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억을 듣는 회사원-169화 (169/223)

<기억을 듣는 회사원 169화>

170. 그럼 죽으시던가

이튿날.

“이사님! 이사님!”

아침 일찍 출근한 정진택 차장이 내 방으로 달려 들어왔다.

초췌한 몰골의 그는 기름기 가득한 머리를 쓸어 넘기며, 손에 들고 있는 계약서 뭉치를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바론에서 빼먹은 곳이 딱 하나 있더군요. 하동.”

“하동이요?”

“네. 하동이요. 신선 팀 애들이 구역을 나눠서 밀양, 담양, 부여, 합천, 홍성, 완주까지 싹 돌았습니다. 그러다 찾아냈죠. 하동 섬진강 유역에 작년부터 딸기 농사를 시작한 농가가 제법 있더라고요.”

“상태는 어떤가요?”

“작년에 시작해서 그런지 20~30% 정도는 판매가 불가할 거 같습니다.”

“그 정도면 훌륭하네요.”

전국의 딸기 농장을 다 돌았구나.

그것도 겨우 하루 만에…….

불과 1년 전만 해도 상태가 좋지 못한 고구마 큐브를 대량으로 수입했던 그였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다르다.

종잇장처럼 얇은 귀와 엉성했던 모습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꼼꼼하고 치밀했으며, 넉살 또한 좋아 농가의 생산자들도 그를 좋아했다.

만약, 지난 1년간 가장 많이 성장한 사람이 누구냐고 나에게 물으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정진택 차장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럼 이번 시즌은 무리 없는 건가요?”

“아니요. 그래도 조금 부족하긴 한데…….”

“흠……. 그래요. 나머진 내가 해 볼 테니까, 체크해 보고 얼마나 부족한지 전달해 줘요.”

“네. 알겠습니다.”

“근데……. 지금 올라오신 거예요?”

내 질문에, 정진택 차장은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너무 피곤해서 근처에서 자고 새벽 비행기로 왔습니다.”

“이따 봐서 사우나라도 좀 다녀와요. 팀원들도 그렇고.”

“네. 애들은 번갈아 사우나 좀 보낼게요.”

나는 주머니에 있는 법인카드를 꺼내 정진택 차장에게 건넸다.

“오늘은 일단 들어가서 쉬고, 내일 회식이라도 좀 해요.”

“저도 카드 있습니다. 그리고 제 개인 돈으로 사 주고 싶군요. 우리 팀 애들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하핫.”

내 카드를 밀어내며 씩 웃는 정진택 차장.

기분이 좋았나 보다.

나는 카드를 도로 집어넣고 환하게 웃었다.

“그럼 그렇게 해요.”

* * *

며칠 후.

정말 디몰에는 그럴싸하게 만든 이벤트 페이지가 열렸다.

말 그대로 딸기 페스티벌.

어려운 농가를 돕자며 애국심을 장려하는 뻔한 마케팅 수법과 바론에서 엄선한 제품이라는 거짓말이 적혀 있었다.

선명하고 깔끔한 페이지 디자인은 나도 딸기를 사 먹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훌륭했다.

“페이지 하나는 기가 차게 만들었네요.”

나와 함께 모니터를 보고 있던 정진택 차장이 실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그러네요. 공을 들인 티가 나네요.”

“소문대로 완벽주의자 최두영 이사답네요.”

“완벽?”

“물론 이번엔 좀 아니지만 하핫.”

우리의 입가에는 미소가 새어 나왔다.

그 이유는 이미 결과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스크롤을 천천히 밑으로 내리자 보이는 구매자의 댓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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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swww***

딸기가 달지도 않고 싱싱함도 없고 크기는 정말 콩만 하네요

★☆☆☆☆ 1

kdyu9***

배송은 늦어도 늦는다고 안내해 주시니 불만은 없어요.

상품 질이 매우 떨어지네요. 만원 더 주고 백화점에서 구매하는 게 현명한 듯합니다.

★☆☆☆☆ 1

hwa1***

딸기 페스티벌이라고 해서 기대했는데.

돈 낭비했네요!

밑에는 무르고 다 터지고, 도대체 상품 관리를 어떻게 하시는 건지?

★☆☆☆☆ 1

sang***

에라이 기대한 내가 ㅂㅅ이지.

디몰에서 무슨 딸기 어쩌고 할 때부터 알아봤다.

★☆☆☆☆ 1

difk***

배송이 무슨 7일이나 걸립니까? 내가 살다 살다 이런 건 처음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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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관이다.

후기를 쓰는 페이지를 아예 없애는 것이 좋을 정도로 말이다.

“물류 엉망, 상품 보관 엉망, 제품도 막 들여와서 엉망, 콜드체인도 엉망이고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네요. 하하하.”

구매 후기를 보던 정진택 차장이 크게 웃었다.

이는 명백히 최두영 이사의 실수다.

그는 패션, 가전 등을 전문으로 하는 MD다.

그래서 식품 쪽을 전문으로 하는 MD를 포섭하기 위해 차주영 부장과 고동수 부장을 데려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누군가.

차주영 부장의 주력은 가전으로 신선에 대해 많이 알지 못한다. 또한, 고동수 부장은 수입이 메인이고, 부하 직원의 조언을 절대 듣지 않는 이상한 뚝심이 있는 사람이다.

그 둘을 메인으로 세워 제품을 수급했으니…….

그것도 신선 식품을.

안 봐도 비디오다.

정진택 차장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고동수, 차주영은 엄청 깨지고 있겠죠?”

“아마도요. 그래도 이거 심각한데. 그냥 깨지고 끝날 일이 아닌데?”

“맞아요. 사입해 간 딸기들도 창고에서 다 썩어나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새로 들어오는 것들은 안 팔릴 테니까 또 썩겠죠. 이게 무슨 돈 지랄인지.”

그렇게 1차전은 우리가 판정승을 거뒀다.

직원들의 능력을 잘 몰랐던 최두영 이사의 실수였고, 자신의 능력을 너무 과신한 고동수, 차주영 부장의 자만이었다.

이제 2차전을 준비할 때.

이번 딸기 전쟁의 승자가 누구인지 확실히 보여 줄 차례다.

나는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다가 전화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고동수 부장님! 아……. 아니다. 본부장님.”

- 무슨 일이십니까?

뾰로통한 그의 목소리에서 심각한 상황이 그대로 전해졌다.

“식사나 하실까요?”

- 제가 왜 이사님하고 식사합니까?

“후회할 텐데…….”

- 뭘 후회한다는 말입니까?

“후회하기 싫으면 이따 점심시간에 넘어와요. 12시에 회사 근처에서 뵙죠.”

- 제가 왜 거길 갑니까?

“그럼 그냥 그렇게 계시던가. 맘대로 하세요.”

나는 길게 말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옆에서 통화 내용을 듣고 있던 정진택 차장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족한 거 채워 주시겠다는 게 이거였어요?”

“네. 바론은 이제 재고에 대한 부담이 생기기 시작할 겁니다.”

“최두영 이사가 내줄까요?”

“안 내주겠죠. 최두영 이사는 헐값에 베이커리에 넘기려 할 겁니다. 하지만 고동수 부장의 입장은 다릅니다. 어떻게든 최두영 이사까지 안 넘어가게 하려면 지금 우리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겁니다.”

“만약 수출한다면요? 고동수 부장도 미국에 아는 업체들 많잖아요.”

“그쪽에서 사입한 품종은 전부 설향이잖아요.”

설향은 당도가 높고 맛이 좋지만, 금세 무르기에 내수용으로 쓸 수밖에 없다.

이를 알고 있는 정진택 차장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흠……. 하긴 그러네요. 매향도 아니라 설향이니 수출도 어렵겠군요.”

* * *

11시 30분.

지이이잉! 지이이잉!

책상 위 휴대전화의 진동이 울렸다.

발신자는 고동수 부장.

그래도 눈치는 있는 사람이라 내 생각을 읽고 부랴부랴 달려온 것이다.

나는 휴대전화를 바라보다, 이를 무시하고 다시 모니터에 집중했다.

11시 40분.

정확히 10분 후 다시 진동이 울렸다.

나는 휴대전화 진동이 시끄러워서 매너모드로 변경하고 다시 업무에 집중했다.

11시 45분, 11시 52분, 11시 57분.

총 다섯 번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리고 12시 정각.

이번엔 통화 버튼을 누르고 천천히 입을 뗐다.

“아……. 고동수 부장, 아니 본부장님!”

- 도착했습니다. 어디로 가면 될까요?

절실함이 묻어 있는 목소리.

며칠 전 논산에서 듣던 목소리와 180도 다른 모습이었다.

“내려가겠습니다. 건너편에 김치찌갯집 기억나시죠?”

- 네. 거기 가 있겠습니다.

“미리 주문해서 좀 끓여 놔요. 아주 팔팔.”

- 아……. 네.

전화를 끊고 10분 후.

나는 천천히 김치찌갯집으로 들어갔다.

구석에 앉아 있던 고동수 부장은 나를 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리를 굽혔다. 같이 근무할 때도 잘 고개를 숙이지 않던 그였는데…….

“오셨습니까?”

“네.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아닙니다. 이사님이 부르는데 당연히 와야죠.”

마음에도 없는 말 하느라 노력하는구나.

나는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은 숟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때 들려오는 그의 기억.

<원지훈, 이 새끼 완전 신이 났구나.>

<두고 보자. 내가 죽을 때까지 오늘의 치욕을 기억하마.>

이 정도면 내가 먹을 식기에 무슨 짓을 해 놨을 수도 있겠다.

나는 피식 웃고 손을 들어 점원을 불렀다.

“여기요! 숟가락 좀 바꿔 주세요. 물컵이랑 앞 접시도요.”

내 말에 고동수 부장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기 설거지가 좀 엉망이죠?”

“아니요. 고 부장님이 독이라도 탔을까 봐 그랬습니다.”

“하하 그게 무슨…….”

말끝을 흐리는 고동수 부장.

나는 그의 표정을 살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음 주에 들어오는 물량이 얼마나 됩니까?”

“1킬로짜리 20만 상자는 들어올 겁니다.”

“어이구 진짜 무리해서 사입하셨네. 다 팔 수 있겠어요?”

“그……. 그게.”

나는 그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새로 받은 숟가락과 젓가락으로 식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한 손을 올려 그에게 빨리 먹으라는 손짓을 했다.

“식겠네. 빨리 들어요.”

“저…….”

“일 얘기는 먹고 하죠.”

애를 태우면 태울수록 조급해지는 것은 고동수 부장이다.

그리고 그 전략은 제대로 먹혔다.

그는 몇 숟가락 떠먹다가 걱정이 됐는지, 숟가락을 내려놓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 이사님.”

“왜요? 맛없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죄송했습니다. 제가 너무 경솔했습니다.”

고개를 푹 숙이는 고동수 부장.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티슈로 입을 닦았다.

“10만 상자만 받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고동수 부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개를 연신 숙였다.

“킬로에 1,200원. 그 이상은 절대 불가입니다.”

현재 설향 딸기의 매입 평균가는 킬로당 2,200원.

그 절반을 부른 것이다.

내 말에, 고동수 부장은 입을 떡하니 벌리고 부랴부랴 내 손을 잡았다.

“이사님. 살려 주세요. 1,200원이면 전 죽습니다.”

간절한 그의 표정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충분히 이해가 간다.

이직하고 처음 맡은 프로젝트이기에 더더욱 중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미안하지만, 이번엔 완벽한 KO승을 거둬야겠다.

“그럼 죽으시던가.”

“이사님!”

“베이커리에 넘기면 킬로당 천 원도 못 받을 겁니다. 알아서 하세요.”

“…….”

“아 참, 늦으면 저희도 못 받아 줍니다. 알죠? 설향은 오래 보관할 수 없다는 거. 빨리 결정하셔야 할 겁니다.”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멍한 표정의 고동수 부장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무심한 표정으로 식당의 밖으로 나가, 속으로 수를 셌다.

하나, 둘, 셋, 넷…….

“저……. 이사님!”

식당에서 후다닥 달려 나온 고동수 부장.

역시 열을 넘지 못하는구나.

입가에 미소를 지우고,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최대한 차갑고 냉정한 표정으로.

“네?”

“조금만 더 부탁합니다. 옛정이 있지 그래도……. 1,500원 정도까지는 어떻게 안 될까요?”

“후……. 옛정이라. 좋아요. 1,300원. 이거 진짜 부장님 생각해서 제안 드리는 겁니다. 아시잖아요. 저희 딸기 더는 필요 없다는 거요.”

“…….”

“싫으면 뭐 어쩔 수 없고.”

내가 등을 돌리자, 고동수 부장은 재빨리 내 팔을 잡았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신 마프가 아닌 다른 회사로 받아 주십시오.”

최두영 이사 모르게 처리하려면 그래야겠지.

물론 이 또한 계산하고 있었다.

“네. 양지식품으로 보내 주세요. 그쪽에는 미리 말해 두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마지못해 고개를 숙이는 고동수 부장.

나는 그를 뒤로하고 유유히 사무실을 향해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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