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154화>
155. 진성 차장님이 좋다면 좋은 겁니다
* * *
몸을 일으켰다.
누군가에게 맞은 것처럼 온몸이 쑤셔왔다.
소파에서 잠들어서 그런가?
어제는 방에 들어가기 싫어서, 작은 소파에서 잠들었다.
식탁 위에는 어젯밤 시켜 먹었던 족발이 요란한 냄새를 풍겼고, 빈 소주병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머리를 긁적이며 족발 몇 점을 집어먹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딱딱하게 굳어 버린 족발은 맛이 없었지만, 그냥 버리기 아까워서 대충 먹었다.
대충 샤워를 마치고, 식탁 의자에 걸어 두었던 셔츠를 입었다.
출근길.
차가 멈춘 사이, 손으로 머리를 대충 빗은 후 긴 하품을 했다.
그리고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DJ의 말에 깔깔대며 30분 만에 회사에 도착했다.
“진성 차장. 좋은 아침!”
고동수 부장의 아침 인사.
맨날 10분 이상 늦는 사람인데, 오늘은 제시간에 왔구나.
“부장님! 오늘 플랜에서 커피머신 샘플 가져온다고 했는데, 시간 괜찮으시죠?”
“오늘?”
“네,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아……. 맞다. 근데 어쩌지? 내가 오늘 급한 약속이 있어서…….”
일주일 전부터 말해 둔 건데…….
플랜은 요즘 가장 핫한 커피머신을 수입하는 벤더.
지난주에 런칭한 제품도 반응이 좋았다.
그리고 이번에 가져오는 제품은 15만 원대의 저가형으로 기대가 가득했다.
“부장님, 이거 빨리 계약해야 핫딜이나 에이마켓이 못 들고 갑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일단 제품 샘플 두고 가라고 해.”
내가 가진 사입 전결권은 겨우 15억.
사업부 부장에게는 50억까지 사입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이 때문에 함께 미팅하자고 했던 건데…….
가만 생각해 보니 요즘 고동수 부장이 이상하다.
평소 깐깐하게 태클을 걸던 그가 요즘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마치, 다른 중요한 일이 있는 사람처럼.
“오늘 못 들어오세요?”
“응, 아침에 간단한 업무만 처리하고 나갈 거야.”
“후…….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은 괜찮죠?”
“아니. 나 오늘 일 보고 밤 비행기로 바로 미국 넘어가.”
“미국이요?”
“응. 최 이사님이 시킨 일이 있어서. 다음 주 목요일에 들어올 거야.”
“그럼 플랜은 어떻게 해요?”
“다녀와서 가장 먼저 마무리 지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럼 전화 좀 받아주세요. 상황 봐서 전화 드릴 테니까요.”
“알았다.”
고동수 부장은 내 어깨를 툭 치고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천천히 사무실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머그잔을 들고 지나가던 장선영 차장이 나를 보고 멈춰 섰다.
“이 차장님! 와이셔츠 또 똑같은 거 입으셨죠?”
한 손으로 코를 틀어막고 미간을 구긴 장선영 차장.
전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더니, 내가 이혼한 이후로 그녀의 잔소리가 심해졌다.
“냄새나요?”
“네. 족발 냄새 쩔어요.”
식탁 의자에 걸어 둬서 냄새가 배었나 보다.
나는 고개를 좌우로 크게 저으며, 강하게 부정했다.
“아니요. 족발은 무슨…….”
“그럼 족발집에서 주무셨어요?”
“아니거든요.”
그냥 긍정하기 싫었다.
그래서 그녀를 무시하고 내 자리를 향해 빠르게 걸었다.
잠시 후.
장선영 차장은 쇼핑백 하나를 들고 내 자리로 다가왔다.
“이 차장님.”
“왜요?”
“이거 사이즈 맞을 거 같은데.”
그녀는 쇼핑백을 열어 안에 담긴 검은색 새 와이셔츠를 건넸다.
투명한 비닐 안으로 보이는 사이즈는 100.
내가 입는 사이즈가 맞다.
“뭡니까 이게?”
“오늘 플랜이랑 중요한 미팅 있다면서요. 당장 이거로 갈아입어요.”
“근데 장 차장님한테 남자 셔츠가 왜 있어요?”
“정민 대리가 저번에 사 둔 거 빌려 온 거예요.”
“그럼 정민 대리는?”
“나중에 차장님이 사 줘요.”
가만 보니 스타일이 괜찮다.
안 그래도 검은 셔츠 하나 정돈 있으면 좋겠다 생각했는데.
“그래요. 정민 대리한테 오늘 바로 똑같은 놈으로 주문한다고 전해 줘요.”
나는 셔츠를 받아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 * *
오전 11시.
플랜에서 두 명의 담당자가 회사로 들어왔다.
40대 초반의 박정연 이사와 20대 후반의 김형숙 과장은 엘리베이터 앞으로 나온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박정연입니다.”
“네, 이진성입니다.”
“차장님, 블랙 셔츠가 잘 어울리네요.”
“고맙습니다.”
나는 그들을 데리고 가장 좋은 회의실로 들어갔다.
플랜이 호주에서 가져온 저가형 한정판 모델은 몇 달 전부터 탐내던 제품이다. 다른 커머스에는 풀리지 않게, 이번에 꼭 전량 사입해야 한다.
“이게 드레빌 저가 모델인 거죠?”
드레빌은 호주 최고의 커피머신 브랜드.
대부분의 제품이 100만 원을 넘는 구성군을 가지고 있는데, 회사 설립 50주년을 맞이해 특별히 15만 원대의 저가형 제품이 나왔다.
또한, 호주에서 직구로 구매하는 사람도 많아 독점으로 잡기만 하면 대박이 날 것은 분명했다.
“네. 기능도 원제품이랑 같고, 사이즈만 작아진 제품입니다.”
김형숙 과장은 상자 안에 있는 커피머신을 꺼내 테이블 위로 올려놨다.
그리고 나는 조심스럽게 제품을 살폈다.
무게는 대략 5킬로 내외.
반짝이는 은색 외장이 커피의 은은한 향을 머금은 것 같다.
분쇄, 도징, 탬핑, 추출을 한 번에 하는 기계로 다루기도 너무 쉽다.
청소가 편한 스테인리스 받침과 원두를 갈아주는 코니컬 버 그라인더.
스팀과 온수를 선택하는 다이얼과 360도 방향전환이 가능한 스팀완드.
정말, 100만 원이 넘는 제품의 기능을 그대로 가져왔다.
아니, 오히려 초보자가 사용하기 편하게 만들어 놨다.
“좋네요. 진짜 잘 만들었네요.”
“그렇죠?”
“네. 이거 얼마나 들여오는 겁니까?”
내 질문에, 박정연 이사는 가방에 있던 발주서를 꺼내 보였다.
“우선 40억 정도 가져오기로 했습니다.”
“2차 일정은 언제가 될까요?”
“2차는 힘들 거 같아요. 중국 애들이 아예 2차 생산물량 독점을 해 버려서.”
그렇다면 이번 물량은 절대 다른 커머스에 나눠 줄 수 없다.
“이거 우리가 다 가져가도 됩니까?”
“그래서 마프 먼저 왔잖아요.”
플랜은 자금이 부족한 무역 회사.
작년에 독일 인덕션을 무리하게 수입하고 더 힘들어졌다는 소문을 들었다. 지금 그녀의 말에 담긴 속뜻은 빨리 40억을 내주면 자신들이 호주로 가서 사입해 오겠다는 말과 다름없다.
“언제까지 결정해야 합니까?”
“빠르면 빠를수록 좋죠.”
“음……. 전화를 좀 해 보고 오겠습니다.”
“그리고 차장님. 이거 잡으려고 한 달을 기다렸어요. 아시죠? 발주 늦으면 싱가포르나 홍콩 애들이 바로 집어간다는 거.”
한정판으로 나온 드레빌의 저가형 커피머신.
이건 출시 전부터 전 세계의 벤더들이 줄 서서 기다린 모델이다.
그녀의 말처럼 먼저 돈을 넣는 놈이 임자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회의실 밖으로 나가 고동수 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 지금 고객의 사정으로…….
아예 꺼져 있는 전화기.
급하면 전화를 한다고 했는데…….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나는 그에게 여러 차례 전화하고, 다른 사업부의 김명진 부장과 박대영 부장에게도 부탁을 해 봤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한 달에 한 번 쓸 수 있는 전결권을 쓴 상태로 도와줄 수 없다는 답변만 할 뿐이었다.
원지훈 이사님께 부탁해 볼까?
아니다. 저 방으로 들어간 이후로 대화도 한 적이 없다.
일단 미뤄 보자.
오늘 안에 고 부장이 전화를 켜두겠지.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회의실 안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곳엔…….
“좋네요. 우리 진성 차장님 제품 보는 눈 하나는 정확합니다. 하하.”
플랜의 벤더들을 상대하고 있는 원지훈 이사.
그는 커피머신을 좌우로 살펴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회의실로 들어온 나를 보고 손짓을 했다.
“이거 진짜 차장님 말씀대로 괜찮네요.”
“네?”
고동수 부장이 결재를 올린 건가?
난 이사님에게 이 제품에 대해 말한 적이 없다.
“이거 전에 말씀하셨잖아요. 기대가 크다고.”
한쪽 눈을 깜빡이는 원지훈 이사.
거짓말을 하는 것이구나.
갑자기 자신이 끼어들어서 이들에게 내가 무시당하지 않도록.
“아……. 네네.”
“얘기 대충 들었는데, 플랜으로 들어오는 물량이 얼마 없다면서요?”
“그래서 오늘 전결이 필요합니다.”
“당연하죠, 차장님이 그렇게 극찬한 물건인데.”
원지훈 이사는 이 제품의 스펙을 알지 못한다.
인트라넷에 올려 둔 문서를 고동수 부장이 확인하지 않았기에 아직 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박정연 이사의 제품 설명이 이어지고.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의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제품 스펙 확인 안 하셨잖아요.”
그러자 원지훈 이사는 고개를 돌려 나에게 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우리 회사에서 차장님보다 가전 보는 눈이 정확한 사람이 있어요? 진성 차장님이 좋다면 좋은 겁니다.”
“……!”
내가 좋으면 좋다라…….
이 정도까지 나를 믿는 것인가?
이전에 고집을 피워서 회사에 손해를 입힌 적도 있었는데?
진작 원지훈 이사를 찾아갈걸…….
이사를 달고 멀어졌다고 생각한 것은 나뿐이었나 보다.
생각해 보면 그는 언제나 이랬다.
중요하거나 다급한 일이 있으면 슈퍼맨처럼 짠하고 나타났다.
마치 내 속마음을 아는 사람처럼…….
오늘도 그렇다.
당장 계약이 필요한 지금.
이렇게 찾아와서 나를 믿고 계약하겠다는 말까지 하고…….
독심술이라도 하는 걸까?
나는 피식 웃으며 진지한 표정으로 제품 설명을 듣는 원지훈 이사를 바라봤다.
* * *
퇴근길.
뜬금없이 찾아온 차주영 부장이 검은 봉지를 허공에 흔들어 보였다.
“잘 있었어?”
“차 부장님. 갑자기 무슨 일이세요?”
“우연히 합정 지나다가 너 생각이 나서. 이거 주려고.”
차주영 부장은 씩 웃으며 검은 봉지 안에 담긴 만두를 건넸다. 그리고 술잔을 쥔 것 같은 손 모양을 하고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오랜만에 우리 소주 한잔할까?”
“네. 그래요.”
우린 근처의 작은 선술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술과 안주를 주문하고 그가 포장해 온 만두를 뜯어 입안에 넣었다.
만두소에서 새어 나오는 따뜻한 육즙이 오늘 힘들었던 하루를 녹여 주는 것 같았다.
그렇게 술잔이 오가고, 어제도 마셔서 그런지 금세 취기가 올라았다.
“이번에 바론에서 새로 커머스 준비하는 거 들었어?”
“아니요. 바론에서 커머스를 준비해요?”
“몰랐어? 이게 예전에는 소문에 빠르더니, 이혼하고 완전히 망가졌나 보네.”
“아니에요.”
“그리고 술도 좀 작작 먹어라. 너 맨날 술이라면서?”
“누가 그래요?”
“충연이가. 어제 충연이 만났거든.”
“아……. 충연이 형님은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한데요.”
차주영 부장은 피식 웃고, 내 빈 잔에 술을 따라주며 말했다.
“좀 와서 도와라.”
“네?”
“바론에서 만드는 커머스 내가 MD 총괄하기로 했으니까. 와서 좀 도우라고.”
바론에서 차주영 부장을?
마켓 프레시에서 횡령으로 나간 사람인데…….
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부장님이 그쪽 총괄하신다고요?”
“왜? 뭐 잘 못됐어?”
“아……. 아니요.”
“그러니까 와서 좀 도와. 이 바닥에서 수입가전 잘 만지는 애, 너밖에 없잖아.”
“충연이 형은 뭐라고 하던가요?”
내 질문에 차주영 부장은 술잔을 비우고 미간을 구겼다.
“그 자식은 말도 마. 차장 직급에 연봉도 30%나 더 준다고 했는데 튕기더라. 내가 볼 때 아마 더 뽑아 내려고 튕기는 거 같아.”
아니.
최충연 팀장은 돈이나 직급이 아닌, 사람을 보는 사람이다.
“그래요?”
“응. 너도 넘어오면 부장 직급에 지금 연봉에 30% 이상 더 챙겨 줄게. 어때? 괜찮지?”
눈을 깜빡이며 답을 기다리는 차주영 부장.
그 순간 왜인지.
오늘 미팅 자리에 슈퍼맨처럼 나타난 원지훈 이사가 생각났다.
가만 생각해 보면 저번에도 그랬다.
유통사 미팅을 나가 나를 추켜세우며 계약을 끌어냈다.
그가 없이 내가 할 수 있을까?
아니. 지금의 절반도 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지금이 좋네요.”
“왜?”
“오늘 입은 이 셔츠가 마음에 들어서요.”
나는 입고 있는 검은 셔츠를 내려다보며 씩 웃었다.
“셔츠? 그게 무슨 소리야?”
“그냥 지금이 좋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아마 충연이 형도 그럴 겁니다. 아무리 좋은 조건을 주셔도 저처럼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원지훈, 새파랗게 어린놈 밑에서 자존심 상하지도 않냐?”
자존심?
나이가 어린 원지훈 이사가 부장을 달았을 때는 그랬다.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배알이 꼴리고 열이 올랐다.
하지만 그와 회의를 하고 함께 업무를 공유하면서 알았다.
그는 내가 자존심을 세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부장님.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
“나보다 어린 이사님 밑에 있다고 저나 충연이 형이 그럴 거 같아요?”
내 질문에 차주영 부장은 아무런 답도 하지 못했다.
나는 마지막 술잔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부장님 새로 시작하는 일 잘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마프 애들은 건드리지 마세요. 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