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159화>
160. 재미있을 것 같아서
이른 아침.
출근을 마친 나는 책상 위에 올려진 서류를 확인했다.
고동수 부장을 포함한 7명.
근로 계약서에 사인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름과 이유가 명시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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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동수 부장 – 연봉 인상 요구, 재협상 불가.
김민석 과장 – 연봉 인상 요구, 이직 희망.
오정민 대리 – 이직 희망.
김도준 대리 – 연봉 인상 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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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장 이상은 오직 고동수 부장뿐.
다행히 흔들리던 김명진 부장의 이름은 없었다.
나는 짧은 한숨을 내쉬고, 인터폰 버튼을 눌렀다.
“예나 씨. 여기 명단에 있는 7명, 한 명씩 내 방으로 좀 불러 주세요.”
- 예, 알겠습니다.
잠시 후.
내 방으로 들어온 신선식품 팀의 김민석 과장이 고개를 숙였다.
“앉아요.”
“네.”
“차 한 잔 줄까요?”
“괜찮습니다. 오전에 커피 마셨습니다.”
“저는 한 잔 마셔야겠네요.”
내가 커피를 내리고 자리에 앉자, 그는 조심스럽게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침묵이 이어지고.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김민석 과장이 먼저 입을 뗐다.
“저…….”
“네. 말씀하세요.”
“죄송합니다.”
“뭐가요?”
“그냥……. 전부 다요. 잘해 주셨는데…….”
끝말을 흐리는 김민석 과장.
나는 그와 함께하는 테이블에서 기억을 훑었다.
<차 부장님 부탁인데…….>
<나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도와 드려야지.>
사람의 관계는 상대적이다.
누군가에게 한없이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철천지원수 같은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에게 차주영 부장이 그런 사람이었다면, 나도 어쩔 수 없다.
“아니요. 민석 과장님의 선택이 옳을 겁니다.”
“네?”
“저랑은 좋지 못한 인연이지만, 민석 과장님한테는 고마운 분일 수도 있으니까요.”
“이해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나는 그를 잡을 수 없음을 알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민석 과장은 그런 나를 물끄러미 보다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 * *
오후 3시.
마지막으로 뻣뻣이 고개를 치켜든 고동수 부장이 내 방으로 들어왔다.
“부르셨다고요?”
“네. 부장님. 차 한 잔 드릴까요?”
“아니요. 그냥 빨리 끝내죠.”
이미 마음이 떠난 그였다.
그리고 나는 그의 떠난 마음이 무척 고마웠다.
“네. 그래요. 지금 부장님을 뵙자고 한 것은 마지막으로…….”
“아니요. 괜찮습니다. 이미 정리 끝냈습니다.”
그는 내 말을 끊고 주머니에 있던 작은 봉투를 꺼내 내밀었다.
“뭔가요?”
“사직서입니다. 가능하면 빨리 처리되길 바랍니다.”
“네. 그래요.”
“그리고 일전에 구매한 우리 사주는 제 주식 계좌로 유가 증권 대체해 주세요.”
“네. 그러죠. 그리고 또 다른 건 없나요?”
보통의 회사들은 퇴사 시 우리 사주를 반환하고 나가도록 한다.
하지만 나는 그와 말을 섞기가 싫어 이를 수락해 줬다.
“네. 없습니다.”
“그래요. 그럼 이건 제가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시원하다. 시원해.>
<이젠 최구열이도 안녕이구나. 잘 있어라.>
회의 테이블에서 들려온 그의 기억.
나는 씩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고동수 부장은 마지못해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근로 계약서에 사인하지 않은 일곱 명을 차례로 만났다.
그들 모두 바론에서 새롭게 오픈하는 커머스로 가는 것을 알았지만, 나는 그들을 잡지 않았다.
모두가 저마다 사연이 있었고,
그 사연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목을 좌우로 돌리고 긴 한숨을 내쉴 때, 테이블 위에 올려 둔 휴대 전화의 진동이 울렸다.
“네. 이사님.”
- 지훈아. 오늘 약속 없지? 나랑 같이 가자.
김재열 사외 이사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 너 문자 못 받았어?
“무슨 문자요?”
나는 전화기를 귀에서 떼고 수신한 문자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렇게 여러 메시지 중 찾은 부고 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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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강중영 회장님께서
2020년 O 월 O 일 OO 시 OO 분에 별세하셨기에 삼가 알려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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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론의 강중영 회장.
02로 시작하는 그들 회사 대표번 호로 온 부고 문자다.
나는 문자를 확인하고 다시 김재열 이사에게 말했다.
“강 회장님이요?”
- 그래. 너도 받았구나.
얼마 전까지 언론과 인터뷰를 했던 그였다.
건강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것으로 보였는데…….
“사인이 뭔가요?”
- 몰라. 아직 알려진 게 없어. 그래서 그런지 인터넷에 완전 난리다. 한번 봐 봐.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인터넷을 확인했다.
비자금 수사망이 좁혀 오자 자살을 했다는 설.
형제들과 경영권 경쟁을 하다 아들이 유리하도록 자살을 했다는 설.
대북 사업을 준비하던 차에 암살을 당했다는 설 등등.
재계 서열 15위인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말도 안 되는 추측들이 실시간 검색어의 상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게 차례로 기사를 확인하는 사이,
내 방의 문이 열리고, 검은 정장을 입은 김지영 대표가 빠른 걸음으로 들어왔다.
“지훈아. 부고 문자 받았어?”
“어…….”
“너도 갈 거지?”
“가야지.”
“그래. 난 지금 아버지랑 가 봐야 할 것 같아. 끝나고 전화할게.”
뭐가 그렇게 분주한지.
그녀는 내게 손을 흔들고 빠르게 밖으로 나갔다.
* * *
강중영 회장의 장례식장.
병원으로 들어가는 입구부터 차가 줄지어 서 있었다.
차를 가져오지 않은 나는 입구에서 김재열 사외 이사를 만나 병원의 정문을 지나쳤다. 한쪽으로 빨간 줄이 처져 있었고, 그곳의 기자들은 분주하게 플래시를 누르며 정·재계의 인사들을 담았다.
이곳이 장례식장인지 시사회장인지…….
그들의 취재 열기가 절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였다.
“마켓 프레시 원지훈 이사님이시죠?”
빨간 줄 밖에 있던 기자 중 한 명이 소리쳤다.
그러자 연이어 터지는 플래시.
나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그렇게 안으로 들어서자, 경제지에서 종종 봤던 인물들이 심심치 않게 보였다. 김재열 이사는 넥타이를 고쳐 매고, 안에 있는 한 남자에게 고개를 숙였다.
“전무 이사님!”
30대로 보이는 남자.
다소 헝클어진 머리에 빳빳하게 다려진 검은 슈트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팔에 찬 완장에는 고인의 아들임을 명시하는 두 줄이 선명히 그어져 있었다,
그는 테가 없는 안경을 만지작거리다가 김재열 이사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얼마나 상심이 크십니까.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김재열 이사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남자.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차갑고 도도했으며 사람을 훑어보는 것이 섬뜩할 정도였다.
김재열 이사는 뭐 그렇게 쩔쩔매는지…….
돈이라도 빌렸나?
평소와 전혀 다른 그의 모습에 이상한 생각마저 들었다.
내가 멍하니 남자를 응시하자, 김재열 이사는 나에게 빨리 가자는 손짓을 했다. 그렇게 우린 화장실 근처로 자리를 옮겼고 나는 궁금한 마음에 입을 열었다.
“누구예요?”
“강석호 전무. 강 회장님 둘째 아들.”
“근데 뭘 그렇게 쩔쩔매요?”
내가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장례식장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김재열 사외 이사가 내 어깨를 잡아끌었다.
“잘 봐 둬. 저 사람이 바론의 차기 회장이 될 사람이니까.”
“차남이요?”
“응. 그리고 바론에서 준비하는 커머스도 저 사람이 총괄하게 될 거야.”
“…….”
저 사람이구나.
차주영 부장을 앞장세워서 내 사람들을 데려간 사람이.
내가 멀리 서 있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김재열 이사는 내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무서운 사람이야. 자기 신분 속이고 바론에 공채로 입사해서 팀장까지 고속 승진했다고 하더라고. 그리고 후계자인 자기 형까지 아주 쉽게 쳐 냈다지. 아마.”
“그래요?”
“응. 너도 인터넷에서 강 회장님이 경영권 분쟁으로 자살했을 거라는 기사 봤지?”
“네.”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강 회장님 동생들이 주주들 끌어모으려고 했는데, 강 전무가 사전에 다 막아 버렸거든.”
“그럼 왜 돌아가신 건데요?”
“글쎄. 나도 모르지. 하여간 저 사람 잘 봐 둬, 앞으로 자주 만나게 될 수 있으니까.”
김재열 이사는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이제 들어가자는 신호를 했다.
그렇게 조문을 마치고 식당으로 들어서자,
조금 전에 봤던 강석호 전무가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김재열 이사에게 고개를 살짝 숙이고 옆에 앉아 나를 마주했다.
“원지훈 이사님이시죠?”
“네.”
“강석호입니다. 좀 전에는 몰라봐서 죄송합니다.”
차갑고 딱딱한 말투.
존칭을 썼는데, 이상하게 아랫사람을 대하는 것 같은 말투다.
“아닙니다.”
“소문은 들어서 아시죠?”
“바론에서 커머스를 준비하는 것 말인가요?”
“네.”
“덕분에 저희 식구들 일곱이나 그만두게 됐네요.”
내 비꼬는 말투에, 강석호 전무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가 본의 아니게 피해를 드렸군요. 아 참, 차 부장이 원 이사님께도 제안을 드렸다고 들었습니다.”
“네. 아주 형편없는 제안이더군요.”
“죄송합니다. 조건이 만족스럽지 못하셨다면 저에게 말씀해 주세요. 그럼 적극적으로 반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 조건이 좀 셀 텐데……. 가능하시겠어요?”
“일단 들어 보죠.”
“바론에서 핫딜을 인수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현재 커머스 매출 순위 1위인 핫딜.
아직 상장하지 않아 정확히 비교는 어렵지만, 결코 바론보다 작은 회사가 아니다.
내 황당한 요구에 강석호 전무는 입을 가리고 조용히 웃었다.
“닮았네요.”
“뭐가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재열 이사는 재빨리 일어나 그에게 허리를 굽혔고, 나는 앉은 채로 그가 나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리고 그때,
“오빠! 언제 왔어?”
검은 정장을 입은 이현아 대표가 방긋 웃으며 내 옆으로 다가왔다.
김선녀 여사의 손녀딸인 그녀는 BO푸드의 경영권 승계가 끝난 이후로 처음 보는 것이었다.
“아……. 현아 대표.”
“저 인간이랑 친해?”
그녀는 미간을 구기며 밖으로 나가고 있는 강석호 대표를 가리켰다.
“아니. 오늘 처음 봤어.”
“흠……. 저 인간 보통 아니야.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사람이야.”
“그래?”
“바론 주총에서 할머니가 저 인간 편들어 줬는데, 바로 할머니 뒤통수를 쳤다고 하더라고.”
“뒤통수?”
“응. 나도 자세한 건 몰라. 그냥 할머니가 상종하지 말라는 말만 했어.”
김선녀 여사와도 등을 졌구나.
어떤 사람일까?
왜 다들 조심하라고만 하는 걸까?
그리고 닮았다는 것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내가 멍하니 있자, 이현아 대표는 맞은편 자리에 있는 방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뭐 이렇게 딱딱해? 오빠 나 저기 방석 좀 집어 줘.”
나는 테이블 밑으로 손을 넣어 강석호 전무가 앉았던 방석을 움켜잡았다.
그때 들려오는 그의 기억.
<멍청한 놈. 김명진이랑 똑같은 말을 지껄이는구나.>
<결국,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놈들인가? 이거 생각보다 쉽겠군.>
<차주영이는 왜 난리인 거야? 이런 놈이 뭐가 잘났다고.>
닮았다는 사람은 김명진 부장이었구나.
내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현아 대표는 그런 나를 물끄러미 보다 오른손으로 잡은 방석을 가로채 갔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방석 두 개를 겹쳐 앉고 음식들을 집어 먹기 시작했다.
“근데 저 인간 커머스 준비한다고 하던데. 오빠 알지?”
“응, 들었어.”
“그럼 디몰 얘기도 들었어?”
디몰은 온라인 커머스 4위로 패션이 메인인 커머스다.
“디몰?”
“거기 인수하려고 준비하고 있어.”
“……!”
“응. 그게 지름길이잖아. 디몰 직원들 전부 받고, 각 커머스들의 직원들 끌어모으고 있을 거야. 마프 직원들도 여럿 그만뒀지?”
“아니 조금.”
“잘 막았네. 핫딜은 서른 명 이상 그만뒀다던데. 거기 최두영 본부장 알지? 왜, 안경 큰 거 끼고 머리 2대8 하고 다니는 아저씨.”
핫딜의 MD 사업부 본부장 최두영.
최구열 이사처럼 이 바닥에서 꽤 소문이 난 인물이다.
“응.”
“그 아저씨도 바론으로 넘어갔어.”
디몰, 그리고 핫딜의 최두영 본부장까지.
이거 생각보다 큰 바람이 불겠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씩 웃었다.
“뭐야. 이게 웃겨?”
“응. 재미있을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