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165화>
166. 인생의 롤모델이라나 뭐라나
* * *
이렇게 개운한 날이 있었을까?
매일 아침 찜찜한 기분으로 일어났었다.
항상 이유 모를 복통이 있었는데, 오늘은 신기하게도 멀쩡하다.
나는 씩 웃으며, 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7시.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일어났다.
침대 옆 테이블에 올려 둔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걸려 온 전화는 없었고, 문자나 톡도 스팸으로 온 것이 전부였다.
멍하니 침대에 앉아 고민하다가 휴대전화에 저장된 번호를 찾았다. 그리고 투비인터렉티브의 이해용 대표에게 메시지를 남겨 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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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전에 시간 되시면 잠깐 뵐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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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곧바로 걸려 온 전화.
- 이사님. 이해용입니다. 오늘 괜찮습니다. 약속 없습니다.
“그럼 제가 움직이겠습니다. 어디로 가면 될까요?”
- 괜찮으시겠어요?
“네. 제가 뵙자고 했잖아요.”
- 그럼 제가 드린 명함에 보면 저희 사무실 주소가 있을 겁니다. 그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몇 시가 편하세요?”
- 어차피 사무실에 쭉 있으니까 이사님 편하실 때 오시면 됩니다.
“그럼 오전 10시까지 가도록 하겠습니다.”
- 네.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 * *
회사에 출근해, 오전 주가를 확인하고 곧바로 밖으로 나왔다.
차에 시동을 걸고 가려는 순간.
“이사님! 이사님!”
이예나가 두툼한 서류 봉투를 들고 달려왔다.
나는 차에서 내려 그녀의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응?”
“이거 놓고 가셔서요.”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서류 봉투.
그 안에는 투비에서 새로 개발한 테트라팩 시험 결과서가 들어 있었다.
“내 정신 좀 봐. 고마워.”
“아닙니다.”
“나 부천 가는데, 전에 그 단팥빵 사다 줄까?”
“진짜요?”
이예나는 두 눈을 초롱이며, 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았다.
“응, 거기가 그렇게 맛있어?”
“네, 너무너무 맛있어요.”
“알았어. 잔뜩 사 올 테니까. 기대하고 있어.”
“네!”
나는 그녀에게 손을 흔들고 차에 올라탔다.
그렇게 1시간 정도를 달려, 부천에 있는 이해용의 사무실에 도착했다.
오래된 아파트 상가의 건물.
1층 슈퍼에서 음료수를 사서 2층으로 걸어 올라갔다.
문을 열자, 퀴퀴한 남자의 향기와 5평 남짓한 사무실 안에 큼지막한 책상 네 개가 눈에 들어왔다.
일제히 나를 쳐다보는 네 명의 남자들.
내가 고개를 돌려 이해용 대표를 찾는 사이, 가장 끝에 있던 그가 먼저 나를 불렀다.
“이사님! 이렇게 누추한 곳까지 직접 와 주시고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누추하긴 뭘요.”
“가시죠. 1층에 조용한 커피숍이 있습니다.”
“네, 그래요.”
나는 나를 물끄러미 보는 사람들에게 고개를 살짝 숙이고 밖으로 나왔다.
1층 커피숍.
조용한 곳이라는 것은 거짓말이었나 보다.
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낸 엄마들이 모여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해용 대표는 미안한 표정으로 커피를 주문하고, 구석의 자리에 나를 앉도록 했다.
“여기가 원래 조용한데…….”
“괜찮아요. 공기도 좋은데, 커피 나오면 밖에 나가서 마실까요?”
“네. 그러죠.”
우린 커피를 받아, 아파트 상가 앞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그리고 나는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특허랑 상표 출원은 하셨나요?”
“네. 말씀하신 날 바로 했습니다.”
“제품의 이름은 뭔가요?”
“저희 사업자 이름을 따서 투비팩이라고 지었습니다.”
“투비팩……. 좋네요.”
“저 이사님……. 어떻던가요? 테스트 결과는 잘 나왔나요?”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두꺼운 서류 봉투를 그에게 건네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훌륭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저……. 그리고.”
“네?”
“혹시 최두영 본부장님을 만나셨나요?”
최두영 본부장을 만나기 전, 이해용 대표에게 전화를 했었다.
혹시 다른 문제가 있으면 미리 말하라는 의미에서 했던 전화였다.
“네. 만났습니다.”
“정말요?”
“네.”
“그럼 본부장님도 저희 제품을 보신 건가요? 뭐라고 하시던가요? 칭찬하시거나 그러지 않으셨나요?”
기대에 가득 찬 표정으로 말하는 이해용 대표.
그렇게 좋을까?
기억도 못하고 형식적인 말 한 마디를 던진 그가 그렇게 좋을까?
나는 이해용 대표의 표정을 살피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네. 수고 많았다고 하시더군요.”
이해용 대표의 표정에 차마 기억 못한다는 말까지는 할 수 없었다.
내 말을 들은 그는 양팔을 올리며 크게 소리쳤다.
마치, 복권에 당첨된 사람처럼.
“그렇게 좋아요?”
“그럼요. 제 인생의 첫 번째 목표가 뭔지 아세요?”
“글쎄요.”
“그분에게 인정받는 거였습니다. 그분이 하시는 강연은 전부 다 봤습니다. 언젠간 그런 사람이 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살았는데……. 이제야 한 발 더 다가서는 것 같군요.”
나는 벤치에 내려 둔 두꺼운 서류 봉투를 가리키며 물었다.
“대표님. 테스트 결과는 확인 안 하세요?”
“아……. 맞다.”
이해용 대표는 그제야 봉투 안의 서류를 꺼내 봤다.
나는 한장 한장 차분히 넘겨보는 그의 옆에 앉아 말없이 먼 곳을 바라봤다.
그렇게 10여 분이 지나.
테스트 결과서를 모두 본 이해용 대표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허리를 굽혔다.
“감사합니다.”
나는 재빨리 일어나, 그를 일으키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아닙니다. 저흰 테스트만 했을 뿐입니다.”
“그래도……. 이렇게 직접 테스트 결과까지 가져다주시고…….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당연히 와야죠.”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저희는 계약하고 싶은데, 대표님 생각은 어떠신가요?”
“계약이요?”
“네. 계약이요.”
“저희 제품이 단가를 줄일 수 없다는 결과가 나왔는데도 계약을 하시겠다고요?”
“네. 저희는 충분히 시장성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이해용 대표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다.
기존의 테트라팩보다 10%나 비싼 결과에 이렇게 바로 계약을 제안할 줄은 몰랐나 보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내게 다시 허리를 굽혔다.
“이사님. 시간을 좀 주실 수 있겠습니까?”
왜 시간을 달라는 것일까?
내가 질문하려는 사이, 그가 나에게 돌려준 서류 봉투에서 그의 기억이 들려왔다.
<이 사업을 처음 제안 주신 건 최두영 본부장님이야.>
<그분이 계셨기에 지금의 결과가 있는 거야. 최두영 본부장님께 말씀드리고 마프와 계약하는 것이 맞아.>
최두영 본부장이 수고했다는 말을 했다는 거짓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냉정해도 솔직하게 말할걸…….
나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시간을 많이 드릴 수는 없습니다.”
“네. 내일까지 꼭 답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꼭, 그러셔야겠습니까?”
“네?”
“꼭 최두영 본부장님을 만나야겠습니까?”
“어떻게 아셨어요?”
이해용 대표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되물었다.
순간 욱하는 마음에 튀어나온 실수였다.
“그냥 느낌입니다.”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충 얼버무렸다.
그러자 이해용 대표는 다시 고개를 숙이며, 나에게 정중하게 답했다.
“죄송합니다. 이사님. 직접 여기까지 와주셨는데……. 계약 관련해서는 그분께 말씀은 드려야 할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
“처음 투비팩을 개발을 시작하던 그때를 전 아직도 기억합니다. 그분의 말 한 마디가 저와 직원들의 목표였습니다. 꼭 그분께 인정을 받고 싶습니다. 그리고 마켓 프레시와 당당하게 계약하고 싶습니다.”
확고한 그의 표정에서 말릴 수 없음을 느꼈다.
가슴속에서 새어 나오는 긴 한숨.
그의 환상을 깨주고 싶지는 않았는데…….
“후……. 그럼 어쩔 수 없군요.”
“정말 죄송합니다.”
“만약…….”
“네?”
“정말 만약……. 아니다. 이건 꼭 기억하세요. 우린 이해용 대표님과 투비의 기술력을 믿고, 미래를 함께하려는 겁니다.”
“네. 그러겠습니다.”
“그나저나 여기 커피 산도가 너무 강하네요.”
손에 들고 있는 커피를 가리키며 미간을 좁히자, 이해용 대표는 더 미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입맛에 안 맞으셨나요?”
“가끔은 이런 커피도 마셔야죠. 그래야 곁에 있는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 수 있으니까요.”
“아…….”
“내일 다시 여기 커피 마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내 답에 이해용 대표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꼭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누군가에게 듣는 것보다 자신이 직접 듣는 것이 더 도움 될 때가 있다.
지금이 바로 그렇다.
내가 아무리 그의 귀에 대고 말해 봤자, 이간질하는 사람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환상은 스스로 깨는 것이다.
그리고 우린 그 시간 동안 기다려 주는 것이 최선이다.
나는 씩 웃으며, 그의 어깨를 토닥이고 등을 돌렸다.
“이사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등 뒤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려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 * *
“이사님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그리고 이거 잘 먹겠습니다.”
이예나는 내가 부천에서 사 온 단팥빵 상자를 가슴에 품고 고개를 숙였다.
“그래. 조심히 들어가.”
“네. 너무 늦게까지 하지 마시고 들어가세요.”
“그래.”
그녀가 밖으로 나가는 순간, 열린 문틈 사이로 최충연 팀장과 마성근 팀장이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이사님! 저희 한잔하러 가는데 같이 안 가시겠습니까?”
“뭐 드시는데요?”
“장어 먹으러 갑니다. 짠돌이 마 팀장님이 무슨 생각인지 오늘 쏘겠다고 하네요. 하핫.”
“그래요?”
“네. 이사님이 인생의 롤모델이라나 뭐라나. 하하하“
“롤모델이요?”
내가 되묻자, 마성근 팀장은 고개를 들이밀며 크게 말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사님은 꼭 대접하고 싶었습니다. 차로 한 10분만 가면 장어집이 있는데 거기 굉장히 실합니다.”
“음……. 그럼 처음으로 마 팀장님이 사주는 장어 좀 얻어먹어 볼까요?”
“빨리 오세요. 빨리요!”
마성근 팀장이 빨리 오라고 손짓했다.
나는 씩 웃고, 옷걸이에 걸린 외투를 걸치고 책상 위의 휴대전화를 들었다.
그때 걸려 온 이해용 대표의 전화.
잠시 망설이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이사님. 이사님!
혀가 꼬부라진 목소리.
술 냄새가 수화기를 넘어오는 것 같았다.
“무슨 일 있어요?”
- 왜 거짓말을 하신 겁니까?
최두영 본부장을 만났구나.
나는 외투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차분한 어조로 답했다.
“만나셨군요.”
- 저 실망할까 봐 그러신 겁니까?
“네.”
- 어떻게……. 어떻게 기억도 못 합니까? 난 그 사람 말 한마디에 그렇게 1년을 보냈는데……. 그래요. 저는 워낙 등신 같은 놈이니까 그렇다고 칩시다. 근데 제 직원들은 뭐가 됩니까? 그 사람 말 믿고 기다려 준 직원들은 뭐가 되냐고요! 이사님……. 저 자신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허상만 쫓아다닌 등신 같은 놈이 뭘 하겠습니까…….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하는 이해용 대표.
그의 마음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지만, 대충은 알 것 같았다.
나도 그랬으니까.
롤모델이었던 최구열 이사에게 실망한 그날 나도 그랬으니까.
“그래서 뭐가 달라집니까?”
- 네?
“투비의 직원들은 최두영 본부장의 말 한마디에 1년을 버틴 것이 아니라, 대표님의 의지에 1년을 버틴 겁니다. 자신을 믿으세요. 대표님은 충분히 누군가의 롤모델이 될 수 있는 사람입니다.”
- 이사님…….
“내일 오전에 다시 뵙겠습니다. 내일은 꼭 계약을 마무리 짓도록 하죠.”
누군가의 롤모델이 된다는 것은 힘들다.
그들이 실망하지 않도록 항상 노력해야 하니까.
나도 그래 왔다.
다른 직원들이 실망하지 않도록 매사에 신중하게 선택하고 판단했다.
이제 이해용 대표도 그럴 것이다.
자신을 롤모델로 삼는 직원들을 위해 더 신중하게 움직일 것이다.
전화를 끊고, 테이블에 내려 둔 옷을 다시 움켜잡았다.
“이사님 멀었어요?”
마성근 팀장이 앞으로 다가와 내 팔을 잡아당겼다.
나는 씩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가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