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167화>
168. 차라리 잘됐다
최구열 이사의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책상에 앉아 있던 최구열 이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한 손을 펼쳐 보이며, 나에게 소파에 앉으라는 신호를 했다.
“앉아요.”
“네.”
“무슨 일인가요?”
“이번에 아마존 기획전에 오늘유업의 제품을 포함할 수 있을까요?”
“오늘유업이면, 두유 말입니까?”
“네. 이번 기획전에 투비팩으로 포장된 두유를 넣어 보고 싶습니다.”
“기획은 나왔나요?”
“지난번 실적이 좋았던 연두부와 번들로 구성할 생각입니다. 세부 기획서가 나오면 전달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내 말에 최구열 이사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기획전 상품 선별은 MD 사업부에서 하는 거잖아요. 그리고 투비팩의 시험 결과서는 저도 확인했습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데, 밀어 봐야죠.”
“고맙습니다.”
내가 고개를 숙이자, 최구열 이사는 얼굴에 웃음기를 빼고 물었다.
“원 이사님. 테트라팩 시장이 얼마나 크고 탄탄한지는 아시죠?”
역시 그는 내 생각을 읽고 있었다.
투비팩으로 한국의 시장을 독점해도 수익은 얼마 되지 않는다.
하지만 전 세계로부터 로열티를 받는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현재 테트라팩의 연 매출은 15조 원.
절반의 점유율만 가져와도 7조 이상의 수익을 낼 수 있다는 말이다.
“네. 알고 있습니다.”
“계속 시도해야 할 겁니다. 이건 성공하면 안정적인 수익을 만들 수 있겠지만, 절대 운으로 성공할 수 없는 아이템이기도 합니다.”
“네.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얘기하세요.”
그래. 이 말이 나오길 기다렸다.
나는 씩 웃으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러면 말 나온 김에 지금 바로 얘기해도 될까요?”
“네. 물론이죠.”
“전략 기획부의 신인성 과장에게 업무를 나눠 주려고 합니다. MD 사업부에서만 하기엔 너무 큰 것 같아서요. 괜찮을까요?”
전략 기획부의 신인성 과장.
그룹폰 당시 제휴 영업을 담당했던 인물로 신중하고 차분하다. 또한, 협상에 능해 우리 회사에서 투비팩의 영업에 가장 적격인 사람이기도 하다.
최구열 이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눈웃음을 지었다.
“인성 과장이라면 잘하겠군요.”
“네. 경험도 많고, 투비팩에 가장 잘 맞는 인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세요. 인성 과장에게는 제가 미리 말해 두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최구열 이사는 옅은 미소를 짓고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서랍에 있던 공진단을 꺼내 왔다.
“이번에 원 이사님 것도 함께 주문했습니다.”
“아닙니다. 저, 정말 괜찮습니다. 그리고 이거 꽤 비싼 거 같던데…….”
“앞으로 잘해 보자는 뇌물이니까, 그냥 받아요.”
최구열 이사는 공진단 나무 상자를 내 손에 쥐여 줬다.
그렇게 강제로 듣게 된 그의 지난 기억.
<바론이 이제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구나.>
<여사님의 자본이 벌써 들어간 것인가? 흠…… 디몰을 인수한다면 오픈이 더 빨라질 수도 있어.>
<먼저 준비를 해야 하는데…… 고동수에게 연락해 볼까?>
국내 커머스 4위인 디몰.
바론이 그들을 인수하기 위해 움직인다는 것은 이제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리고 패션이 메인인 디몰에게 식품이라는 카테고리가 생기면, 우리 턱밑까지 따라올 수 있다는 것도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이사님. 바론은 디몰을 반드시 인수할 겁니다.”
내 말에, 최구열 이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그렇습니까? 어떻게 아셨나요?”
“친한 제조사들에게 들었습니다. 이미 80명이 넘는 MD들이 제조사와 벤더들을 돌고 있다고요.”
“그래요? 후…….”
긴 한숨을 내쉬는 최구열 이사.
그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여사님의 자본으로 디몰까지 인수하면…….”
“최 이사님. 이번 달 우리 매출은 확인하셨죠?”
“네. 어제 확인했습니다.”
“다음 달에도 비슷하게 유지할 수만 있다면, 처음으로 에이마켓의 분기 매출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저도 기대가 큽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가 구축해 둔 프로세스는 생각보다 단단하니까요.”
“네. 알겠습니다.”
* * *
며칠 후, MD 사업부 사무실.
사무실 곳곳에서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전화를 받은 직원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좋지 못했다.
“뭐라고요?”
“아, 대리님! 갑자기 그러시면 어떡합니까?”
“팀장님! 잠깐, 잠깐만요! 팀장님!”
전화를 끊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직원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나는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사무실 중앙에 멈춰 섰다.
그러자 직원들에게 보고를 받은 팀장들이 하나둘 나에게 다가왔다.
“이사님! 자연식품에서 추가 계약을 거절했습니다.”
“천홍은 위약금까지 내면서 추가 물량을 끊겠다고 합니다.”
“남양주 딸기 농장 4곳이 계약을 파기하겠답니다.”
갑자기…… 그것도 동시에?
그때, 고개를 푹 숙인 김태하 차장이 내 옆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덕, 삼진, 정정…… 세 업체가 재계약을 거절했습니다. 이거 바론 짓입니다.”
“바론?”
“네. 고덕의 이천우 이사 말로는 바론에서 새로운 조건을 걸었다고 합니다. 세부 조건에 대해서 말해 주지 않지만, 아마도 독점권을 강화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시작이구나.
하지만 이런 식으로 싸움을 걸어올 것이라고는 나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때 차주영 부장의 기억을 좀 더 읽어 보는 건데…….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이사님! 이사님!”
뒤늦게 다가온 마성근 팀장이 들고 있던 태블릿 PC의 화면을 내게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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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론 ‘빅 딜’, 3천억 규모의 디몰 인수 확정
- 내일경제
“디몰 인수 확정”…… 바론, 디몰에 식품의 카테고리를 더한다
- 매일이코노믹
바론, 추가 지분 투자로 디몰 인수. 기존 식품 사업 확대
- 뉴스인사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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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예상은 했는데…….
빠르다. 생각했던 것보다 바론이 빠르게 움직인다.
나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 주위의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30분 후, 팀장 회의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계약을 파기하거나 재계약을 거부하는 제조사들을 정리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30분이 지나.
MD 사업부의 부장, 차장, 팀장들이 회의실로 들어왔다.
표정이 좋지 못한 그들은 입을 열지 않고, 내 눈치를 봤다.
자신들이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나는 고개를 푹 숙인 김명진 부장을 보며 입을 뗐다.
“명진 부장님. 먼저 말씀해 주세요.”
“네…… 저희 로하스 사업부 상대의 제조사나 벤더들 중, 재계약을 거부한 곳은 총 7곳이고 현재 계약 파기를 요구하는 곳은 3곳입니다. 그리고 정호식품의 경우, 불공정 거래였다는 내용 증명까지 보내왔습니다.”
“정호식품이요?”
정호식품은 큰 회사가 아니다.
매주 목요일에 열리는 품평회 때 선별한 업체로, 우리가 발굴하기 전까지는 일반 소비자들이 모르는 곳이었다.
“네. 은혜도 모르고…….”
“정호를 키워 준 게 누군데 이러는 겁니까? 박천식 이사가 그러던가요? 박천식 그 새끼가 그런 거냐고요!”
“…….”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박천식이 그 새끼 조심하라고 했잖아요!”
성질이 불같은 박대영 부장이 자리에서 반쯤 일어나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는 한 손을 올려 그를 진정시켰다.
“그만하세요. 박 부장님.”
“후…… 후…… 이거 진정이 안 되네요. 당장 잡으러 갈까요? 이 새끼들을 진짜 내가…….”
“푸드 사업부는 어떻습니까?”
내가 묻자, 박대영 부장은 그제야 자리에 앉아, 가져온 자료를 읽었다.
“후…… 재계약 거부는 총 네 곳입니다. 고덕, 삼진, 정정, 하린이며, 계약 파기를 말한 곳은 없습니다.”
박대영 부장은 말을 마치고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고동수 부장을 대신하고 있는 이진성 차장에게 물었다.
“이진성 차장님.”
“죄송합니다. 저희는 조금 심각합니다. 재계약 거부는 총 24곳이며, 파기는 5곳입니다. 죄송합니다.”
고개를 떨구는 이진성 차장.
회의실에 모여 있는 임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스물넷?”
“이거 다, 고 부장 때문이잖아.”
디지털 사업부는 고동수 부장이 근무하던 당시 MD들에게 매출에 대한 압박을 가했다.
이는 제조사나 벤더들에게 고스란히 전가됐고, 이번 이탈은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결과였다.
그런데도 이진성 차장은 자신의 잘못인 것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제 실수였습니다. 그때, 고 부장님을 막았어야 했는데…….”
“고동수, 그 인간은 똥을 싸질러 놓고 나가고! 아후! 그 인간 바론으로 갔죠? 배임으로 소송 걸 수 없어요? 그런 놈은 당장 콩밥을 먹여야 합니다!”
박대영 부장은 고개를 하늘로 들며 화를 삭였다.
우릴 떠난 제조사와 벤더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아니.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굳이 잡아 오고 싶은 마음도 없다.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차라리 잘 됐습니다. 일단 부장님들은 계약 파기를 요구한 업체들의 위약금 조항들을 확인해 주세요. 그리고 계약서에 명시된 위약금은 소송해서라도 꼭 받아 내세요. 절대로 단 한 푼도 양보하지 않을 겁니다.”
“이사님. 저…….”
정진택 차장이 손을 살포시 들고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나와 회의실의 임원 모두가 바라보자, 그는 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남양주 딸기 농장은 이번 시즌 물량의 30퍼센트 정도입니다. 당장 남양주 농장들이 한 번에 빠지면, 이번 시즌 딸기 수급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사전에 관리를 했어야 했는데…… 저희가 너무 안일했습니다.”
가공식품들은 다른 제조사의 제품들로 어느 정도 대체가 된다.
하지만 신선의 경우, 이렇게 바로 타격을 입을 수 있다.
“지금 물량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습니까?”
“일주일 정도는 가능할 겁니다.”
“남양주만 딸기 농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다시 찾아보죠. 저도 함께 움직이도록 하겠습니다.”
“이사님이 직접요?”
“네. 뭐 문제라도 있나요?”
“아닙니다. 그럼 저희야 좋죠.”
나는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고, 회의실 안의 직원들을 둘러봤다.
“지난달 우리가 신규로 계약한 제조사와 벤더들이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
“열네 개의 업체입니다. 겨우 열넷…… 지난달은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
“열둘입니다.”
우린 기존의 제조사와 벤더들에게 익숙해져 버렸다.
차라리 잘됐다.
이번 기회에 우린 기존 협력사들을 한 번 더 둘러보고, 새로운 협력사들 모집에 박차를 가할 수 있을 테니까.
“자자! 이제 빨리 움직입시다. 빠져나가는 제품들 메우려면, 다들 바쁘게 뛰어야 할 겁니다.”
오늘은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바론의 이 처사에 대해서는 반드시 후회하도록 만들어 줄 것이다.
나는 회의실 밖으로 나가는 팀장들을 보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