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억을 듣는 회사원-156화 (156/223)

<기억을 듣는 회사원 156화>

157. 누룽지 맛이 아주 찐하다고요

“생각보다 길어지네요.”

내 옆에 있던 이진성 차장이 조용히 속삭였다.

최성진이라는 에이마켓의 MD.

그는 10분 내내 단 한 번도 인상을 구기지 않고, 노파에게 오픈마켓을 설명했다.

옆에서 발을 동동 구르던 다른 MD는 인상을 구기고 다른 부스로 가 버렸지만, 그는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오기일까?

아니면 책임감일까?

나는 그에게 다가가려는 이진성 차장을 한쪽 팔로 막았다.

“그냥 두세요.”

“여기서 그냥 지켜만 보자고요?”

“네, 갑자기 궁금해졌어요.”

“뭐가요?”

“저 최성진이라는 사람이요.”

“궁금하니까 불러다가 물어야죠.”

“조금만 이따가요.”

이진성 차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벽에 등을 기댔다.

그렇게 또 10분이 지났다.

조금 전까지 씩씩대던 노파는 온화한 표정으로 최성진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드디어 이해시킨 것일까?

나는 씩 웃으며,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최성진은 자신의 명함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고개를 숙였다.

노파는 고마웠는지, 바구니에 있던 누룽지 사탕을 한 움큼 쥐어 그의 주머니에 넣어 줬다.

“드디어 끝났나 보네요.”

이진성이 앞으로 나가려는 순간, 나는 그를 다시 막아섰다.

“잠시만요.”

“또 왜요?”

“옆 부스로 들어가잖아요.”

알록달록 머랭 쿠키를 가지고 나온 부스.

보통의 MD라면 신경 쓰지 않고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온라인에 비슷한 제품들이 널렸고, 어떤 장점이나 특징도 보이지 않는 곳이니까.

하지만 최성진은 달랐다.

그는 명함을 두 손으로 공손히 건네고, 천천히 설명을 이어 갔다.

“근데 왜 또 저기서 얼쩡거린대요?”

“모르죠. 무슨 생각인지.”

“머랭 쿠키 한물갔잖아요. 그냥 둬요?”

“네. 저기까지만 보죠.”

이진성 차장은 벽에 등을 기댄 채로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하품을 했다.

그때.

“이사님, 차장님!”

박람회를 돌던 김준위가 내 앞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가공식품 팀의 인턴 김준위.

그는 김태하 차장이 가장 아끼는 사원으로 나도 눈여겨보고 있는 친구다. 기발한 아이디어와 제품을 보는 남다른 관점으로 우릴 종종 놀라게 했었다.

“응, 박람회는 얼마나 돌았어?”

“이쪽 부스들만 확인하면 끝납니다.”

벌써?

우리 직원들이 박람회장에 온 지 겨우 1시간이 지났다.

이렇게 많은 제조사와 벤더들을 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인데…….

“이거 끝나고 다른 업무 있어?”

“아니요.”

“근데 뭘 그렇게 급하게 움직여?”

“뻔한 업체들은 다 건너뛰었습니다.”

“뻔한 업체?”

“네. 시장성 없는 제품들이 절반 이상이라서요.”

“시장성이라…….”

나는 조용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김준위는 내 말을 못 들었는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그때.

팔랑!

김준위가 옆구리에 끼고 있던 노트에서 종이 한 장이 바람에 날려 왔다.

허리를 숙여 떨어진 종이를 움켜잡았다.

<성진은 반응이 좋지 못했으니까 패스.>

<데이브는 볼 필요도 없어.>

<50년 전통? 여긴 후가공 비용이 더 들겠는데?>

<곱창 레토르트는 시장성이 떨어져.>

<볶음 김치는 해갓집 제품을 이기기 힘들어.>

종이에서 들려온 수많은 기억.

그의 제품 선별 방법이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번엔 좀 경솔했다.

이들은 자신들 제품이 경쟁력 있다 판단하고, 비싼 부스 임대료까지 내면서 박람회에 나왔다. 그렇기에 제품을 선정하지 않더라도, 그들이 말하는 장점은 꼭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트렌드니까.

나는 종이를 허공에 들어 올려 그를 불렀다.

“김준위!”

내 목소리를 들은 김준위는 뒤로 돌아 빠르게 다가왔다.

“아……. 감사합니다. 큰일 날 뻔했네요.”

“준위야. 입구부터 다시 천천히 보고 올래?”

“네?”

“다시 하나씩, 어떤 선입견도 없이 제품만 보고 오라고.”

“그럼 시간이…….”

“오늘 종일 여기 있어도 돼. 이것도 업무의 연장이니까. 하나하나 꼼꼼히 다시 보고 와.”

나는 말을 마치고, 머뭇거리는 그의 몸을 돌려 입구 쪽으로 떠밀었다.

이에 김준위는 머쓱한 표정으로 입구 쪽을 향해 걸었다.

“준위가 다 좋은데, 성질이 좀 급하죠.”

이진성 차장은 내 의도를 파악하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특히 더 급했네요.”

“그래서 최성진이도 기다리시는 겁니까?”

“네. 궁금해서요. 할머니는 어떻게 설득했으며, 특이점도 없는 머랭 쿠키는 뭘 보고 멈춰 섰는지.”

“그냥 경험이 부족해서 그런 거 아닐까요?”

“그럴까요?”

“요즘 에이마켓은 그냥 수습 MD들 뽑아서 마구 돌리잖아요.”

에이마켓은 최근 그들의 인사시스템을 바꿨다.

기존에는 카테고리별 2~3명의 MD로 빡빡하게 운영했지만, 우리의 추격이 거센 지금은 많은 수습 MD들을 뽑았다.

그렇게 경력이 짧거나, 아무것도 모르는 젊은 친구들이 수습이라는 딱지를 달고 에이마켓의 MD가 됐다.

좋았을 것이다.

누구나 알아주는 대형 커머스의 MD가 됐으니까.

하지만 냉정하게 판단해 보면 그들은 MD가 아니다. 상품이 다양하면 좋은 오픈마켓의 특성에 맞춰 싼값에 뽑힌 영업사원일 뿐이다.

“그래서 더 이상하다는 겁니다.

“네?”

“실적 위주라면 더 조급해야 정상인데, 지금은 너무 차분하잖아요. 심지어 오픈마켓을 이해 못하는 할머니한테까지 그렇게 오랫동안 설명까지 하고. 신기하지 않아요?”

“저놈이 원래 그래요. 아주 똥고집이라니까요.”

“일단 이번만 기다려 보죠.”

그렇게 10분 후.

설명을 다 마친 최성진은 머랭 쿠키 한 상자를 받아 들고 부스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벽에 등을 기대고 있던 이진성 차장이 앞으로 한 걸음 나가 그를 불렀다.

“야! 성진아!”

“어, 팀장님?”

“잘 지냈어?”

“네. 잘 지냈습니다. 팀장님은 어떠세요?”

“나도 잘 지냈지. 그리고 나 팀장 아니고 차장이다.”

“그래요? 마프 가셔서 승진하셨군요. 축하드립니다. 차장님.”

“그래. 너 근데 뭘 그렇게 오래 얘기한 거야? 딱 봐도 별거 없어 보이는데?”

둘이 대화를 하는 도중, 나는 그들의 옆으로 다가가 최성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는 내 얼굴을 보고 화들짝 놀라며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혹시 원지훈 이사님이세요?”

“저를 아세요?”

“물론이죠. 우리 장터, 남해 시금치 편 잘 봤습니다.”

박람회에서 날 알아보는 사람이 제법 있던데…….

TV라는 매체의 힘이 대단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아……. 네.”

“시금치는 금방 팔렸죠? 얼마나 걸렸나요? 일주일? 그리고 그 정도 금액에 사입해도 문제없었나요? 아 참, 내년도 물량도 계약하셨죠?”

뭐 그렇게 궁금한 게 많은지…….

그는 쉬지 않고 질문을 이어 갔다.

이대로 두면 끝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답을 했다.

“시금치는 3일 만에 끝났습니다. 물류 비용이 적어서, 수익이 괜찮았고 내년도 물량도 계약해 둔 상태입니다. 됐죠?”

“아……. 그렇군요.”

“그럼 이제 제가 물어볼게요. 아까 할머니는 어떻게 설득했어요?”

“설득 못했습니다.”

“설득도 못했는데, 왜 그렇게 오래 걸린 거예요?”

“똑같은 일을 당하실까 봐 미리 커머스들에 대해 설명해 드렸습니다.”

그랬구나.

노파가 다시 똑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도왔구나.

나는 씩 웃고 고개를 끄덕였다.

“머랭 쿠키는 뭐가 다르던가요?”

내 질문에, 최성진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고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유기농 밀과 우유, 버터를 사용했다고 해서 확인해 봤습니다.”

“그런 제품들은 이미 많잖아요.”

“제조사의 입장으로 생각해 봤습니다. 그리고 값비싼 비용을 내면서 박람회에 나올 정도라면 경쟁력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거로 생각했습니다.”

요놈 봐라.

어떻게 내 생각과 이렇게 똑같지?

나는 그에게 더 궁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저 머랭 쿠키 제조사만의 경쟁력은 찾았나요?”

“네. 찾았습니다.”

최성진은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경쟁력이냐고 물어도 답하진 않을 거죠?”

“네…….”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죠. 저 머랭 쿠키 에이마켓에 판매해 볼 생각인가요?”

“아니요. 그건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는 에이마켓 소속의 MD.

이제 무슨 질문을 해도 내게 답을 해 주지 않을 것이다.

나는 씩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아까 사탕 한 주먹 받던데 하나만 줄래요?”

“아……. 네.”

최성진은 조금의 의심도 없이 불룩한 주머니에서 사탕 하나를 꺼내 줬다. 나는 그가 건네는 사탕을 오른손으로 받아 들고 지난 기억을 훑었다.

<달기만 한 머랭 안에 인절미, 프레첼, 오레오를 넣었구나. 왜 남들처럼 밖으로 꺼내지 않았을까?>

<머랭에서 어떻게 이런 맛이 나지?>

<확실히 밀도가 다르구나. 안은 머랭이 아니라 마시멜로 같은데?>

<샘플링만 하면 될 텐데……. 방법이 없을까?>

다른 MD들을 모를 것이다.

저 평범해 보이는 머랭 쿠키 안에 프레첼과 오레오, 인절미 등이 들어가 있고, 안은 마시멜로처럼 말랑하다는 것을.

그래서 그는 눈과 경험으로 판단하지 않고 일일이 확인한 것이다.

나는 사탕을 까서 입안에 넣고 씩 웃었다.

“우린 직접 물류를 운영해서 샘플링도 가능한데.”

“네?”

내 말에 최성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사탕 찐하네.”

“네? 그게 무슨…….”

“누룽지 맛이 아주 찐하다고요. 성진 씨처럼.”

최성진은 내 말에 영문을 모르고 눈을 껌뻑였다.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내 명함을 건넸다. 그러자 멍하던 그가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정중하게 내밀었다.

명함에서 들려오는 그의 조금 전 기억.

<그래. 마프나 핫딜은 샘플링이 가능하겠지…….>

그래. 이 정도의 기억이면 됐다.

여기다 조금만 더 보태 주면 그는 조만간 우리에게 이력서를 보내올 것이다.

나는 받은 명함을 주머니에 넣고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켓 프레시도 신입과 경력직 뽑는 거 알죠?”

“네. 알고 있습니다. 제안은 고맙지만 지금도 충분히 만족합니다.”

어쭈 이거 봐라?

내 뜻을 바로 이해했네?

나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미간을 좁혔다.

“누가 뭐래요?”

“네?”

“그냥 그렇다는 겁니다. 박람회 잘 보시고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봐요.”

내가 등을 돌려 가자, 이진성 차장이 재빨리 달려와 물었다.

“왜 그냥 가세요? 성진이 마음에 들었던 거 아니에요?”

“네. 마음에 들었어요.”

“그럼 입사 지원하라고 말씀하시죠. 이사님 충분히 그 정도 위치는 되잖아요.”

“그렇게 안 해도 곧 이력서 들고 올 겁니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얼굴에 쓰여 있어요.”

이진성 차장은 고개를 갸우뚱하고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나는 입구 쪽으로 걸어가 부스의 앞에서 제품의 사진을 찍는 김준위와 마주했다.

“김준위! 벌써 거기야?”

“벌써라뇨? 정말 꼼꼼하게 리서치 했습니다.”

“내일까지 여길 돌아도 되니까 다시 천천히 하나씩 봐.”

최성진과 김준위는 반대의 케릭터다.

한 명은 지나칠 정도로 꼼꼼하고, 다른 한 명은 기발하고 독특하다.

그리고 이들이 함께한다면, 아마 좋은 시너지가 날 것이다.

나는 믿는다.

이들과 같은 MD들이 앞으로 마켓 프레시를 끌고 갈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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