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163화>
164. 이번엔 우리 직원들을 믿어 보시죠
이사회.
“대표님! 증자는 이사회에서 결정할 수 있습니다!”
“이건 우리사주 발행 건입니다. 주총에서 결정하는 것이 맞습니다.”
“아니요. 이사회 특별 결의로도 충분히 결정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직원들에게 책임을 떠넘기자는 말입니까?”
“이건 책임이 아니고 기회입니다!”
“제 눈에는 그냥 무책임한 회사가 책임을 떠넘기는 거로 보이는데요?”
김지영 대표와 최구열 이사가 첨예한 대립을 보였다.
빠르게 이사회에서 결정하자는 최구열 이사와 달리, 김지영 대표는 신중하게 선택을 하자는 입장이었다.
“다른 이사님들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김지영 대표의 질문에 유화성 이사가 고개를 저었다.
“저도 최구열 이사님의 뜻에 동의합니다. 주총까지 가면 늦을 수도 있습니다.”
“유 이사님!”
“대표님. 우리 식구들을 믿어 보시죠.”
“만약 직원들이 우리사주를 매입하지 않으면, 이게 무슨 망신입니까? 그리고 주주들이 그런 우리를 믿어 줄까요? 직원들의 마음을 사지 못한 회사를 믿어 줄까요?”
맞다.
그녀의 말처럼 우리사주 구매율이 낮으면 대외적으로 망신과 주주들의 반감이 커질 수도 있다. 나도 이를 우려했었기에 단번에 찬성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믿어야 한다.
우리 직원들을 믿는 것이 최선이다.
또한, 이 안건이 주총까지 넘어가면 김선녀 여사가 대처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 주는 꼴이 될 수도 있다. 이왕 밀어붙이려면 하루라도 빨리 결정하고 직원들에게 시간을 주는 것이 더 낫다.
“원 이사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나를 부르는 김지영 대표.
그녀는 자신의 의견에 찬성해 달라는 눈빛을 보내왔다.
하지만.
“저도 이사회에서 결정하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주총까지 가면 김선녀 여사에게 시간을 벌어 줄 뿐입니다.”
“……!”
김지영 대표의 얼굴에 스친 실망감.
지금은 이를 넘어서 그녀를 설득해야 한다.
“물론 대표님이 걱정하시는 것처럼 우리 직원들의 구매율이 기대에 못 미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공했을 때를 생각했으면 합니다.”
“…….”
김지영 대표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고, 깍지를 낀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그렇게 테이블에서 들려온 기억.
<만약 우리사주 구매율이 높지 못하면?>
<위기를 직원들에게 떠넘기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어.>
<지훈이는 직원들이 가장 믿는 사람이야.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뭔가 근거가 있는 거야.>
<아니야. 그래도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예측할 수 없는 거잖아.>
<지훈이까지 찬성하는데…….>
김지영 대표는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경우의 수를 나열했다.
나는 물끄러미 그녀를 보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도 얼마 전까지는 대표님처럼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지난 며칠간 많은 사람을 만나고 통화하면서 확신했습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믿음을 줬고, 그 믿음이 지금 돌아올 것이라는 확신을 했습니다. 하물며, 직원들은 우리와 가장 가까이에서 가치관을 공유하는 사람들입니다.”
“…….”
“대표님 이번엔 우리 직원들을 믿어 보시죠.”
김지영 대표는 고개를 들고 이사들을 번갈아 봤다.
그리고 결심했는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죠. 이후에 주총에서 이 점이 문제가 된다면 제가 모두 책임지겠습니다. 최구열 이사님!”
“네!”
“공고 올리고 빠르게 모집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유화성 이사님은 계속해서 기관들을 설득해 주세요.”
“네.”
“원 이사님은 제조사와 벤더들이 흔들리지 않도록 해 주세요. 추매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매도하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저는 BO푸드에서 추가 자본이 들어올 수 없는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김지영 대표는 말을 마치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몇 시간 후.
최구열 이사는 빠르게 우리사주 추가 매입에 대한 공고를 올렸다.
그리고 시끌시끌한 소리가 내 방까지 들렸다.
나는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사님! 이번에 진짜 10% 지원해 주는 겁니까?”
엘리베이터로 향해 걷는 내 옆으로 마성근 팀장이 빠르게 다가왔다.
“네.”
“금액은 제한이 없고요?”
“네. 없습니다.”
“오호. 이거 대박이네요. 안 그래도 언제 더 살까 눈치 보고 있었는데.”
환하게 웃는 마성근 팀장.
그리고 빠르게 내 옆으로 달려온 최충연 팀장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마 팀장님도 그러셨어요?”
“그럼요. 우린 알잖아요. 마프가 어떤 회사인지. 최 팀장은 얼마나 추매할 겁니까?”
“한, 3억쯤?”
“와 돈도 많네.”
“제 돈이 아니고, 우리 아버지 돈이에요.”
“아……. 최 팀장님 있는 집 자식이었나 보네?”
“아니요. 이번에 아버지 퇴직금을 넣는 겁니다. 대충 계산해 보니까 배당이 어설픈 연금 저축보다 더 좋을 것 같아서요.”
나는 걸음을 멈춰 서서 둘을 바라봤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맙습니다.”
“뭐가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는 최충연 팀장.
나는 최충연 팀장과 마성근 팀장의 어깨를 감싸며 엘리베이터 앞으로 걸어갔다.
“꼭 후회하지 않게 해 드릴게요.”
“이사님 뭔가 착각하시나 본데요. 우리 아버지는 저 보고 투자하시는 겁니다. 저같이 잘난 놈이 평생 다닐 회사라고 하니까 믿고 투자하시는 겁니다.”
“맞아요. 저도 절 믿고 투자하는 겁니다.”
그래. 맞다.
우린 우리 자신을 믿는다.
우리가 함께할 회사, 평생 같이할 회사.
우린 그런 회사에 근무한다.
“그럼 저는 안 믿어요? 이거 섭섭한데?”
“조금. 아주 조금 믿습니다. 하하.”
내가 걱정하지 않도록 말하는 마성근 팀장.
나는 그의 어깨를 툭툭 치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1층 버튼을 누르자 들려오는 수많은 직원의 기억.
<5천 정도는 넣어 봐야겠다.>
<10%나 지원해 주면 이거 무조건 남는 장사 아니야?>
<마누라 몰래 한 3천만 넣어 봐야겠다.>
<채종이 자식, 이번에 부동산으로 돈 좀 벌었다고 했지? 같이 넣어 보자고 해야겠다.>
<아마존 2차 기획전 연다면서? 역시 최 이사님이야.>
<원 이사님 콜라보 대박 쳤다던데.>
<이러다 BO커머스 시총이 푸드 넘어서겠네. 하하하>
욕망이 증식되는 것처럼, 믿음도 번져 간다.
회사에 대한 믿음.
자신에 대한 믿음.
그리고 동료에 대한 믿음.
그 믿음들이 번져서 우린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낼 것이다.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때,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1층에 있던 이정우 이사가 시야에 들어왔다.
“요! 원지훈이! 아니지. 원지훈 이사님!”
“이사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
“최 이사님한테 전화 받고 달려왔지. 이번에 우리사주 더 내놓는다면서?”
“네. 그렇게 됐네요.”
“사외 이사도 가능한 거지?”
“그럴걸요?”
내가 건물 밖으로 걸어가자, 이정우 이사는 내 옆을 따라오며 말을 이었다.
“지훈아. 곰 꿈들이 방송 나간 거 봤지?”
곰 꿈틀이는 독일의 유명 브랜드 젤리와 국내 제품을 콜라보한 제품이다.
김경일 팀장이 직접 독일까지 날아가서 독일 본사를 설득했고, 국내에서는 마성근 팀장이 마무리를 지었다.
또한, 이 제품을 홍보한 매체는 유튜브로 이정우 이사가 담당했었다.
“네. 봤어요. 누구더라……. 그 빨간 옷 입고 나오는 친구 있잖아요.”
“레드폭스!”
“아. 네 그 친구 진짜 잘하던데요? 저도 당장 사 먹고 싶어지던데요?”
“하하하 맞아. 나도 방송 보면서 침 질질 흘렸어.”
“네. 좋았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오데요 안에 인절미 같은 거 넣어 보는 건 어때?”
“인절미요?”
“응. 덕산에서 이번에 새롭게 찍어 낸 인절미 스낵 괜찮더라. 그거랑 섞으면 반응이 좀 올라올 거 같은데?”
얼마 전에 신제품을 발표한 덕산.
이번에 만든 스낵의 이름은 리얼 인절미였다.
아직 반응이 미지근해, 추가 마케팅을 고민 중이었는데…….
이거 꽤 괜찮은 생각 같다.
스테디셀러인 오데요와 함께한다면 자연스럽게 리얼 인절미도 홍보가 될 수 있다.
“좋은데요? 이사님 아이디예요?”
“아니. 레드폭스, 그 친구 아이디어야.”
“그럼 그렇지.”
“야! 원지훈이 너 나 무시하냐? 방송 컨셉이나 홍보 문구는 내가 다 짠 거야!”
“알았어요. 알았어.”
나는 그의 등을 쓰다듬고 씩 웃었다.
* * *
마장동 청년 고기 대표이사실.
안으로 들어서자, 자리에 앉아 있던 고재익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숙이고, 한쪽 팔을 벌려 소파를 가리켰다.
“오셨습니까?”
“잘 지내셨죠?”
“네.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근데 갑자기 무슨 일입니까?”
나는 사무실을 훑어보며, 옅은 미소와 함께 답했다.
“이번에 좋은 거 들어왔다면서요? 전에 맛보러 오라고 하셨잖아요.”
내 답에, 고재익 대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주식 때문은 아니고요?”
“눈치채셨습니까?”
“네. 이사님 얼굴만 봐도 압니다. 그나저나 무슨 문제 있나요? 어제, 오늘 한 10% 정도 빠졌던 거 같던데.”
“사실은 상장 전부터 주식을 가지고 있던 대주주가 매도하는 상황입니다.”
“그렇군요.”
고재익 대표는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말을 이어 갔다.
“한참 주가가 오를 수 있는 시기에 오히려 힘을 빼다니……. 그런 대주주였다면 차라리 없는 편이 더 좋겠죠. 그럼 이번에도 주저하지 말고 더 들어가 봐야겠네요. 마프가 유망한 종목이라는 건 우리 직원들도 전부 다 아는 사실이니까.”
“네. 저희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마프와 우리에게는 저가에 매입할 수 있는 기회네요.”
고재익 대표는 말을 마치고 씩 웃어 보였다.
“고맙습니다.”
“고맙긴 뭘요. 기억 안 나세요? 이사님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겁니다.”
“…….”
“이번에 새로 들어온 채끝이 상태가 좋아서 따로 빼놓으라고 했습니다.”
“그럼 맛 좀 볼까요?”
고재익 대표는 고개를 끄덕이고 인터폰에 대고 고기를 가져오라는 말을 했다.
잠시 후, 직원 둘이 고기 한 팩과 버너, 불판이 가져와 세팅하기 시작했다.
고재익 대표는 그런 직원들을 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구석에 있는 냉장고로 걸어갔다. 그리고 나를 보며 소주를 마시는 시늉을 하며 물었다.
“소주 괜찮으시죠?”
“네. 훌륭한 안주에 소주가 빠지면 안 되겠죠.”
“역시 원 이사님은 나랑 잘 통한다니까.”
그때, 테이블 위의 고재익 대표 휴대전화가 울렸다.
그는 소주를 내려놓고, 뒤로 돌아 전화를 받았다. 그렇게 잠깐 통화를 한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김 이사님은 참 먹을 복이 많은 분 같네요.”
“김 이사님이요?”
“김재열 이사님이요. 오늘 좋은 물건 들어온 건 어떻게 아시고 지금 바로 오신다네요. 괜찮죠?”
“네. 저야 좋죠.”
처음에는 혼자서 어떻게든 막아 보려 했다.
4천억이라는 돈을 구하기 위해 별의별 생각을 다해 봤다.
그리고 이제는 알았다.
혼자가 아니었다는 것을.
나와 함께 성장해 온 제조사와 벤더들.
같은 생각을 해 온 우리 직원들.
이들이 모이면 더 큰 시너지를 낼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결과물이 눈앞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