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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듣는 회사원-149화 (149/223)

<기억을 듣는 회사원 149화>

150. 식구잖아요

* * *

“그렇게 하시죠.”

상장을 며칠 앞둔 지금, 매일 아침 이사회가 열렸다.

그리고 최구열 이사는 직원들이 우리 사주 구매를 할 수 있도록 회사 내 대출 시스템을 만들자는 제안에 너무도 쉽게 동의했다.

당연히 반대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나는 이전과는 다른 그의 태도에 이해할 수 없었지만, 빨리 안건을 넘기기 위해 말을 이었다.

“금리는 연 3.23%로 은행보다 조금 낮췄습니다. 그리고 매월 급여의 10%로 원금과 이자를 내도록 할 생각입니다.”

“좋은 생각입니다.”

다른 임원들보다 가장 먼저 동의하는 최구열 이사.

무슨 생각인 것인가?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의 180도 변한 태도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이사회가 끝이 나고.

회의가 끝나길 기다렸던 나는 최구열 이사가 앉았던 자리로 향했다. 그리고 테이블을 만지고, 의자를 쓰다듬으며 그의 지난 기억들을 되짚었다.

<아마존 이슈면 외국 자본도 끌어들일 수 있어.>

<공모 청약 때? 아니야. 국내 자본력으로도 충분해. 기관 투자는?>

<태청금속 상장 일정이 밀렸구나.>

<생각보다 일정이 좋은데? 이러면 기대주는 우리 하나뿐인 건가?>

오로지 상장에 대한 기억뿐이다.

한쪽으로 생각이 몰려서 그랬던 것인가?

그래서 내가 낸 안건에 반대하지 않았던 것인가?

기억을 듣던 오른손을 떼고 돌아가려는 순간, 테이블 밑바닥에서 반짝이는 무언가가 보였다.

허리를 숙여 반짝이는 물건을 집어 들었다.

노란 금반지.

그리고 투박한 반지에서는 최구열 이사의 지난 기억들이 들려왔다.

<단순한 플랜이 아닌 오퍼레이션이 필요해.>

<바론과의 팝업스토어는 BO에게 마이너스가 될 수 있다.>

회사에 대한 기억.

<차주영. 그놈은 글렀어. 사람만 보지 미래를 보지 않아.>

<김명진이가 내 밑으로 왔어야 하는데.>

사람에 대한 기억.

그리고

<많이 컸구나.>

<그동안 미안했다.>

<그래. 잘할 수 있을 거야. 그래……. 잘할 수 있을 거야.>

주어가 없는 기억들.

가족에 대한 기억인가?

생각해 보니 그의 가족에 관한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투박한 반지를 만지작거리다 주머니 안에 넣었다.

* * *

최구열 이사의 사무실.

“이거 떨어트리신 것 같아서 가져왔습니다.”

내가 주머니에 있던 반지를 꺼내자,

최구열 이사는 물끄러미 바라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고맙습니다. 한참 찾았는데……. 어디 있었나요?”

“회의실 테이블 밑에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최구열 이사는 반지를 집어 손가락에 끼워 넣었다. 그리고 한 손을 펼쳐 소파에 앉으라는 신호를 했다.

“오랜만에 오셨는데, 차 한잔하고 가시죠.”

“네.”

잠시 후, 비서가 차를 가져오자 그는 뜨거운 차를 한 모금 마시며 굳게 닫았던 입을 열었다.

“요새 많이 바쁘시죠?”

“아니요. 저보다는 대표님이나 이사님이 바쁘시죠. 저희는 똑같습니다.”

“네, 그렇군요.”

안경 뒤의 유난히 촉촉한 눈.

푸석푸석한 얼굴에 유난히 깊게 파인 주름살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보이던 그는 아무런 말없이 차를 마셨다.

“요즘 김선녀 여사님과는 만나시나요?”

이 질문이 왜 나왔는지…….

뭔가 대화를 이어 가야 한다는 생각에 던진 말이 하필 김선녀 여사의 얘기였다.

최구열 이사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최문식 실장이 간 이후로 보지 못했습니다.”

김선녀 여사가 최구열 이사에게 강제로 붙여 놨던 최문식 실장.

일산으로 회사가 이전되면서 그는 다시 김선녀 여사에게로 돌아갔다.

“아……. 네.”

“원 이사님은요?”

“저도 딱히 연락하지 않습니다. 아마 BO 푸드 경영권 때문에 저한테 화가 좀 나셨을 겁니다.”

“대충 들었습니다. 김상만 회장님을 도왔다고요?”

“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걱정이군요. 여사님과 등을 지면…….”

“여사님과 등진 사람이 어디 저뿐일까요?”

내가 씩 웃으며 답하자, 최구열 이사는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왔다.

“아마 쉽지는 않을 겁니다. 혹시나 제가 도울 일 있으면 말씀하세요.”

“최 이사님이 저를 도와주신다고요?”

“네, 우린 식구잖아요.”

식구. 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다 나오는구나.

뭐가 그를 이렇게 약하게 만들었을까?

김선녀 여사에게 버림을 받은 것이?

아니면, 믿었던 직원들이 하나둘 내쳐지면서?

무엇이든 상관없다.

지금처럼 최구열 이사가 회사를 위해 자신의 능력을 써 줬으면 좋겠다.

“식구……. 그 말 참 듣기 좋네요.”

“아 참. 원 이사님.”

최구열 이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책상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서랍 안에서 고급스러운 나무상자를 가져와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건강은 젊을 때 챙겨야 합니다. 이거 제가 꾸준히 받아오는 공진단인데, 꼭 아침에 한 알씩 드세요.”

그에게 공진단을 선물 받은 것은 이번이 두 번째.

그때 받은 나무상자에도 수많은 기억이 담겨 있던 것이 기억난다.

그가 밀어 준 상자를 오른손으로 쓰다듬었다.

<혜연아. 미안하다. 아빠가 미안해.>

<진작 챙겼어야 하는데……. 미안하구나.>

혜연이. 딸의 이름인가?

왜 미안하다는 기억만 반복했을까?

그리고 왜 이 나무상자에 이런 기억이 있는 것일까?

내가 기억을 듣는 사이, 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일이 있어서 내일부터 이틀 정도 회사를 비울 것 같습니다. 중요한 시기에 너무 죄송하네요.”

최구열 이사는 일 중독이다.

매사에 정치적이고 계산적인 그는 단 한 번도 자리를 비운 적이 없었다.

“무슨 일이 있나요?”

“아닙니다. 그냥 개인적인 일입니다.”

“네…….”

그때 나무 상자에서 들려온 기억.

<수술만 잘되면 이제 다시 똑같이 생활할 수 있을 거야.>

<괜찮을 거야. 아직 2기니까. 의사도 빨리 발견한 거라고 했잖아.>

수술이라…….

그랬구나. 그래서 그렇게 얼이 나간 사람처럼 행동했구나.

지금까지의 기억으로 최구열 이사의 상황을 짐작했다. 그리고 남은 차를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잘 먹겠습니다. 그리고 내일 잘 다녀오세요.”

“네, 그러겠습니다.”

내 방으로 돌아온 나는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봤다.

식구.

그의 입에서 무심결에 나온 그 말이 자꾸 귀에 어른거렸다.

나는 긴 한숨을 내쉬고, 책상 위에 있던 인터폰 버튼을 눌렀다.

“예나 씨. 고동수 부장님 좀 불러 주세요.”

* * *

“최혜연 씨가 어느 병실인지 알 수 있을까요?”

한국의료원 1층 로비.

내 질문에 데스크 직원은 모니터를 찾아보며 답했다.

“703호입니다.”

최구열 이사의 외동딸 최혜연.

그가 이혼한 후, 금이야 옥이야 키운 딸.

그리고 이제 막 고등학교에 올라간 그 아이에게 찾아온 대장암.

한국병원에서 수술한다는 말은 최구열 이사의 수족과도 같은 고동수 부장에게 들었다.

내 옆에 있던 고동수 부장은 다소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이사님 덕분에 처음 오는군요. 근데 원 이사님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최 이사님이 절대 회사에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우연히 알게 됐습니다.”

“이사님. 그리고 최 이사님이 절대 오지 말라고 했는데……. 괜찮을까요?”

“네. 괜찮을 겁니다.”

“그래도…….”

고동수 부장은 내 질문에 참 어렵게 답했다.

처음에는 모른다고 잡아떼다가, 병원만 알려 달라는 내 말에 어렵게 한국병원이라는 말만 꺼냈다.

내가 성큼성큼 엘리베이터 앞으로 걷자, 고동수 부장은 내 뒤를 빠르게 따라왔다.

7층 병실 앞.

문을 밀어서 열자, 병실에 홀로 앉아 있는 최구열 이사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안으로 들어오는 우리를 보지 못했는지, 멍하니 창밖만 바라볼 뿐이었다.

“이사님…….”

고동수 부장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최구열 이사를 불렀다.

그러자 그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나와 고동수 부장을 확인하고,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자네가 어떻게 여긴? 그리고 원 이사님은…….”

“근처 지나는 길에 들렀습니다.”

내 답에, 최구열 이사는 고개를 푹 떨궜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주신 공진단이요. 그 한의원에 추가 주문하려고 전화했다가 우연히 들었습니다. 항암 성분이 많은 제품이라고요.”

“그렇군요.”

“지금 수술 중인가요?”

“네.”

“잘될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나저나 바쁘신데…….”

최구열 이사는 고개를 떨군 채로 말을 잇지 못했다.

고동수 부장은 그런 그의 모습에 어찌할 줄 몰랐고, 나는 옅은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식구잖아요.”

“네?”

“이사님이 그러셨잖아요. 식구……. 뭐든 힘든 일이 있으면 돕겠다고요.”

나는 상의를 벗어 빈 소파에 내려 두고, 팔을 걷으며 말을 이었다.

“병실이 너무 건조하네요. 고 부장님 가습기에 물 좀 받아 주세요.”

“네?”

“이불도 좀 털어야겠어요. 이사님 같이 가시죠.”

“이불이요?”

“네. 이불이요. 뭐해요? 혜연이 수술 잘 마치고 돌아와서 이렇게 눅눅한 이불 덮게 하실 거예요?”

“아……. 아닙니다.”

“그리고 이사님 혜연이 꽃 좋아하나요? 뭘 좋아할지 몰라서 다 주문했는데.”

“네. 좋아할 겁니다.”

고개를 들고 어색한 미소를 짓는 최구열 이사.

나는 침대 위의 이불을 걷어 어깨에 메고 그를 끌어당겼다.

그렇게 우린 분주하게 움직였다.

침대를 정리하고, 배달 온 꽃을 진열한 후, 커튼을 활짝 열어 햇빛이 들어오도록 했다.

가습기에서는 수증기가 뿜어져 나왔고, 병원 1층에서 사 온 아로마 액을 넣어서 은은한 향까지 나게 만들었다.

바지를 걷고 화장실을 청소하는 최구열 이사.

조금 전의 걱정스러운 표정이 아닌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나는 그의 옆으로 다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혜연이가 수술 마치고 나오면 좋아하겠네요. 아빠가 직접 청소까지 해 줬으니까.”

“……네, 그렇겠죠.”

“그나저나 이사님. 청소 처음 하시죠?”

내가 미간을 좁히며 묻자, 최구열 이사는 당황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네?”

“그렇게 설렁설렁해서 어디 묶은 때가 지워지겠어요?”

“…….”

그가 들고 있는 빗자루를 뺏어 바닥을 긁어 내렸다. 병원 바닥에 있던 누런 때가 조금씩 벗겨 내려가고, 이를 보고 있던 최구열 이사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미국에 있던 딸아이기 대장암 판정을 받았습니다. 해 준 게 없더군요. 매달 달라는 용돈만 보내만 줬습니다.”

“…….”

“학교에서 어떻게 생활하는지, 친구는 있는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아빠가 돼서 하나도 모르더군요. 바쁘다는 핑계로…….”

“…….”

“……고맙습니다.”

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

그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빗자루로 물을 쓸어내렸다.

“네? 뭐라고요?”

“고맙다고요!”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트릴 것 같은 최구열 이사.

평소 강직하고 주장이 강하던 그는 없었다.

무엇이 우릴 이렇게 만들었을까?

가만 생각해 보면 나와 그는 똑같은 목표를 위해서 일했다.

단지, 그 목표를 위한 생각과 방법이 달랐던 것뿐이었다.

허리를 펴고 세면대 위의 수세미를 들고 그에게 던져 주며 말했다.

“변기는 이사님이 직접 닦으세요.”

오늘따라 최구열 이사는 꽤나 따뜻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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