지 않은 업체다.
내가 잠시 망설이자, 최지섭은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리피스. 이사님도 아시잖아요. 거기 정말 책임감 없이 일한다는 거요.”
“그래. 일단 알았어.”
내 답에, 최지섭은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바론의 짓이 아닌가?
그들과 그리피스가 거래한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는데…….
조금 더 알아볼 필요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