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166화>
167. 약점을 파고드는 것은 협상의 기술
오후 2시.
오전에 부천으로 넘어가 투비와의 계약을 마쳤다.
평소보다 말끔한 차림의 이해용 대표는 기분 좋게 사인을 마쳤고, 직원들을 위해 더 노력하겠다는 말을 했다.
나는 하루 사이에 변한 그의 모습이 대견하고 뿌듯했다.
계약 조건은 유통 독점권.
그렇게 투비팩은 우리 마켓 프레시에서만 유통할 수 있는 제품이 됐다.
사무실로 돌아온 나는 곧바로 식음료 팀 장선영 차장의 옆으로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내 눈치를 보던 김혁진이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음료 팀의 마스코트와 같은 그는 붙임성이 좋고, 인턴들 사이에서도 리더와 같은 역할을 하는 친구였다.
그의 목소리에 모니터를 보던 장선영 차장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어. 이사님. 언제 오셨어요?”
“방금요. 잠깐 시간 될까요?”
“네.”
“그러면 차 한잔하죠.”
“알겠습니다.”
나는 엄지를 어깨와 머리 사이로 올려 회의실로 가자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장선영 차장이 천천히 일어나 내 뒤를 따라왔다.
조용한 회의실 안.
들고 있던 파일 철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거 봤죠?”
“테트라팩이요?”
“이제 테트라팩이 아니라 투비팩입니다.”
“그게 그거죠.”
“아니요. 차이가 커요. 이건 격자로 코일을 심어서 내구성이 기존보다 50% 이상 강해요. 상온에서 살균도 2배 이상 길어지고.”
“이거 계약하신 거예요?”
“네.”
“기능 평가서는 봤는데……. 단가가 너무 세지 않아요? 테트라팩 로열티까지 포함한 비용보다 10%나 비싸잖아요. 여기에 우리 마진도 녹이면 최소 20%는 불러야 하는데, 너무 시장성이 없지 않아요?”
“그건 그렇죠.”
“어떻게 풀어 볼 생각이세요?”
“그래서 장 차장님한테 상의하러 온 거잖아요.”
내가 뚫어지게 바라보자,
장선영 차장은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눈빛! 아 진짜! 왜 자꾸 그렇게 보세요?”
“오늘유업에 권순우 본부장이랑 친하다고 하셨죠?”
“그야 그렇지만……. 오늘유업은 절대 안 할걸요? 얼마나 권위적이고 보수적인 회사인데요.”
“오늘유업 제품들, 물류 과정에서 로스율 5% 이상이잖아요.”
테트라팩으로 포장한 두유를 메인으로 하는 오늘유업.
그들은 다른 경쟁사에 비해 유난히도 물류 사고가 잦은 회사였다.
대부분이 테트라팩의 내구성 때문이었고, 나는 이 문제를 새로운 투비팩으로 충분히 커버할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그제야 내 뜻을 이해한 장선영 차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오늘유업을 선택하셨군요.”
“네.”
“그리고 하나 더 있어요.”
“뭔데요?”
“오늘유업 회장님, 손자 때문에 요즘 머리 좀 아프잖아요.”
“아……. 황진성이요?”
오늘유업 황정인 회장의 외동 손자 황진성.
그는 정말 철없는 재벌 3세로 유명했다.
중2병에 걸린 반항아처럼 남들이 하지 말라는 짓만 골라 했고, 최근에는 강남 한복판에서 황당한 프러포즈를 해서 화제가 됐다.
“네. 이 기회에 그 이미지도 씻어 버리자고 하려고요.”
“국산, 환경 보호. 이런 이미지로 그게 씻길까요? 완전 철부지인데?”
“안 하는 거보다는 좋겠죠. 일단 그쪽 미팅 좀 잡아 주세요.”
“알겠습니다.”
장선영 차장은 고개를 끄덕이고 남은 차를 홀짝홀짝 마셨다.
* * *
이틀 후.
오늘유업과의 미팅 자리에는 나와 장선영 차장, 이해용 대표가 함께했다.
회의실 문앞.
잔뜩 긴장한 이해용 대표는 이까지 덜덜 떨며 내 옷자락을 잡았다.
“저……. 이……. 이사님.”
“네?”
“화……. 화장실 좀 다녀와도 될까요?”
“긴장돼요?”
“네. 사실……. 오늘유업은 제가 처음으로 왔던 곳이거든요. 그때…….”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는 이해용 대표.
대충은 알 것 같았다.
이곳에서 어떤 대우를 받으며 나갔을지를 말이다.
그는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등을 돌려 화장실이 있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장선영 차장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래서 큰일을 할 수 있겠어요?”
“점점 나아지겠죠. 누군가의 롤모델이 되기 위해서.”
“롤모델이요?”
“그런 게 있어요.”
가끔 그런 사람이 있다.
제품개발이나 기획에는 남들보다 월등한 능력을 보이는데, 사람을 대하는 것에는 한없이 약해지는 사람.
이해용 대표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잠시 후, 이해용 대표가 우리의 앞으로 돌아왔다.
장선영 차장은 그의 옷매무새를 대충 훑어보다가 다시 미간을 구기며 손가락으로 그곳을 가리켰다.
“대표님. 지퍼 올려요.”
“헛!”
당황한 이해용 대표가 뒤로 돌아 지퍼를 올리는 사이, 나는 곧바로 회의실의 문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내가 인사를 하자, 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 둘이 앞으로 다가와 명함을 내밀었다.
평범한 40대의 권순우 본부장.
머리숱이 다소 부족하지만 젊었을 때, 꽤 인기가 있었을 것 같은 외모다.
20대 초반의 황진성 과장.
오늘유업 회장의 손자.
유명인사다. 이미 이놈의 얼굴은 인터넷에서 자주 봤다.
찢어진 눈과 얇은 입술, 툭 튀어나온 광대가 썩 좋아 보이는 인상은 아니었다.
“이사님. 방송 봤습니다. 나 궁금하던 게 있는데, 물어도 될까요?”
한없이 가벼운 말투.
존댓말을 배운 적이 없나?
첫 대면에서부터 ‘저’가 아닌 ‘나’라고 말하는 사람은 간만이다.
“네.”
“그거 진심 아니죠? 우리 농가를 뭐 살리고 어쩌고저쩌고. 블라블라블라……. 무슨 공익 선전에서 나올 것 같은 대사들이요.”
“…….”
“대본이죠? 작가가 써 준 거죠? 우리 동네 대본 없다고 하던데 그거 다 구라죠?”
뭐지?
이거 생각보다 멘탈과 치유력이 강한 놈이구나.
불과 몇 달 전까지 이놈의 각종 기행이 인터넷 곳곳을 떠돌았는데…….
근데 이놈의 행동과 말투, 익숙하다.
지금은 사람이 된 정진택 차장과 아주 흡사하다.
나는 씩 웃으며,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황 과장님. 인터넷과 뉴스에서 보던 그대로군요. 요즘 언론이 일을 좀 하나 봐요.”
“……!”
내 말에, 인상을 구기는 황진성 과장.
당황한 표정의 권순우 본부장은 대립을 멈추기 위해 재빨리 자리를 안내했다.
“자자! 이사님 이쪽으로 앉으시면 됩니다.”
“네.”
우린 그렇게 서로를 마주하고 앉았다.
처음에 오간 공격적인 말 때문인지, 황진성 과장은 계속해서 나를 노려봤다.
그리고 완전히 굳어 버린 이해용 대표.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방에 들어온 이후로 얼음처럼 얼어 버렸다.
나는 그를 보다가, 고개를 돌려 그나마 말이 통할 것 같은 권순우 본부장에게 말을 건넸다.
“보내드린 자료는 확인해 보셨나요?”
“네. 확인했습니다.”
“여긴 투비팩을 개발한 투비인터렉티브의 이해용 대표입니다. 상세 제품 설명은 대표님이 해 주실 겁니다.”
모두의 눈이 이해용 대표의 손으로 향했다.
부들부들 손을 떨던 그는 조심스럽게 가방에서 투비팩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그리고 헛기침을 크게 하고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저희 투비팩은 일단 기존 테트라팩보다 내구성이 50%……. 아니 57.25% 이상 노……. 높습니다. 이는 BO의 제품 연구팀과 식약처의……. 휴…….”
이해용 대표는 설명 도중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팔짱을 끼고 고압적인 자세로 보고 있던 황진성 과장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
“…….”
“준비 안 했어요? 이전보다 업그레이드된 게 하나도 없네요. 하하.”
이전이랑 달라진 게 없다고?
그렇다면 이해용 대표가 오늘유업에 들어와서 황진성 과장을 만났단 말인가?
하긴 그럴 수 있다.
테트라팩 담당자는 하필 저 인간이니까.
버릇없는 그의 행동에 권순우 본부장이 재빨리 대화에 끼어들었다.
“대표님. 편하게 하세요. 옆에 물도 좀 드시고.”
“네. 네. 감사합니다.”
이해용 대표가 물을 마시는 사이, 황진성 과장은 냉소를 머금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나는 이해용 대표의 앞에 있는 투비팩을 들어 올렸다.
테스트하기 위해 물을 담아둔 투비팩 안의 출렁거림이 느껴졌다.
“테스트하기 위해 투비팩 안에는 물을 3분의 2 정도 담아 왔습니다.”
“아……. 네.”
권순우 본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딴 곳을 보고 있는 황진성 과장을 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 두 분 보시는 앞에서 테스트를 좀 해 봐도 될까요?”
“네. 괜찮습니다.”
권순우 본부장이 답했고, 황진성은 대충 손을 흔들며 해 보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렇게 내 손안의 투비팩에 황진성을 제외한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나는 씩 웃으며, 황진성 과장의 옆으로 투비팩을 집어던졌다.
쉬이이익! 퍼어억!
“이봐요! 지금 뭐하자는 겁니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치는 황진성 과장.
나는 태연한 표정으로 바닥에 떨어진 투비팩을 가리켰다. 그러자 권순우 본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의 투비팩을 들어 올렸다.
“이거……. 구겨지지도 않았네요?”
“네. 전혀 손상이 없습니다. 테트라팩보다 얇은 알루미늄을 격자로 구성해서 내구성이 훨씬 좋습니다. 멸균은 물론이고, 테스트 결과 상온에서 10일 이상 버텼습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대단하네요.”
“오늘유업은 물류 과정에서 5% 이상 로스가 난다고 들었습니다. 투비팩은 테트라팩보다 20%나 단가가 높지만, 로스를 줄일 수 있다면 충분히 해 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가요?”
우리의 마진을 포함한 20%.
이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단가다.
하지만 제품의 손상을 줄일 수 있다면, 이는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단가가 될 수 있다.
권순우 본부장은 투비팩을 돌리며 구석구석 살폈다.
그의 표정에는 이미 긍정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황진성 과장은 미간을 구기며 반대를 위한 명분을 내세웠다.
“그럼 우리 테트라팩 설비는 어쩌라고요? 이사님. 그 깡통 같은 기계가 얼마나 비싼지 알아요?”
“기존 설비에서 일부 부품만 교체하면 됩니다.”
“그럼 테트라팩에서 가만있겠어요? 그래도 로열티까지 주면서 쓰는 설비인데?”
“그 점은 이미 확인했습니다. 설비는 테트라팩 본사의 것도 아니고, 로열티도 없습니다. 기존 설비를 변경하는 것에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할 말이 없어진 황진성 과장.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답했다.
“우리가 왜 마루타가 돼야 합니까? 테스트는 다른 데 가서 하세요.”
“다른 곳이라……. 저희가 남동유업에 들어가서 런칭하면,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습니까? 남동유업이 투비팩을 가지고 환경 보호와 국산 기술이라는 점으로 광고하면 어떻게 될까요?”
“흠……. 흠…….”
경쟁사로 자극하는 것은 고전적인 방법이다.
이에 기본이 되지 않은 황진성 과장은 이에 말문이 막혔고, 그제야 투비팩을 이리지 만져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그가 만지는 투비팩을 재빨리 가로채며 그의 기억을 들었다.
<이걸로 로스율만 줄일 수 있다면 충분히 설득할 수 있어.>
이건 권순우 본부장의 기억.
그는 이미 투비팩에 마음을 뺏겼다.
뒤이어 들려오는 목소리.
<흠……. 이거 쓰면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냥 눈 딱 감고 받아들여?>
<민식이 새끼, 셋째 가졌다잖아.>
빙고. 이거다.
물류 과정에서 사고가 유난히 많은 오늘유업.
황진성 과장이 물류 사업을 시작한 친구에게 일을 주면서 생겨난 것이다.
이러면 모든 것이 쉬워진다.
나는 씩 웃으며, 팔짱을 낀 채로 먼 곳을 응시하는 황진성 과장을 불렀다.
“황 과장님!”
“왜요?”
황진성 과장은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우리가 물류 과정에서 로스난 것을 모두 보상해 준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당황한 황진성 과장이 말을 더듬었다.
나는 의자를 당겨 앉으며 조용히 그에게 속삭였다.
“아니면 그 지금 물류 위탁하는 회사를 바꾸던가요.”
“그……. 그게…….”
“잘 생각해 보고 연락 주세요. 나 말고 여기 이해용 대표님에게요.”
“…….”
“아주 정중하게.”
누구에게나 약점은 있다.
철부지였던 정진택 차장은 아버지의 간섭이 약점이었고, 지금 황진성은 친구를 돕겠다는 생각이 약점이었다.
약점을 파고드는 것은 협상의 기술.
이제 그는 내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