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172화>
173. 처음부터 눈치채고 있었습니다
대전 고래 에프앤비 본사.
1층, 300평 규모의 대형 매장에는 한명의 손님도 없었다.
오픈 키친과 같이 나뉜 칸막이 안에서 조리하는 사람들만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지이잉. 지이잉.
그들을 바라보던 나는 주머니에서 울리는 휴대전화의 소리에 등을 돌렸다. 그리고 휴대전화를 꺼내 김명진 부장이 보내 준 장문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때.
“마켓 프레시 원지훈 이사님이시죠?”
30대 초반으로 느껴지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재빨리 등을 돌려, 남자를 바라봤다.
유난히 새하얀 피부에 퉁퉁한 몸매.
이마가 훤히 보이도록 머리를 넘기고 얇은 테의 안경을 낀 그는 밝은 표정을 하고 다가왔다.
“네, 원지훈입니다.”
내가 손을 내밀자, 그는 내 손을 꽉 움켜쥐며 위아래로 힘차게 힘들었다.
커다란 화상 자국이 있는 손등.
맞잡은 손바닥에서는 딱딱한 굳은살이 그대로 느껴졌다.
“고래 에프앤비 나상호입니다. 오신다는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대전으로 내려왔습니다.”
“대전에 안 계셨나요?”
“네. 홍대 매장에 나가 있었습니다. 요새 좀 바빠져서요. 하핫.”
“직접 점포를 운영하시는 겁니까?”
“네. 장사꾼이니까요. 아직도 제가 직접 조리를 하고 있습니다.”
300개가 넘는 가맹점을 가진 프랜차이즈 대표가 직접 조리를 한다라…….
젊은 기업인들을 많이 만나 왔는데, 이런 사람은 오랜만이다.
“그러시군요.”
“올라가실까요?”
나상호 대표는 내 등에 손을 얹고, 계단을 향해 걸어갔다.
나는 주변에서 분주하게 조리를 하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1층은 손님들 쓰는 점포 아닌가요?”
“아닙니다. 여긴 가맹점주님들이 자유롭게 쓰실 수 있는 공간입니다. 매장이랑 똑같이 구성하면 좀 더 집중하시는 것 같아서 이렇게 인테리어를 했습니다.”
“창업을 준비하시는 분들이신가 보죠?”
“아니요. 전부 현재 점포를 운영하고 계신 점주님들이십니다.”
현재 시각은 오후 5시.
자신의 가게가 한창 바쁠 시간인데 이렇게 많이 모여 있다니…….
나는 계단을 오르며, 궁금한 마음에 질문을 이었다.
“그럼 지금 매장은…….”
“문을 닫았습니다.”
“그래요?”
“네. 저희 고래 에프앤비에는 암행어사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불시에 본사 직원들이 가맹점을 돌아서 맛이 변질했다고 느껴지면, 문을 닫고 이곳에서 다시 조리를 배우시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건 월권 행위다.
하루라도 문을 닫으면 가맹점들의 손실이 크기에 아무리 본사라고 해도 이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
“그게 가능합니까?”
“네, 가능합니다. 저희가 평균 일 매출을 100% 지원해 드리니까요.”
“그래요?”
“그래야 마음 편하게 연습을 하실 수 있겠죠.”
나상호 대표는 미소를 지어 보이고, 2층 회의실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나에게 문에서 먼 쪽에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내가 자리에 앉자, 그는 직접 밖으로 나가 음료를 가져왔다.
“김명진 부장님이라는 분께 대충 설명 들었습니다. 미국 아마존 기획전에 떡볶이를 준비하신다고요?”
“네. 맞습니다.”
“제가 알기론 마켓 프레시에 해진식품이 있는데, 왜 저희를…….”
김명진 부장에게 약속을 잡아 달라고 했는데, 세부적인 것들은 말하지 않았나 보다.
나는 씩 웃으며 답을 했다.
“해진과는 계약이 끝났습니다.”
“아……. 그렇군요. 그럼, 기획전 일정을 여쭤 봐도 될까요?”
“다음 달 3일부터 18일까지 총 보름간 진행됩니다.”
나상호 대표는 테이블 위의 달력을 넘겨 보며 날짜를 확인했다.
“보름 남았군요.”
“네. 그래서 고래 에프앤비에 제안을 드리러 온 겁니다. 고래는 미국 식품의약품청의 허가까지 마쳤잖아요.”
“하긴 그렇죠. 그쪽에 식품 들어가면 석 달은 기본이니까……. 그런데 어쩌죠?”
나상호 대표는 눈썹을 올리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저희는 대량 납품용 포장만 준비되어 있고, 일반 소비재로 포장이 전혀 되어 있지 않습니다. 공장을 짓거나 빌리는 데 시간이 좀 걸릴 수 있습니다.”
이건 이미 예상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환하게 웃었다.
“개별 포장은 저희 쪽에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혹시 마켓 프레시의 PB로 들어가는 겁니까?”
“아니요. 저희 PB는 아닙니다. 고래 에프앤비에서 주신 디자인 시안으로 인쇄를 할 겁니다.”
“그러면 너무 감사하죠.”
나상호 대표는 음료를 마시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끝낼 생각이 없다.
단순히 이번 기획전만 메우려 했다면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뭔가요?”
“소매 제품들은 저희가 독점으로 판매할 수 있도록 해 주십쇼.”
“독점이라……. 역시 쉽게 내주진 않으시네요.”
“아무래도 그래야겠죠.”
“만약 저희가 거절하면, 마켓 프레시는 대안이 있습니까?”
나상호 대표가 날카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사실, 대안은 없다.
고래가 거절하면, 남은 시간 동안 미국의 승인을 받은 업체를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는 법.
나는 씩 웃으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러면 이번 프로모션의 메인을 교체해야겠죠.”
“그게 가능합니까? 이미 아마존 회원들에게 다음 달에 K푸드 떡볶이를 한다고 예고까지 하셨을 텐데요?!”
조금 전과 달리 급하게 되묻는 나상호 대표.
지금의 태도는 실수다.
아마존의 K푸드 기획전을 보고 있었다는 것을 나에게 들켰으니까.
이러면 협상의 우선권을 내가 가져갈 수 있다. 그리고 함께 마주한 이 큰 회의 테이블에서 들리는 기억은 나를 확신하게 하였다.
<다른 기획전? 아니야. 아닐 거야.>
<아마존에 노출되면 LA와 시카고 매장을 계속 유지할 수 있어.>
<잡아야 한다. 무슨 수를 써서든 잡아야 한다.>
“가능합니다. 저희는 국내 모든 식품을 취급하는 커머스입니다. 아마존 기획전에 참여하고 싶은 제조사는 많습니다. 저희가 새로운 메인을 찾는다고 하면 좋은 기회라며 달려들 겁니다.”
“…….”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LA와 시카고 직영점 매출도 좀 위태위태해 보이던데요?”
“그건…….”
김명진 부장이 보내 준 장문의 문자 메시지로 LA와 시카고의 매출이 점점 떨어지고 있는 것을 미리 확인했다.
“그 정도는 준비하고 움직여야 MD죠.”
“흠…….”
“미국에서 고래가 통하지 않았던 것은 마케팅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아마존 기획전에는 특별히 전문 BJ들 전부가 움직이도록 할 생각입니다.”
이정우 이사의 회사에 소속된 먹방 전문 BJ들.
이는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탐나는 광고 영역이다.
나상호 대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흠……. 좋습니다. 대신 한 가지만 약속해 주십시오. 오프라인 마트와 편의점은 저희가 넣을 수 있도록 해 주십쇼.”
“네, 거기까지 욕심낼 수는 없죠.”
“고맙습니다.”
나는 남은 음료를 마시고, 씩 웃었다.
그동안 레토르트 떡볶이 시장의 50%를 차지했던 해진식품.
그들은 이번 선택을 후회할 것이다.
덕분에 제품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는 고래 에프앤비가 새롭게 레토르트의 경쟁자로 나섰으니까.
나상호 대표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투박하고 거친, 매운 고춧가루 냄새가 풀풀 나는 손을.
“이사님. 오신 김에 저희 신제품 맛 좀 보고 가세요.”
“네. 안 그래도 배고팠습니다.”
“이번에 기름, 짜장, 카레, 까르보나라를 추가했는데요. 보시고 냉정한 평가를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많이요? 근데 괜찮겠어요?”
“네?”
“조금 전에 냉정하라고 하셨잖아요. 저 무지 냉정한 사람입니다.”
“하하하.”
나상호 대표는 크게 웃으며, 밖으로 나가자는 손짓을 했다.
자신이 만든 식품에 열정이 있는 사람.
제품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는 사람.
소비자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을 찾아다녔고, 해진식품 덕분에 오늘 만났다.
고맙다고 해야 할까?
나는 피식 웃으며 그의 뒤를 따라 제품 연구실 안으로 들어갔다.
* * *
오후 8시.
뭐 이렇게 떡볶이 종류가 많은지…….
시식하는 것만 두 시간 이상 걸렸다.
나는 주차장까지 배웅을 나온 나상호 대표에게 고개를 숙이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곧바로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 꽂아 전화를 걸었다.
“태하야, 퇴근했어?”
- 아니. 이제 회사로 들어가는 중.
“석종 식품은 어떻게 됐어?”
- 결국, 계약 파기했어. 이 새끼들 바론에 넘어갔더라고.
“자기 입으로 그렇게 말해?”
- 아니. 내 앞에서 절대 그렇게 말 못하지. 대충 눈치 보니까 그런 거 같아서. 그래도 다행인 게, 그레이스가 이번 달에 공장을 늘려서 일단 진미채는 문제 없을 거야.
해진식품의 메인 상품은 진미채와 건어물류.
그레이스는 빠르게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는 신생기업으로 믿을 만하다.
발 빠르게 빠져나간 상품을 메우다니.
역시 김태하였다.
“흠……. 그래. 잘했네. 이제 시작이구나.”
- 아무래도 좀 바빠지겠지?
“아마도.”
- 알았어. 조심히 올라오고. 내일 회사에서 보자.
“그래.”
나는 전화를 끊고, 곧바로 김명진 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 어떻게 되셨어요?
다급한 김명진 부장의 목소리에 순간 장난기가 발동했다.
“여긴 안 되겠네.”
- 왜요? 개별 포장 때문이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레토르트 파우치 공장은 확보해 놨습니다. 일주일 안에 충분히 다 찍어 낼 수 있어요.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미리 준비해 놨구나.
나는 씩 웃으며, 액셀을 세게 밟았다.
“아니. 내가 온라인 독점 요구를 했거든.”
- ……바론이 하는 짓 그대로 따라 하시는 겁니까?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받은 만큼 돌려줘야지.”
-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냥 이번엔 좀 져 주면 안 돼요? 이번 기획전 어쩌시려고요?
“그냥 이번엔 떡볶이 포기하고 돈가스 가자. 왕돈까스. 명진 부장도 전에 먹힐 것 같다고 했잖아.”
-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세요. 떡볶이 한다고 예고한 게, 여기저기 SNS에 다 퍼져 있잖아요!
“그랬나?”
- 네. 이사님이 힘드시면 제가 가서 무릎 꿇고라도 받아오겠습니다. 지금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이어폰에서는 어금니를 꽉 깨문 김명진 목소리가 여과 없이 들려왔다.
평소 이런 말을 하는 친구가 아닌데…….
이제 장난을 그만해야겠구나.
“명진 부장. 파우치 공장은 확실히 체크한 거지?”
- 네. 내일부터 찍어야 한다고 신신당부해놨습니다.
“잘했어.”
- 네?
“내일 아침 일찍, 고래에서 포장재 디자인 넘어올 거야. 디자인은 밤새워서라도 해 준다니까.”
- 그럼 설득하신 겁니까?
“당연하지, 오전에 디자인 확인하고 이상 없으면 바로 진행해.”
- 온라인 독점도 받으신 거고요?
“당연하지. 우리도 뭔가 얻어가야 하잖아.”
- 고생하셨습니다.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이후는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다 알아서 마무리할 테니까.
“그래. 고마워.”
- 고맙긴 뭘요. 그리고 연기는 앞으로 많이 공부하셔야겠어요.
“어색했어?”
- 네. 처음부터 눈치채고 있었습니다. 하하하
이어폰에서 김명진 부장이 큰 웃음소리가 쩌렁쩌렁 들려왔다.
속아서 어금니까지 꽉 깨물었으면서 허세는…….
나는 피식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