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153화>
154. 부장님도 거절하셨잖아요
이틀 후.
- 죄송합니다. 이탈리아 본사에서 카드 할인도 부담스러워 하네요.
영도실업 김도만 이사가 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선택한 브랜드는 총 7종.
전부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브랜드들이다.
할인 판매만 할 수 있다면 매출은 물론이고, 단번에 신규 회원과 이슈까지 몰아 올 수 있는 제품들이었다.
나는 전화를 끊고,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김경일, 마성근 팀장은 고개를 푹 숙이며 실망을 표했다.
“그냥 정가에 판매하면 뭐 하러 마프에 와서 삽니까?”
마성근 팀장의 말에 김경일 팀장도 이를 거들었다.
“영도는 실망하지 않도록 제가 잘 말하겠습니다.”
이대로 포기하긴 아깝다.
처음으로 다른 카테고리의 상품을 판매할 기회인데…….
이걸 이대로 날려 버릴 수는 없다.
나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 입을 열었다.
“아니야. 일단 생각을 좀 해 볼 테니까. 내일까지 조금만 시간을 갖자.”
“네. 알겠습니다.”
잠시 후.
김경일, 마성근 팀장이 밖으로 나가고, 빈 찻잔을 치우기 위해 이예나가 내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쟁반에 찻잔을 옮겨 담고 멍하니 앉아 있는 내게 말을 꺼냈다.
“이사님. 무슨 고민 있으세요?”
“그래 보여?”
“네, 평소랑 다르게 완전 풀이 죽어 계셔서요. 에너지 드링크라도 하나 드릴까요?”
“아니 괜찮아.”
“그러지 말고 하나 드세요. 이번에 편의점 멤버십 가입해서 몇 개 받을 수 있으니까요.”
“공짜로?”
“네. 멤버십 가입해서 꽁짜로 받는 거라 부담 갖지 마시고요. 한 다섯 개 받는 거 하나 드리는 거예요.”
왜 이 생각을 못했을까?
마켓 프레시에 연회비를 내는 멤버십 회원.
대략 20만을 넘는다.
그들에게만 특가를 공개한다면?
그럼 이는 특정 회원에게만 경품으로 제공하는 것이라 문제없다.
뿐만 아니라 이 프로모션을 통해 새로운 멤버십 회원이 늘어날 수도 있다.
나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공짜야?”
“속고만 사셨나. 정말 공짜라니까요.”
“그럼 나 하나만 얻어먹어 볼까?”
“네, 금방 받아 올게요.”
환하게 웃는 이예나.
나는 그녀에게 고개를 살짝 숙이며 답했다.
“고마워, 예나 씨.”
“아니에요. 그냥 사은품으로 받는 음료수인데요. 뭐.”
이예나는 씩 웃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곧바로 테이블에 내려놓은 휴대전화를 집어 올렸다. 그리고 김도만 이사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이사님. 원지훈입니다.”
- 네, 이사님.
“이번 특판 건, 단가는 가려 두고 멤버십 회원에게만 공개하면 어떨까요?”
- 마켓 프레시 멤버십 회원이요?”
“네. 대략 20만이 조금 넘을 겁니다. 로그인 후 소비자가를 공개하고 그 이전에는 보이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 ……로그인 전에는 절대 할인율 명시도 안 됩니다.
“물론이죠.”
비로그인 페이지에서는 궁금증만 유발해도 된다.
어차피 단가는 입소문으로 금방 퍼질 테니까.
- 흠……. 알겠습니다. 이탈리아 본사에 연락해 보고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벤트로 진행하는 건데 이것도 본사 확인을 받아야 하나요?”
- 네. 핫딜 놈들 때문에 좀 까다로워졌어요.
“얼마나 걸릴까요?”
- 늦어도 내일 오전까지는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 * *
일주일 후 멤버십 회원 대상으로 오픈한 명품관.
총 7종의 브랜드에 50여 개의 상품이 진열됐다.
행사를 시작하는 오전 10시부터 방문자가 폭주했고, 덕분에 급하게 임시 서버를 증설하여 서비스를 오픈할 수 있었다.
“개발 팀에서 답변 왔어?”
“네. 3분전에 증설 끝났답니다!”
“근데 왜 안 들어가져? 끝난 거 맞아?”
“캐시 지우고 들어가 보세요!”
“후…….”
이번 프로모션을 맡은 마성근 팀장은 모니터 화면을 보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문제없는 거죠?”
“네, 잘 돌아가네요. 진짜 조마조마해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내 질문에, 마성근 팀장은 이마의 땀을 훔쳐 내며 답했다. 그리고 그때, 실시간 판매 창을 확인하던 김대성이 소리쳤다.
“루이스 10분 만에 완판입니다! 팔렌시아도 벌써 절반이나 나갔습니다.”
“대성 씨 멤버십 회원은 얼마나 늘었어?”
“잠시만요!”
내 질문에, 김대성은 관리자 페이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모니터에 손가락을 가져가 하나하나 세어 보며 입을 열었다.
“와…… 이거 꽤 많은데요? 2만 7천명 조금 넘습니다.”
30~40대 여성이 주요 타깃인 마켓 프레시.
역시 예상했던 것처럼 멤버십 회원에게만 판매한 명품들의 반응은 좋았다. 그리고 새로운 멤버십 회원도 늘어나 다음 프로모션의 기대 효과까지 알 수 있었다.
내 방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주머니에 있던 휴대전화가 울렸다.
지이이잉!
발신자를 확인하고 씩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네. 원지훈입니다.”
- 루이스 완판 났더군요. 그것도 겨우 10분 만예요.
“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영도실업의 김도만 이사.
그는 이탈리아 본사에 우리의 생각을 직접 전달했다.
하지만 핫딜에서 뒤통수를 맞은 그들을 설득하기는 쉽지 않았다. 절대 안 된다는 것을 김도만 이사가 직접 이탈리아로 날아가 설득한 것이었다.
- 아닙니다. 이사님 아이디어가 좋았죠.
“다음 일정은 언제인가요?”
- 2주 후에 새로운 제품 가지고 뵙도록 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 이사님!
“네?”
- 저희랑 쭉 가시는 거죠?
“네, 영도에서 배신하지만 않으면 쭉 갈 겁니다.”
- 하하하 네.
김도만 이사는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끊었다.
방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이예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불렀다.
“저 이사님.”
“응?”
“김명진 부장님 방에 계십니다.”
“알았어.”
고개를 끄덕이고 내 방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 순간 들려오는 김명진 부장의 기억.
<후…….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나.>
회의 테이블에 앉아 있던 김명진 부장은 나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곧 오신다고 해서 기다렸습니다.”
“그래. 무슨 일이야?”
옷걸이에 상의를 걸어 두고, 천천히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심각한 표정의 김명진 부장.
그는 평소와 달라 보였다.
“그냥요…….”
“싱겁게 뭐야?”
“명품관은 반응 좋다면서요?”
“응, 괜찮은 거 같아. PB 생산 들어간 김은 제품 샘플 나왔어?”
“내일이면 나올 겁니다.”
보면 볼수록 김명진 부장의 행동은 어색했다.
어딘가 조급해 보였고, 계속해서 내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물류센터 부지는 찾았어?”
“현재 다섯개 정도 추려 놨는데, 곧 인트라넷에 올려 드릴게요.”
“그래. 이번 연도 신선식품 사입 건은 다 확인 했고?”
“네.”
상장으로 벌어드린 돈은 우릴 크게 변화시켰다.
먼저 부산, 광주, 세종에 새로운 물류센터 부지를 찾았고, 각 부서에 신입과 경력직 사원을 충원하기로 했다.
MD 사업부의 가장 큰 변화는 사입 비용이었다.
기존 사업부 부장의 전결권이 가능한 20억을 50억까지 올리며 더 많은 권한을 내줬다.
“차 한 잔 줄까?”
나는 사무실 구석으로 가서 직접 차를 타왔다.
찻잔과 사기 주전자를 테이블에 내려놓자, 김명진 부장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예나 씨가 안 하고 이사님이 직접 하세요?”
“응, 예나 씨는 시킨 일이 있어서 바쁠 거야.”
“아……. 매출 데이터 만들고 있어요?”
“응. 그것보다 무슨 일이야? 우리 명진 부장이 이렇게 풀이 죽어서.”
“제가요? 아닙니다. 하하.”
웃지만 어색하다.
그는 평소 화통한 성격의 소유자인데 오늘만큼은 너무도 달랐다.
나는 계속해서 먼 곳만 응시하는 그를 물끄러미 보다, 찻잔에 차를 따라주며 말했다.
“마셔. 얼마전에 선물 받은 차인데 향이 좋아.”
김명진 부장은 말없이 찻잔에 코를 가져갔다.
그리고 눈을 지그시 감고 작은 찻잔의 차를 한번에 비워 냈다.
“좋네요.”
나는 그가 내려놓은 찻잔에 다시 차를 따라주기 위해, 오른손을 뻗었다.
그렇게 만지게 된 찻잔.
<차주영…….>
차주영이라는 짧은 기억이 들려왔다.
이어지는 말은 없지만, 나는 그 이름만으로도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알 것 같았다.
“바론에서 커머스를 오픈한다고 하던데. 알고 있지?”
“아…… 네. 들었습니다.”
“명진 부장 생각에는 어떨 거 같아?”
“글쎄요. 그래도 바론인데 잘하지 않을까요?”
“그러겠지. 근데 명진 부장도 알잖아. 커머스가 돈만 가지고 할 수 없다는 걸.”
“그건 그렇죠.”
씁쓸한 표정의 김명진 부장.
차주영 부장은 내가 거절한 이후, 곧바로 김명진 부장을 만났을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제안을 했을 것이다.
그는 MD 사업부 전체를 통솔하고 이끌어 갈 수 있는 리더니까.
잡아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놔줘야 하는 것일까?
언젠간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아직 할 일이 너무도 많은데 김명진 부장을 보내기에는 너무도 아깝다.
나는 그의 빈잔에 차를 따라주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난 명진 부장이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했으면 좋겠어.”
“……!”
“충분히 이해하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 오로지 자신만 생각해.”
두 번째 찻잔을 비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 차 잘 마셨습니다.”
“그래. 언제든 마시고 싶으면 와.”
“네.”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가려는 김명진 부장.
나는 미안한 마음에 한없이 좁아진 그의 어깨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렇게 그가 나가고, 잠시 후 박대영 부장이 씩씩대며 내 방으로 들어왔다.
“와. 진짜 내가 어이가 없어서……. 이사님 이거 진짜 너무한 거 아닙니까?”
“뭐가요?”
“차주영 부장이요. 아직도 제가 자기 말에는 꿈쩍 못하는지 알더라고요.”
“만났어요?”
“네. 오늘 오전에 잠깐 커피 한잔하자고 해서 만났습니다. 아 참, 그건 들으셨어요? 바론에서 커머스 준비한다는 거요.”
저렇게 열을 내는 것을 보니 거절을 했나 보구나.
나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들었습니다. 차 부장님은 뭐라던가요?”
“바론에서 커머스 오픈하니까 일단 넘어오랍니다. 그래서 급여나 조건을 물었더니 알아서 해 주겠답니다. 아주 당당하게 말하는데, 면전에 커피를 뿌려 버리고 싶더라고요.”
“박 부장님 성격에 많이 참으셨네.”
“보는 사람도 많고, 쪽팔려서 못했습니다. 그나저나 어떻게 할 생각이세요? 저한테도 와서 그렇게 말하는 정도면, 이진성이나 최충연이도 이미 접근했을 거 같은데요?”
둘은 체인마켓 출신으로 차주영 부장의 사람이다.
“그랬겠죠.”
“근데 그냥 이렇게 앉아만 계실 겁니까? 당장 달려가서 차주영이 멱살이라도 잡아야죠! 아니면 이진성이랑 최충연이 불러올까요?”
차주영 부장은 앞으로 많은 사람을 데려가려 할 것이다.
물론, 이는 명백한 배임 행위로 법적으로 문제 삼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마음이 떠난 사람을 강제로 붙여 놓는 것은 서로 못할 짓이니까.
“그냥 두세요.”
“그걸 왜 그냥 둡니까?”
“부장님도 거절하셨잖아요.”
“…….”
“선택은 당사자가 하는 겁니다. 그 정도에 흔들리는 사람이라면 우리에게도 필요 없습니다.”
“자신 있으세요?”
“네, 자신 있습니다.”
박대영 부장은 내 표정을 살피고 씩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이래서 이사님을 좋아한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