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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듣는 회사원-158화 (158/223)

<기억을 듣는 회사원 158화>

159. 이사님은 열등감을 느껴 보신 적이 있으세요?

넘을 수 있을까?

그를 처음 봤을 때 했던 생각이다.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과연 난 산처럼 거대한 그를 넘어설 수 있을까?

연봉 협상 마지막 날.

40% 인상된 근로 계약서를 내려다보며 잠시 고민했다.

“명진 부장!”

아까부터 친한 척을 하던 고동수가 옆으로 달라붙어 말을 이었다.

“어떻게 할 거야?”

“…….”

“차주영이 말 들었잖아. 너랑 내 손으로 하나씩 쌓아 가는 거야. 어때? 설레지 않아? 우리 나름 손발이 잘 맞았잖아.”

개뿔. 손발이 잘 맞기는…….

고동수는 매번 내 발목을 잡았던 사람이다.

“…….”

“그리고 너도 그 원지훈이 까부는 거 마음에 안 들었잖아.”

“그런 적 없습니다.”

“야! 명진아, 잘 생각해 봐. 김상만은 BO 푸드도 제 아들에게 넘겼어. 그리고 커머스도 김지영이에게 넘기려 하겠지. 아니다. 원지훈이 그 자식이 사위가 되면 원지훈이 손에 넘어갈 수도 있어.”

“…….”

“죽도록 고생만 해 놓고 그놈들한테 다 넘겨 줄래? 우리도 우리 거 챙겨야지. 최구열이는 등신처럼 원지훈이 밑에서 빌빌 기던데. 난 아니야. 나는 절대로 그렇게 못해.”

“그래서 뭐요?”

“바론이잖아. 바론에서 더 많은 자본과 인력으로 시작한다잖아. 이건 기회야. 너나 내 인생에 다시 못 올 기회라고.”

차주영, 고동수라는 이 인간들은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의 뒤에 있는 바론이라는 국내 1위 식품 회사는 너무도 탐이 난다.

그들의 지원이 있다면,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산 같이 높은 원지훈.

그 사람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아무런 말없이 고개를 떨궜다. 그러자 옆에 있던 고동수가 뱀 같은 혓바닥을 다시 놀리기 시작했다.

“난 너 같은 놈을 잘 알아. 겉으로는 하하, 호호, 하지만, 속으로는 그놈에 대한 열등감에 잠도 제대로 못 잤을 거야. 내 말이 틀려?”

솔직히 모두 아니라고 부정할 수는 없다.

나보다 잘난 그에게 열등감을 느껴 왔던 것은 사실이니까.

“그만하시죠.”

“잘 생각해 봐. 그리고 오늘 아니면 다시는 이런 꿈을 꿀 수도 없을 테니까.”

고동수는 내 어깨를 툭 치고,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그의 그런 표정이 보기 싫어 한 손으로 그를 밀어내고 내 자리로 향했다.

지이잉! 지이잉!

책상 위에 올려 둔 휴대전화가 울렸다.

처음 보는 번호에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김명진입니다.”

- 잠깐 시간 좀 내줄 수 있을까요?

차주영 부장의 목소리.

저번에 만나서 번호를 저장해 놨는데, 지금 이 번호는 처음 보는 번호다.

“업무 시간입니다.”

- 1시간 후 점심인데. 어때요? 그때는 괜찮겠죠?

“…….”

- 길 건너편 일식집에 있겠습니다. 그곳에서 뵙죠.

* * *

점심시간.

일식집 점원은 나를 알아보고 가장 구석의 방으로 안내했다.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자, 안에는 차주영과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차주영은 나를 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윗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내 상의를 받아 옷걸이에 걸어 줬다.

“와, 줘서 고마워요.”

극진히 나를 대하는 차주영과 달리 남자는 자리에 앉아 정면만 응시했다.

먼지 한 톨 붙지 않은 셔츠와 칼같이 다려진 바지.

얇은 입술과 한 번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을 것 같은 빳빳한 자세.

테가 없는 안경은 날카로운 그의 이미지를 더해 줬다.

내가 맞은편에 앉자, 그는 무거워 보이는 입을 천천히 열었다.

“강석호입니다.”

강석호.

들어 본 적이 있다.

바론의 강중영 회장의 차남.

현 바론의 전무 이사.

식품회사의 말단 직원에서부터 차근히 올라온 신화 같은 인물로 차기 바론의 회장직을 이어 갈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김명진입니다.”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내민 내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날카로운 그의 시선에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이런 중압감은 처음이다.

원지훈 이사가 친근하고 포근한 느낌이라면, 강석호라는 인물은 칼 같은 냉정함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나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내밀었던 손을 테이블 밑으로 내렸다.

“이거 처음부터 상당히 무안하네요.”

내 말을 들은 강석호는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식사하시죠.”

“네네. 많이 들어요.”

차주영은 강석호의 옆에 바짝 달라붙어, 내게 빨리 먹으라는 손짓을 했다.

마치 황제의 옆에서 시중을 드는 내시처럼.

나는 그들을 번갈아 보며, 천천히 숟가락을 들었다.

“강 전무님. 얼마 전에 인터뷰하신 기사 잘 봤습니다. 이번에 아이들 복지 재단에 바론 제품을 꽤 많이 기부하셨던데, 참 좋은 일하셨습니다.”

“…….”

“근데 전무님. 레토르트들 제대로 생산하신 거 맞죠? 막 다른 양아치 놈들처럼 유통기한 두 달 남은 거 그냥 때려 넣고 세금 환급받으려 하셨던 거 아니죠?”

내 비꼬는 말에도 강석호는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침착해진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젓가락으로 전복을 하나 들어 올려, 내 앞 접시에 내려놓으며 답했다.

“부장님. 이 음식들도 유통기한이 있는 겁니다. 오늘이 지나면 영영 드실 수 없을 테니 사양 말고 드세요.”

난 사람을 참 많이 만나왔다.

하지만 강석호와 같은 사람은 처음이다.

표정의 변화가 거의 없고, 말투도 짧고 간결해 도저히 생각을 읽을 수가 없다.

또한, 말투에서 뿜어져 나오는 중압감.

주변의 공기가 차게 느껴지고, 온몸의 털이 바짝 서는 것 같았다.

“그럼 유통 기한이 지나기 전에 일단 먹겠습니다.”

“네. 그러셔야죠.”

“그나저나 전무님. 얼마나 투자하실 생각이십니까?”

“…….”

“그냥 바론 이름 걸고 해 봐야지 하는 거면 절대 BO를 이길 수 없을 겁니다. BO는 밑바닥부터 착실하게 다져 왔습니다. 물류 센터 먼저 마련하고 좋은 제품들 싼값에 대량 사입해서 쟁여놓은 다음에, 특판 빵빵 때리면서 PB까지 섞어서 팔고……. 아 참, 얼마 전에 콜라보 제품들도 보셨죠? 그 제품들만 무려 70억 이상 판매됐습니다. 그리고 덕산에서 찍어 낸 스낵도 아시죠? 이번에 아마존 기획전에서 빵 터졌던데.”

내 말에 강철 같던 강석호의 눈썹이 파르르 떨려 왔다.

“생각보다 말씀이 많으시군요.”

“그럼요. 원하신다면 더 많은 조언도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식겠습니다.”

“맞아요. 식으면 맛이 없겠죠. 바론은 얼마나 생각합니까?”

강석호 전무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옆에 있는 티슈로 입을 닦고, 안경을 살짝 추어 올리며 말했다.

“얼마면 되겠습니까?”

“말하면 해 주실 수 있습니까?”

“들어 봐야죠.”

“디몰을 통째로 가져다주세요. 그 정도는 해야 해 볼 만할 것 같습니다.”

디몰.

현재 온라인 커머스의 매출 순위 4위.

패션이 메인인 그곳은 얼마 전까지 마켓 프레시보다 앞서 있던 곳이다.

차주영은 내 말을 듣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곧바로 간사한 표정을 지으며 강석호에게 부가설명을 이었다.

“전무님, 디몰은 20대가 메인인 의류 전문 커머스입니다. 현재 식품 쪽은 거의 제로나 가깝습니다.”

“…….”

“김명진 부장은 그걸 노리고 말하는 겁니다. 디몰의 현재 매출에 마켓 프레시만큼의 아니, 그 절반의 매출만 합쳐도 그들을 앞 설 수 있습니다.”

강석호 전무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김명진 부장님은 참 쉽게 가시려 하는군요.”

“아니요. 이렇게 해도 마켓 프레시를 넘어설 확률은 절반입니다.”

“……!”

“역시 힘들겠죠?”

나는 말을 마치고, 다 식어 버린 국물을 한 숟가락 떠먹었다.

그리고 미간을 구기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에이, 벌써 식었네요.”

“…….”

“다 식어 버린 음식은 버려야죠.”

나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옷걸이 앞으로 걸어갔다.

외투를 걸치고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디몰, 그거면 되겠습니까?”

김석호의 나지막한 목소리.

솔직히 수락할 줄 몰랐다.

디몰은 인수하기 위해서는 최소 1조 원 이상이 들어갈 텐데…….

“가능합니까?”

“그것밖에 방법이 없다면 그렇게 해야죠.”

강석호는 뻣뻣하던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나는 그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한 치의 흔들림이 없는 그의 눈빛에서 지금 이 말이 사실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정말인가 보네.”

“…….”

“좋아요. 고민해 보죠. 이따 전화하겠습니다.”

* * *

오후 5시.

한 시간 안에 인사부를 찾아가지 않으면, 나와 회사의 계약은 종료된다.

나는 책상 위 근로 계약서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가장 마지막에 쓰여 있는 내 이름.

그 뒤에 사인할 수 있는 빈칸이 유난히 커 보였다.

“명진 부장. 먹을래?”

잠시 망설이는 사이, 어느새 내 뒤로 다가온 원지훈 이사.

그는 초코파이와 바나나 우유를 내 책상 위에 내려놓고 한쪽 끝에 걸터앉았다.

“…….”

“점심은 뭐 먹었어?”

“아……. 손님이 오셔서.”

“그래? 그럼 좋은 거 먹었겠네.”

“아닙니다. 배고팠는데, 마침 잘됐네요.”

초코파이의 포장을 뜯고 크게 한입 베어 물자, 윈지훈 이사는 바나나 우유에 빨대를 꽂아 밀어 줬다.

“누가 보면 며칠 굶은 줄 알겠다. 천천히 먹어.”

옅은 미소를 짓는 원지훈 이사.

참 좋은 사람이다.

그의 능력을 질투하는 것이 미안할 정도로…….

“저 이사님.”

“응?”

“근로 계약서는…….”

“그게 뭐? 뭔가 하고 싶다면 일단 네 생각만 해. 모두를 만족하게 하는 선택은 없으니까.”

이번에도 내 마음을 알고 있구나.

나는 그의 밝은 표정을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사님은 열등감을 느껴 보신 적이 있으세요?”

“물론 나도 매일 느끼지.”

완벽한 그가 열등감을?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그래요?”

“물류와 배송의 경험은 나보다 마성근 팀장이 더 많아. 그리고 처음에 조금 어리바리하다 생각했던 정진택 차장은 이제 나보다 과일, 채소 생산자들을 쥐락펴락하고, 회사의 여직원들은 나보다 장선영 차장의 리더십을 더 믿을걸? 어디 그뿐이야. 주방 가전을 딱 보면 바로 예상 매출 쏟아 내는 이진성 차장, 제품 성분만 보고 바로 계약서 들이미는 배짱 좋은 최충연 팀장, 냉동 식품 겉면만 봐도 생산일 맞추는 김태하 차장, 깐깐하고 딱 부러지는 김경일 팀장, 어디 가서 절대 안 지는 미친개 박대영 부장까지. 다 나보다 월등하잖아.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을 가진 사람들이니까.”

“…….”

“그리고 너. 김명진……. 사람 구워 삶는 건 나보다 네가 한 수 위잖아.”

“거짓말하지 마세요.”

“거짓말? 내가 왜 거짓말을 해?”

“…….”

나는 원지훈 이사를 잘 안다.

그래서 지금 그의 말에는 한 치의 거짓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남은 초코파이를 한입에 넣고 씩 웃었다.

“하나 더 줄까?”

“아니요. 하나면 충분합니다.”

“그래. 그럴 거 같더라.”

나는 뻑뻑한 초코파이를 목으로 넘기며, 연필꽂이에 꽂혀 있는 펜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근로 계약서의 가장 끝에 사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사부에 좀 다녀오겠습니다.”

“빨리 갔다 와. 인사부 양 부장, 퇴근할 준비하는 것 같으니까.”

씩 웃어 보이는 원지훈 이사.

어리석었구나.

나도 마성근 팀장보다 물류에 대해 모르고, 박대영 부장처럼 싸울 줄도 모르며, 정진택 차장만큼 신선식품을 알지 못한다.

어디 그뿐인가?

마켓 프레시에는 나보다 더 많은 것을 이뤄 온 사람이 널렸다.

어리석었다. 정말 어리석었다.

마켓 프레시를 떠나면 원지훈 이사만 상대하면 될 거로 생각했던 내가 너무도 어리석고 창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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