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171화>
172. 이제 핫딜만 남은 건가?
* * *
한 달 후.
우린 최선을 다했다.
새로 입사한 경력직 직원들과 기존의 직원들이 어울려 하나의 목표를 바라봤다.
대한민국 최고의 커머스.
이제 이는 나를 포함한 모든 직원의 목표였다.
최구열 이사는 아마존과의 기획전을 연이어 성공시켜, 한때 레토르트와 냉동식품이 품절되기도 했다. 덩달아 미국 현지의 한인 식당도 주목을 받았으며, 미국의 상징인 뉴욕 타임스퀘어에도 번듯한 한식집이 생겨날 정도였다.
미국에서의 성공.
이는 우리에게 더 큰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유화성 이사는 정부부처와 손을 잡고 K푸드 수출에 집중했고, 첫 진출지인 독일에서 가능성을 확인했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 덕분에 우리 MD 사업부는 눈코 뜰 새가 없었다.
미국과 유럽의 K푸드 수출을 위해 새로운 상품을 소싱하고 기획했으며, 가끔은 그들의 입맛에 맞는 신규 제품을 개발하기까지 했다.
“1분기 매출은 1.5조를 넘었고, 영업 이익은 3천억 이상입니다. 2분기에 부산과 광주에 물류 센터가 완공되면 물류비 감소로 영업 이익을 증가시킬 수 있을 것이라 예상합니다.”
1분기 실적을 보고하는 주주총회.
단상 위의 김지영 대표는 환하게 웃으며 준비한 자료를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자리에 앉은 주주들은 우리가 준비한 문서들을 넘겨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2분기에는 유럽과 미국의 시장에 집중할 예정이며, 내수 시장에서도 지속적인 투자를 이어 갈 예정입니다. 이상으로 BO 커머스 1분기 영업 보고를 마칩니다.”
길었던 김지영 대표의 보고가 끝나자, 주주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우레와 같은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이제 핫딜만 남은 건가?”
내 옆에 있던 김재열 이사는 히죽거리며 말을 걸어왔다.
핫딜의 분기 매출은 2조 이상.
국내 온라인 판매만으로 그런 수치를 만들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울 정도다.
하지만 문제는 핫딜이 아니다.
그들도 기존의 고급 인력이 빠져나가면서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었고, 이는 모두 새롭게 개편을 준비하는 바론 있었다. 그 이면에는 새롭게 개편을 준비하는 바론이 있었다.
“네. 표면적으로는 그렇죠.”
“표면적?”
“이번 주중으로 디몰에 식품 카테고리가 추가될 거라고 합니다.”
“하……. 바론. 하긴 그놈들이 있었구나.”
김재열 이사는 씩 웃으며,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딸기 대전 소문은 들었다. 완전 발라 버렸다면서?”
“누구한테요?”
“얼마 전에 은지 만나서 밥 한 번 사 줬었거든.”
이은지는 나와 함께 원스몰에서 마켓 프레시로 넘어온 MD다. 처음에는 적응을 못하는 것 같더니, 이제 대리까지 달고 꽤 듬직해졌다.
“잘하셨네요.”
“수고했어. 조만간 내가 크게 한잔 살게.”
“네. 기대할게요.”
김재열 이사는 내 등을 쓰다듬고 천천히 등을 돌렸다.
그 사이, 뒷줄에 있던 김태하가 내 어깨 사이로 고개를 넣으며 말했다.
“지훈아. 배고프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 * *
“원지훈 씨죠? 마켓 프레시……. 원지훈 이사님 맞죠?”
처음 찾아온 식당의 주인이 나를 알아봤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내 손을 움켜잡으며 환하게 웃었다.
“방송에서보다 훨씬 잘생기셨네.”
“아닙니다.”
계산대에서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한 남자가 내 앞에 멈춰 섰다.
이쑤시개를 이에 꽂고 쩝쩝대던 그는 곧바로 내게 손을 내밀며 소리쳤다.
“원 이사님!”
참푸드의 오덕훈 이사.
여우같은 성격으로 자신의 속내를 잘 비치지 않기로 유명하다.
“아. 오 이사님.”
“주총 끝나고 식사하러 오셨나 보죠?”
“네.”
“김태하 차장님도 계시네요.”
“네. 오 이사님. 잘 지내셨죠?”
“덕분에 아주 따뜻하게 잘 지냈습니다.”
그는 나와 김태하 차장과 차례로 인사를 하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고개를 내 앞으로 살짝 기울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주에 디몰 식품 카테고리 열리는 건 아시죠?”
“네. 알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바론에서 왔었어요. 아니지. 디몰이라고 해야 하나? 하여간 거기 MD가 이번 주 오픈 프로모션에 저희 닭가슴살 소시지를 납품해 달라고 하더군요.”
바론의 MD들이 오픈상품을 준비한다는 것은 이미 많이 들어왔다.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계산서 주세요. 오늘 먼 길 오셨으니까 밥은 제가 사 드릴게요.”
나는 재빨리 오덕훈 이사가 들고 있는 계산서를 가로챘다.
그때 들려오는 그의 기억.
<독점 계약만 받는다고? 아주 마프 죽이기에 혈안이 되어 있구나.>
<6개월간 수수료가 없다라……. 많이들 넘어가겠네.>
바론의 계약 조건인가?
이런 조건으로 영업하고 있다는 것은 오늘 처음 들었다.
“아닙니다. 제가 사 드려야죠.”
오덕훈 이사는 계산서를 재빨리 가져갔다. 그리고 어색한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마프는 수수료 인하 같은 거 없나요? 오늘 주총에서 들어 보니까 영업 이익도 꽤 높던데. 요새 바론, 상당히 공격적인 건 아시죠?”
앞으로 이런 요구를 많이 받겠구나.
나는 씩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왜요? 바론이랑 독점 계약이라도 하시려고요?”
“그거야 뭐……. 모르죠.”
“그럼 그렇게 하세요. 대신 저희는 책임지지 않습니다.”
내 단호한 표정에, 오덕훈 이사는 허겁지겁 손사래를 치며 미간을 좁혔다.
“이사님. 무슨 개그를 다큐로 받으십니까? 농담입니다. 농담.”
“…….”
“우리 참푸드도 BO 커머스 주주인 거 모르세요? 우리가 마프를 두고 어디를 갑니까? 하하하. 그나저나 다음 프랑스 기획전에는 우리 제품도 오픈된다면서요? 저희 대표님 기대가 참 크십니다. 이번 기회에 유럽 진출을 하자고…….”
오덕훈 이사는 혹시나 하고 던져 본 말을 재빨리 주워 담았다.
이번엔 이렇게 끝났지만, 혹시나 바론의 디몰이 성공적으로 오픈하면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다.
나는 그의 표정을 보고,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저희도 기대가 큽니다.”
나와 김태하 차장은 그와 인사를 마치고,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음식을 주문하자, 김태하 차장은 벌컥벌컥 물을 마셨다. 그리고 짧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뗐다.
“요새 저런 식으로 찔러 보는 애들 많아.”
“그렇겠지.”
“뭐 들은 거 있어?”
“독점 계약 시 6개월간 수수료를 안 받겠다고 제안하는 것 같아.”
“뭐? 6개월간 수수료 없이?”
“응.”
“새끼들 아주 같이 죽자 이건가? 어떻게 할 거야?”
과도한 경쟁은 피해를 만든다.
수수료가 사라지면서 서비스의 질이 떨어질 것이고, 이는 고스란히 제품을 구매하는 회원들에게 갈 것이다.
“뭘 어떻게 해? 그렇다고 우리도 수수료 내려 줄 수는 없잖아.”
“혹시나 유럽이랑 미국에 나가는 제품들에도 이상이 생길까 봐 그러지. 왜 하필 지금이냐. 휴…….”
정말 왜 하필 이 시점일까?
미국과 유럽에 진출하는 이 시점에 중요한 제품이 빠지면 우리도 타격이 크다.
김태하 차장은 이를 걱정하는 것이고,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우린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그때 나와 김태하 차장에게 동시에 전화가 걸려 왔다.
- 이사님. 큰일 났습니다.
다급한 김명진 부장의 목소리.
“무슨 일 있어?”
- 해진식품에서 제품 납품을 중단한다고 합니다.
해진식품이면 떡볶이와 어묵, 튀김 등을 제조하는 회사.
다음 달에 진행될 아마존 기획전의 메인 상품을 가진 회사다.
“해진에서?”
- 네. 일단은 제가 넘어가고 있습니다.
“알았어. 나도 그쪽으로 이동할게.”
- 괜찮으시겠어요?
“시간이 없잖아. 해진 말고 한 달 안에 그만한 물량 넣어 줄 업체가 있어?”
-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김태하 차장을 바라봤다.
통화를 마친 그의 표정도 밝지는 못했다.
“지훈아. 나 사무실에 좀 들어가 봐야겠다.”
“누군데?”
“동식 과장. 석종식품이 또 툴툴대기 시작했나 봐.”
“석종이?”
“응, 얘네 다음 달에 유럽 나가잖아. 제품 수량 맞추느라고 공장을 무리해서 돌렸나 봐.”
“바론일 수도 있어.”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여간 빨리 다녀올게.”
김태하 차장은 내 팔을 툭 치고 등을 돌렸다.
그들의 첫 번째 시도에 넘어간 제조사나 벤더는 거의 없었다.
두 번째 딸기 대전에서도 우리가 KO승을 거뒀다.
하지만 이번은 다르다.
제 살을 깎아 내며 덤비는 그들에게 제조사와 벤더들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지나가는 택시를 잡았다.
* * *
“부장님! 인제 와서 그러시면 우린 어쩌라는 겁니까?”
“…….”
“이미 아마존에서 승인까지 해 줬잖아요.”
“죄송합니다. 윗분들의 결정이라 저도 어쩔 수가 없네요.”
고개를 푹 숙인 해진식품의 이재신 부장.
그의 앞에 마주한 김명진 부장이 사정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막 회의실로 들어온 나를 본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 이사님 오셨습니까?”
이재신 부장이 고개를 숙였고, 나도 그에게 고개를 숙인 후 김명진 부장의 옆자리에 앉았다.
“어떻게 된 겁니까?”
“후……. 죄송합니다. 대표님이 갑자기 이번 기획전을 취소하자고 하셔서…….”
“대표님을 좀 뵈어야겠네요. 회사에 계시죠?”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이해진 부장은 급하게 손사래를 쳤다.
“오늘 약속이 있으셔서…….”
“언제 돌아오시나요?”
“오늘은 아마 힘들 것 같습니다. 저한테 말씀해 주시면 제가 보고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고 함께 마주한 회의 테이블에서 기억이 들려왔다.
<이런 건 맨날 나한테만 시키지?>
<어휴. 원 이사 화 좀 난 거 같은데? 하긴, 나 같아도 화가 나지.>
<마프가 우리한테 어떻게 해 줬는데. 때려치우든가 해야지. 진짜 이 짓도 못해 먹겠다.>
바론이구나.
나는 자리에 앉아 떡볶이와 튀김류를 제조하는 회사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우리와 계약한 제조사 중에는 그만한 물량을 한 달 안에 뽑아줄 업체가 없다는 것을 다시 확인했다.
만약 여러 회사의 제품이 골고루 들어간다면?
깐깐한 아마존과 미국 식약처의 검사를 다시 거쳐야 한다.
과연 기간 안에 끝낼 수 있을까?
아니. 불가능할 것이다.
“부장님. 정말 이러시는 겁니까? 게약서에 위약금 조항 들어가 있던 거 기억 안 나세요?”
김명진 부장은 반협박의 말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만큼 해진의 제품은 우리에게 절실했다.
이해진 부장은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후……. 사실은……. 수수료 때문입니다.”
“수수료요?”
“네. 아마존과 마프의 수수료를 더하면 대략 33%가 됩니다. 대표님이 그 수수료가 부당하다고…….”
이들은 물류에 들어가는 비용을 알고 있다.
그리고 생각보다 수수료가 저렴하다고 분명 계약 전에 말한 적도 있었다.
“그건 이미 계약 전에 확인하셨잖아요!”
“그야 그렇지만…….”
“해진의 대표님을 설득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27%로 새 계약서를 작성했으면 합니다. 대신 저희도 양심이 있으니, 사입이 아닌 후 정산으로 받도록 하겠습니다.”
잔뜩 미안한 표정의 이해진 부장.
수출 업무를 주로 하는 그도 이 조건이 터무니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 하나의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도박이지만, 충분히 해 볼 만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계약은 파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이후에 위약금 관련해서는 꼭 계약서대로 이행해 주시길 바랍니다. 만약 그마저도 어기면 가만 안 있겠습니다.”
“……!”
“끝으로 대표님께 전해 주십시오. 저흰 다시는 해진과 거래하지 않을 것이라고요.”
그렇게 내가 밖으로 나오자, 김명진 부장이 재빨리 따라 나왔다. 그리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 옆에 바짝 붙어 물었다.
“어떻게 하시려고요? 본보기도 좋지만, 시간이 없잖아요. 시간이…….”
“대전에 좀 넘어갔다 올게.”
“대전이요?”
“응, 고래 떡볶이 본사가 거기 있지?”
한국 내에 프랜차이즈를 운영 중인 고래 떡볶이.
전국에 300개의 지점이 넘고, 얼마 전에 LA와 시카고 등지에도 직영점을 오픈했다고 들었다.
“고래요?”
“응. 명진 부장은 사무실로 들어가서 LA와 시카고 지점의 매출 좀 뽑아 줘. 위생 검사 내용이랑 소비자 평들까지 하나도 빼지 않고.”
“알겠습니다.”
내 생각을 이해한 김명진 부장이 씩 웃으며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