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168화>
169. 전부 다 저희가 계약하겠습니다
논산 딸기 농장.
아직 계약을 한 곳이 없다는 소문에 신선 팀의 김기열 팀장이 지난주에 약속을 잡은 곳이다.
열린 창문 사이로 달콤한 딸기 향기가 가득 풍겨 왔다.
한적한 길가에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왔다.
오는 동안 길이 한참 막혀서 그런지 온몸이 찌뿌둥했다. 크게 기지개를 켜자, 조수석에서 내린 신선팀의 김기열 팀장이 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운전해도 되는데…….”
“괜찮아. 나 운전하는 거 좋아해.”
“그래도 다음은 제가 운전하겠습니다.”
“그래. 알았어.”
“가시죠.”
그렇게 농장의 입구로 들어가려는 순간, 좁은 길 사이로 익숙한 실루엣의 남자가 걸어 나왔다.
그의 옆으로는 농장의 주인으로 보이는 노인이 쫄래쫄래 따라오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사장님. 그럼 내년까지 우리랑 싹 계약하는 겁니다.”
“네네. 그래야죠.”
고동수 부장.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나와 눈이 마주친 그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손을 살짝 흔들었다.
“여! 원 이사…… 님…….”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여긴 무슨 일인가요?”
“보시다시피 일하러 왔죠.”
“일?”
“네. 일.”
고동수 부장은 거만한 표정으로 뒤편의 농장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여기 계약 마치고 돌아가는 길입니다.”
“…….”
“마프, 비상인가 보죠? 이사가 직접 시골 농장까지 찾아오고.”
그가 거들먹거리자,
내 옆에 있던 김기열 팀장이 참지 못하고 앞으로 한발 나섰다.
“고 부장님! 말씀이 지나치시군요.”
“오! 기열아! 오랜만! 근데 너 얼굴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고동수 부장은 양손을 올려 김기열 팀장의 볼을 움켜잡았다. 이에 김기열 팀장은 그의 손을 쳐 내며 미간을 구겼다.
“바론에서 왜 이렇게 딸기를 사들이는 겁니까? 아직 커머스도 오픈 전이잖아요.”
“뉴스 못 봤어? 우리가 디몰 인수했잖아.”
“디몰은 식품 카테고리가 아예 없잖아요!”
“있어. 딸기. 계약 끝나면 새로 만들 거야. 딸기 프리미엄관. 20~30대 여자들이 딸기라면 껌뻑 죽잖아.”
“……!”
“회원들 성향도 분석하고, 우리만의 콜드체인도 테스트하기 위해서 먼저 오픈하는 거야. 왜? 마프에 딸기가 부족한가 보지?”
“아닙니다!”
“다 아는 데 우리 그러지 말자.”
“…….”
“미안해……. 우리가 너무 휩쓸고 다녔지? 디몰 회원도 많고, 바론의 멤버십 회원도 너무 많아서 말이야.”
고동수 부장은 한 손을 허공에 휘휘 저으며 거만한 표정을 유지했다.
더 말을 섞는 것은 시간 낭비다.
나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김기열 팀장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기열 팀장. 가자.”
“네? 그냥 이대로 가자고요? 여기는 제가 미리 전화해서 잡아 둔 곳입니다.”
고동수 부장은 억울해하는 김기열 팀장의 앞으로 고개를 빼꼼히 들이밀며 히죽거렸다.
“그럼 지금이라도 들어가 보던가. 아 참, 이건 참고용으로 말하는 데. 마프가 제시한 금액보다 겨우 10% 올려 줬거든? 근데 바로 계약하더라. 시골 사람들 돈 안 밝힌다고 하지? 그거 다 옛말이다. 이 동네는 돈이면 안 되는 게 없어.”
한 대 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나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화를 삭였다. 그리고 그의 퉁퉁한 볼을 밀어내며 말했다.
“점심으로 청국장 먹었어요?”
“네?”
“근처에서 똥내가 심하게 난다 했는데, 고 부장님 입에서 나는 거였네요.”
“뭐요?”
“동네 청국장은 다 쳐 드셨나. 냄새가 역대급이네.”
내가 코를 막고 등을 돌리자, 김기열 팀장이 피식 웃으며 내 뒤를 따라왔다. 그러자 고동수 부장은 내 앞을 막아서며 명함을 내밀었다.
“혹시 못 잡으면 연락 주세요. 뭐 옛정을 생각해서 조금은 넘겨드릴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부장이 아니라 본부장입니다.”
그가 내민 명함을 힐끔 보고 오른손으로 꽉 움켜잡았다.
“축하해요.”
그때 들려온 고동수 부장의 기억.
<신선은 먼저 잡는 놈이 임자야.>
<급하니까 원지훈까지 나왔구나.>
<아무리 다녀봐라. 논산은 다 끝났으니까.>
<이번에도 최두영 이사 말이 맞았어. 이렇게 신선식품으로 견제하면 마프는 알아서 무너질 거야.>
그의 말이 맞다.
채소, 과일과 같은 신선식품은 국내에서 수확량이 대충 정해져 있기에, 누군가 대량매입을 하면 추가 물량을 잡기가 어렵다.
그래서 우리도 수확하기 6개월 전부터 미리 계약을 했었다.
하지만 지금 바론의 행위는 매우 위험하다.
물량을 소진할 수 있다는 확신도 없으면서 견제를 위해 물건을 사들이는 것은 분명 독이 될 수도 있다.
또한, 콜드체인이 그렇게 쉽게 구축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도 무수히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만든 것이다.
과연 그 많은 수량의 제품을 보관할 수 있을까?
장담하는데, 바론과 디몰의 기술로는 절대 신선식품을 오래 보관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더 이상 기억이 들리지 않는 그의 명함을 주머니에 넣고, 차 키를 김기열 팀장에게 건넸다.
“기열 팀장. 가자. 차에 향수 있지? 그거 좀 뿌려. 썩은 내가 뭐 이렇게 심해?”
“네. 듬뿍 뿌리겠습니다.”
나는 고동수 부장을 무시하고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정면을 응시한 채로 운전석의 김기열 팀장에게 말했다.
“진주로 가자.”
“진주요? 논산에 다른 농장도 있는데요?”
“거긴 가 봤자 소용없을 거야.”
“왜요?”
“이미 바론에서 다 돌았을 거야.”
“그래서 그냥 포기하자고요? 고동수 부장 하는 짓을 봐요. 어떻게든 설득해서 뺏어 와야죠.”
“도장 찍은 농장. 위약금도 물어 주게?”
“그건 아니지만…….”
내 말에, 김기열 팀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설향이 안 되면 매향을 잡아야지.”
수출전용 딸기인 매향.
수량이 적고 키우기가 까다롭지만, 맛이 좋고 과실도 단단하다.
그리고 아무리 바론이라도 여기까지는 손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매향이라는 품종이 일반 설향보다 20% 이상 더 비싸니까.
“매향은 이미 다 계약하지 않았을까요? 작년에 홍콩이랑 러시아에서 꽤 팔렸는데…….”
“아니, 분명 남은 곳이 있을 거야. 나 통화 좀 해 볼 테니까, 기열 팀장은 일단 운전 좀 해 줘.”
“알겠습니다.”
차가 출발하는 사이, 나는 수출을 주로 하는 벤더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표님! 원지훈입니다.”
- 오! 지훈아. 잘 지냈어?
해진물산의 박성식 대표.
예전 원스몰 때부터 알던 인물로 신선식품 수출입을 주로 한다.
김재열 이사의 절친인 그는 나와도 형 동생을 하고 지냈다.
“아니요. 죽겠습니다. 형님.”
- 왜? 누가 우리 원 이사를 건드려? 재열이 말로는 요새 네가 커머스 짱먹었다던데?
“대표님이 도와주셔야 짱을 먹던가 말든가 하죠.”
- 그래 말만 해. 뭐 해 줄까?
“진주에서 매향 좀 가져오려고 하는데, 혹시 아시는 데 없어요?”
매향이라는 말에 박성식 대표가 잠시 머뭇거렸다.
- 매향? 매향 딸기 말이지?
“네.”
- 요즘은 마프에서 수출도 해?
“아뇨. 내수용입니다.”
- 근데 왜 매향을 풀어? 매향이 설향보다 더 비싼 거 알잖아.
“일단 이거라도 잡아 봐야죠.”
- 왜 지금 설향 널렸잖아. 그냥 대충 아무거나 잡아가!
“그게 좀 복잡해요. 진주 쪽에 아는 곳 있어요, 없어요?”
- 성질 급한 거 여전하구나. 그래 30분만 시간을 줘.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자, 옆에서 통화를 들은 김기열이 입을 열었다.
“친하신 분인가 봐요.”
“해진물산 대표님이야.”
“아……. 해진이요?”
“응. 알아?”
“네. 신선팀 MD라면 당연히 해진을 알아야죠. 저번 가을에도 배가 부족해서 해진에서 끌어왔었어요.”
예전에 정진택 차장을 소개해 준 적이 있었는데.
잘 활용하고 있구나.
나는 씩 웃으며 등을 뒤로 기댔다.
그렇게 20여 분이 지나.
- 지훈아. 내가 주소 하나 보내 줄 테니까 그리로 가봐.
“고맙습니다.”
- 고맙긴 뭘. 싱가포르 나가려던 물량인데, 얼마 전에 빠그라졌나 보더라고.
“그래요?
- 응. 거기 사장님 마음 여린 분이니까 잘 해 드려. 값도 잘 매겨드리고.
“걱정하지 마세요.”
- 그래. 수고하고. 언제 한잔하자.
“네. 서울 올라가서 연락드리겠습니다.”
* * *
기계화된 딸기 농장.
박성식 대표가 소개해 준 이곳은 농장이 아니라 공장과 같은 곳이었다.
물론 출하량도 조금 전에 놓친 논산보다 2배는 많을 것 같았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
농장의 사장이라는 50대 여성.
그녀는 자신의 이름이 김명옥이라는 말만 하고 우리의 제안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는 고개를 푹 숙인 그녀에게 조금 더 가까이 고개를 들이밀며 물었다.
“사장님. 원하시는 가격이나 조건이 있을까요?”
“…….”
“아니면 미리 계약한 곳이라도 있나요?”
“저……. 그건 아니고…….”
“네. 말씀하세요.”
“…….”
그때, 낡은 테이블에서 그녀의 기억이 들려왔다.
<전열시스템이 고장 났다고 말하면……. 계약하지 않겠지?>
<어쩌지? 반대쪽 동의 것들은 전부 버려야 하나?>
그랬구나.
그래서 싱가포르 수출이 끊겼구나.
딸기를 재배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온도.
전열시스템이 고장 났다는 것은 이미 심각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우린 다르다.
딸기만 취급하는 업체들과 다르게, 많은 제조사와 함께 성장해 온 커머스다. 남은 딸기는 덕산에서 매입을 해도 되고, 베이커리를 주로 하는 제조사에 넘겨도 된다.
나는 재빨리 두툼한 그녀의 손등 위로 내 손을 올렸다.
유난히 까끌까끌한 그녀의 손등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느끼게 해 줬다.
“사장님.”
“……네“
“딸기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하셨죠?”
“네…….”
“고생 많으셨겠네요.”
김명옥 사장은 말을 마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딸기는 가격의 변화가 크게 없기에 안정적인 제품이다.
그래서 작년에 많은 농가가 딸기를 재배를 시작했고, 이에 정부는 시설비 일부를 저렴한 이자로 대출해 주는 상품까지 만들었다.
하지만 재배기술의 습득이 어려워 새로 시작하는 사람에게는 많은 문제가 있다.
지금 김명옥 사장처럼 말이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떨군 그녀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도를 체크해 봐도 되겠습니까?”
“네…….”
그녀의 답에, 나는 옆에 있는 김기열 팀장에게 손짓했다.
이에 김기열 팀장은 가방에 있던 휴대용 당도 측정기를 꺼내 농장의 안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가장 앞에 열린 것을 하나 따서 측정기를 돌린 후 크게 소리쳤다.
“이사님 13.7입니다!”
훌륭하다.
딸기는 보통 11브릭스 이상으로 13.7 브릭스라면 일반 제품들보다 당도가 좋다는 말이다.
“좋네.”
내 답을 들은 김기열 팀장은 손에 들고 있는 딸기를 대충 바지에 문질러 닦은 후 바로 입안에 집어넣었다.
“사장님 반대쪽 동도 체크해 볼 수 있을까요?”
“아……. 저……. 사실…….”
“압니다.”
“네?”
“들어오면서 대충 봤습니다. 전열시스템이 안 들어오는 거 같던데.”
내 말에 김명옥 대표가 흠칫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나는 고개를 돌려 김기열 팀장을 불렀다.
“기열 팀장! 옆에 동으로 넘어가서 당도 좀 측정하고 와!”
“알겠습니다.”
잠시 후,
김기열 팀장은 작은 그릇에 딸기 여러 알을 담은 채로 다가왔다. 그리고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9.6입니다. 그리고 모양도 좋지 못해요.”
나는 씩 웃으며 김명옥 사장에게 말했다.
“전부 다 저희가 계약하겠습니다.”
“네?”
“대신, 단가는 사장님이 조금 양보해 주셔야 합니다.”
“당연히 그래야죠. 처분만 할 수 있다면야……. 당장 딸기를 딸 인력도 들어가야 하는데…….”
“걱정 마세요. 돈은 당연히 선금으로 드릴 겁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돈으로 많은 물량을 확보하려는 바론.
서로의 사정을 이해하고 조금씩 양보하는 우리.
나는 확신했다.
지금은 우리가 뒤처지는 것 같지만, 런칭을 하면 분명 달라질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