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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듣는 회사원-157화 (157/223)

<기억을 듣는 회사원 157화>

158. 연봉 협상은 다음 주까지죠?

다소 어두운 조명의 인사부 회의실.

나는 취조실 같은 이곳이 싫었다.

처음 인테리어를 할 때 왜 이런 공간을 만드나 했는데.

이런 용도였나 보다.

연봉 협상의 자리.

하나의 테이블에 나와 인사부의 양미경 부장이 나란히 앉아 있었고, 그 앞으로는 가전 팀의 박호영 팀장이 기대에 가득 찬 눈을 하고 있었다.

<상장도 했는데…….>

<그동안 정말 열심히 했잖아.>

<덕성이네 회사는 상장하고 전 직원 30% 인상해 줬다잖아.>

<당당해지자. 내가 내 권리 요구하는 건데, 뭐!>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박호영 팀장의 기억.

내가 인사부의 서류를 넘겨보는 사이, 양미경 부장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박호영 팀장님 얼마나 원하시나요?”

“30% 인상됐으면 합니다.”

솔직히 주고 싶다.

지난 1년간 열심히 한 것도 알고, 앞으로의 기대가 더 크기도 하다.

하지만 모두의 바람에 맞춰 줄 수는 없다.

냉정하지만 이것이 회사고, 이것이 조직이다.

내가 입을 열려고 하는 순간, 양미경 부장이 먼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박호영 팀장님 30%는 좀 과하지 않아요?”

“열심히했습니다.”

박호영 팀장은 고개를 푹 숙이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자신을 변호했다.

“물론 그랬겠죠. 하지만 마켓 프레시는 타 커머스에 비해 기본급이 높게 시작했잖아요. 그것도 고려해서 계산하셔야죠.”

“그럼 얼마나…….”

“인사부에서 10% 인상안을 제시해 드릴 예정입니다.”

10%와 30%는 차이가 크다.

실망한 표정의 박호영 팀장은 아랫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받아들이겠습니다.”

이미 모든 것을 받아들인 체념의 목소리.

왜 이렇게 쉽게 받아들이는 건가?

지금까지 이렇게 해 왔던 것인가?

이 자리는 말 그대로 연봉을 협상하는 자리.

누군가 일방적으로 제시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회사와 직원의 의견을 협상하는 자리다.

나는 인사부에서 전달받은 서류를 그대로 박호영 팀장에게 보였다.

“뭘 받아들여?”

“네?”

“단어 뜻 몰라? 연봉 협상. 협상의 자리잖아. 회사의 뜻을 받아들이라는 게 아니라 협상을 하자는 거야.”

“……!”

“이건 가전 팀 분기별 매출과 재고 현황, 작년도 상여금, 법인 카드 사용 금액, 타 커머스 평균 연봉, 협약 연봉 인상률, 물가 인상률 등을 산정해서 인사부가 계산한 자료야. 직접 봐.”

“아……. 네.”

박호영 팀장은 두 손으로 종이를 받아 들고 천천히 훑어 내러 갔다.

그리고 한 곳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금년도 기대 매출이 저희 팀에서 제출한 것보다 너무 낮은데요?”

“그래. 그리고 또 없어?”

“글쎄요.”

박호영 팀장은 자료를 살피다, 다시 한 곳을 짚으며 말을 이었다.

“여기요. 재고 수량도 좀 이상해요. 이건 현재 기준인데, 작년도 기준으로 하면 수치가 달라져요.”

“그래. 그걸 이제 찾은 거야?”

“…….”

“협상의 자리야. 당당하게 실적을 인정받으려면 직접 확인해야지.”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해? 당당하게 어깨 펴!”

“네!”

“이거 작년도 재고 수량 아닌 거 확실하지?”

아까부터 눈에 거슬리던 것이다.

연봉 협상은 작년도 기준으로 하는 것이 맞다.

그리고 이는 아마도, 인사부에서 유리하게 하려고 재고 수량을 현재 기준으로 변경했을 확률이 높다.

“네. 확실합니다.”

나는 그의 답을 듣고, 고개를 돌려 양미경 부장에게 물었다.

“들으셨죠? 재고의 기준을 잘못 잡은 거 같습니다.”

“이사님……. 이건 BO 푸드도 이렇게 해 왔습니다.”

“그래서 이게 맞다는 말씀이신가요?”

“그건……. 아니지만.”

“고쳐 주세요. 틀린 건 고치고 가야죠.”

“…….”

잠시 머뭇거리는 양미경 부장.

나는 그녀의 앞으로 서류를 밀어 주며,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수정하는 데 오래 걸릴까요?”

“……아닙니다.”

양미경 부장은 뭔가 결심했는지,

어금니를 꽉 깨물고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박호영 팀장은 그녀가 나간 것을 확인하고 의자를 앞으로 당겨 앉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고맙습니다. 이사님.”

“뭐가?”

“그냥 전부 다요. 이사님이 계셔서 든든하네요. 하핫.”

사실, 처음에는 사업부 직원들의 연봉 협상을 직원들과 인사부에만 맡기려 했었다.

하지만 회사 공용 프린터에서 들려 온 다른 부서원들의 기억에, 인사부가 이번 협상을 사 측에게 최대한 유리하게 끌고 가려 한다는 것을 알고 억지로 들어온 것이다.

물론, 인사부가 잘못했다는 것이 아니다.

이건 서로의 견해 차이일 뿐, 누군가의 잘못은 절대 아니다.

나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박호영 팀장에게 업무 관련 질문을 했다.

“코크 인덕션 설치 외주사는 선정했어?”

“네. 오늘 미팅하기로 했습니다.”

“그래. 첫 발주 건이 얼마나 된다고 했지?”

“2천 대가 우선 들어오는데요. 사전 예약도 좀 있어서 아마 다음 달 초에는 또 발주 넣어야 할 거 같습니다.”

“그래, 좋네.”

그렇게 업무에 관한 얘기를 나누는 사이, 양미경 부장이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고친 서류를 나와 박호영 팀장에게 차례로 내밀며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다시 협상을 해 보죠. 얼마나 인상하면 좋겠습니까?”

“20% 인상은 맞춰 주십시오. 이 정도 요구할 자격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내 뜻을 이해한 박호영 팀장은 당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양미경 부장은 별다른 이견 없이 준비한 근로 계약서에 변경된 연봉 금액을 적어 넣었다. 그리고 박호영 팀장에게 밀어 주며 씩 웃었다.

“여기 사인하시면 끝납니다. 그리고 팀장님 저희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네. 저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사인을 마친, 박호영 팀장은 두 장의 근로 계약서를 그녀에게 건넸다. 그러자 양미경 부장은 환하게 웃으며 한 부를 곱게 접어 작은 편지 봉투에 넣어 줬다.

“감사합니다.”

환하게 웃는 박호영 팀장.

그는 곧바로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편지 봉투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양미경 부장은 그가 나간 것을 확인하고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나에게 말했다.

“이사님. 이건 원래 BO푸드에서부터 이렇게 해 왔었어요.”

“뭐가요?”

“재고 수치요.”

“그래요?”

“네, 저도 부당하다고는 생각했는데, 워낙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것이라…….”

끝이 날카로운 안경을 만지며 답하는 양미경 부장.

50대 초반의 경험이 많은 그녀는 BO푸드에서부터 인사부장으로 근무했었다.

김상만 회장이 김지영 대표에게 힘을 실어 주기 위해 보낸 인물이었고, 언제나 회사의 입장에서 열심히 해 왔다는 것도 잘 안다.

나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부장님 생각이 아니라는 걸요. 그리고 지금 고쳤잖아요.”

“대표님은 수긍하실 거 같은데……. 문제는 회장님이 아시면.”

이렇게 사 측에 유리한 편법을 만든 것은 김상만 회장.

양미경 부장은 그의 반응에 대해 걱정했다.

“부장님 걱정하지 마세요. 그건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네?”

“일단 어제 협상한 직원들 불러서 다 수정해 주세요. 회장님이 뭐라고 하시면 제 핑계를 대 주세요.”

“정말 그래도 될까요?”

“네.”

사원들은 언제나 회사에 자신을 낮춘다.

그래서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뒤에서만 구시렁댈 뿐 나서질 못한다.

그녀도 지금의 방법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냥 용기가 없었을 뿐이다.

나는 씩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은 누구죠?”

“쿠폰 사업팀 도재문 팀장입니다.”

“네. 커피 한 잔만 가지고 올게요.”

양미경 부장은 자리에서 살짝 일어나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 * *

늦은 오후.

회의실로 고동수 부장은 인상을 구기며,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이거 인사부에서 예측한 겁니까?”

하지만 양미경 부장은 전혀 표정의 동요도 없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앉으시죠.”

“나 원 참 어이가 없어서. 인사부 똑바로 일 안 합니까? 우리가 예측한 수치들은 다 빼고 왜 멋대로 이런 수치를 만든 겁니까?”

“작년도 수치를 기준으로 만든 데이터입니다.”

“그러니까 누가요?”

더 목청을 높이는 고동수 부장.

회사원들은 연봉 협상에 자신만의 전략을 쓴다.

박호영 팀장처럼 동정을 유도하는 사람이 있다면, 고동수 부장 먼저 으름장을 놓는 경우도 있다.

나는 이대로 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제가요.”

“헛……. 이사님. 언제부터 계셨나요?”

고동수 부장은 내가 있는 줄 몰랐던 것처럼 행동했다.

어색하다.

좁은 회의실이라 처음 들어오자마자 날 봤을 텐데…….

“처음부터 쭉 있었습니다.”

“이사님……. 이거 무슨 기준으로 뽑은 겁니까? 왜 제가 제출한 목표치 대신해서 이걸로 하신 겁니까?”

“작년과 이번 연도 1분기 기준입니다.”

“그러니까 더 말이 안 되죠! 우리 사업부가…….”

울상의 표정으로 말끝을 흐리는 고동수 부장.

정확한 근거도 없으면서, 일단 들이받고 보는 것이다.

내가 멀뚱멀뚱 아무런 답을 하지 않자, 양미경 부장은 나를 대신해서 입을 열었다.

“우리 인사부에서는 작년과 동결로 결정했습니다.”

“뭐요?”

“작년도 실적도 좋지 못하고, 금년도 예측도 좋지 못합니다. 사실 기본급을 낮추고 상여금을 높일 생각까지 했는데, 원 이사님 덕분에 일단 동결로 결정했습니다.”

“와……. 양 부장님. 정말 이러실 겁니까?”

“…….”

“이사님. 뭐라고 말 좀 해 주세요!”

고동수 부장은 계속해서 내 도움을 요구했다.

그의 연봉은 무려 9,200만 원

작년에 그 정도의 실적을 했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다.

그때, 함께 공유하고 있는 회의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기억.

<최소 1억은 넘어야지. 연봉이 이게 뭐야.>

<원지훈……. 바론이 나한테 얼마 제시했는지 알면 놀라 자빠질걸?>

바론?

차주영 부장이 고동수 부장을 만났나 보구나.

이거 어쩌면 이번 기회에 혹을 뗄 수도 있겠다.

나는 씩 웃으며 그에게 물었다.

“그러면 고 부장님은 얼마나 생각하시나요?”

“못해도 20%는 인상해 주셨으면 합니다.”

“20%요?”

“네! 저 오라는 데 많습니다. 아시잖아요. 바론도 곧 커머스 시작한다는 거요.”

“거긴 20% 이상 준답니까?”

“물론…….”

내 유도 질문에, 답을 할 뻔했던 고동수 부장이 재빨리 입을 닫았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물론, 그렇게 주겠죠.”

“만나셨어요?”

“아……. 아니요! 제가 왜 그쪽을 만납니까?”

재빨리 부정하는 고동수 부장.

하지만 함께 공유하고 있는 이 테이블에서는 그의 속마음이 들려왔다.

<이번 계약서에도 배임에 관한 내용은 빠졌겠지?>

이미 마음이 떠났구나.

나는 의자를 앞으로 당겨 앉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좋아요. 제가 무슨 수를 써서든 10% 인상해 드리죠.”

“정말입니까?”

“네. 정말이죠.”

“이사님!”

가만있던 양미경 부장이 나를 크게 불렀다.

나는 한 손으로 그녀에게 잠시 지켜봐 달라는 신호를 보내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고 부장님. 이번 근로 계약서에는 배임에 관한 내용이 추가됐습니다. 한 마디로 퇴사를 한 후 1년간 동종 업계로 취업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작년도까지는 회사가 어수선해서 언제든 이직하실 수 있도록 빼 놨던 내용이죠.”

“……!”

“이 계약서에 사인하시면 됩니다.”

나는 양미경 부장의 앞에 있던 근로 계약서를 가로챘다. 그리고 그 위에 10% 인상한 금액을 적어 내밀었다.

고동수 부장은 계약서를 물끄러미 보다,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연봉 협상은 다음 주까지죠?”

“네.”

“그럼 조금만 생각해 보고 오겠습니다.”

“네, 그러세요.”

고동수 부장은 배임이 추가된 근로 계약서에 사인을 하는 순간, 1년 이상 타 커머스로 이직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바론은 최소 20% 이상 인상된 연봉을 제시했을 것이다.

대부분 스카웃의 경우 그렇게 하니까.

근로 계약서를 내게 밀어 주는 고동수 부장.

그 안에는 그의 조금 전 기억이 담겨 있었다.

<이번 주 안에 바론이랑 마무리 지어야겠어.>

나는 씩 웃고, 계약서를 양미영 부장에게 밀어 줬다.

덕분에 귀찮은 혹을 하나 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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