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147화>
148. 이 상황에서 또 실리를 챙기네
“천우식품의 새우튀김과 수제 소시지를 확보했습니다.”
MD 사업부 회의실, 찬동식품의 요구 품목을 모두 구했다는 가공식품 팀의 보고가 이어졌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찬동은 생각보다 좋은 단가를 제시했고, 가공식품 팀은 거래 중인 생산자들의 제품을 어렵지 않게 공수해 왔다.
나는 가공식품 팀이 준비한 보고서를 넘겨 보며 물었다.
“그럼 이제 끝인가요?”
“네, 일단 요구한 품목들은 모두 끝났습니다. 찬동에서 오케이만 떨어지면, 그대로 공급일과 수량만 맞추면 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이번 프로젝트로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국내 독점판매라는 것이다.
콜라보한 제품들이 마켓 프레시에서만 판매를 하면, 이를 구매하기 위한 신규 회원도 늘어나고 다른 제품들도 덩달아 판매가 증가할 것이다.
만족스러운 회의를 마치고, 회의실 밖으로 나와 시계를 확인했다.
“어디 가세요?”
내 옆으로 다가와 묻는 김명진 부장.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질문에 답했다.
“응, 양지 함 대표님이 보자고 해서. 지금 넘어가려고.”
“아……. 이사님 거기 대표님이랑 친하시죠?”
“응.”
“거기 대표님은 어떤 분이세요?”
“욕심도 많고 자기가 직접 일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사람. 아마 일 욕심 하나는 대한민국 1등일걸?”
“그렇군요.”
“근데 함 대표님은 왜?”
“제가 잘 아는 대표님이 있는데 함 대표님을 소개해 달라고 해서요.”
“그래. 누군데?”
“고래 식품의 박석우 대표요.”
고래 식품은 닭발과 오돌뼈 등의 레토르트를 주로 하는 곳.
매출은 적지만, 마니아층이 있는 제조사로 꾸준히 성장 중인 스타트업이다.
“그래. 가면 물어볼게.”
“네. 고맙습니다.”
* * *
양지푸드 대표이사실.
“고양이가 차 밑에 들어가 있는 거야. 근데 아무리 노크를 하고, 시동을 걸어도 꿈쩍을 안 하더라고. 그래서 그냥 오늘은 차 두고 왔어.”
이런저런 시시콜콜한 얘기들을 떠드는 함중식 대표.
이럴 거면 왜 꼭 오라고 했는지…….
나는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며 먼 곳을 바라봤다.
그때 눈에 들어온 진열장 위의 트로피.
나는 트로피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거 뭐예요?”
“응?”
“저 트로피요. 무슨 대회 같은 거 나갔었어요?”
“아, 이거?”
함중식 대표는 진열장 앞으로 걸어가 트로피를 들고 내가 앉아 있는 소파로 다가왔다.
“얼마 전에 고려일보에서 실시한 소비자 만족도 1위 군만두 선정됐잖아.”
“얼마 줬어요?”
“무슨 얼마를 줘? 요새 그런 거 돈 주고 사면 큰일 나.”
함중식 대표는 트로피의 위의 먼지를 조심스럽게 털어 내며 답했다.
이는 언론사들의 수익 모델 중 하나다.
예전에는 아예 대놓고 돈을 요구했지만, 요즘은 광고를 판매하는 용도로 쓴다.
“그럼 얼마나 광고하기로 했어요?”
“월 800씩 지면 광고로 1년치 계약했어.”
배시시 웃으며 답하는 함중식 대표.
그는 참 순진하다.
오로지 제품 연구에만 몰두했던 그였기에, 이런 것들은 잘 모른다.
“마케팅 팀에서는 뭐라고 안 해요?”
“했지. 상 팔아먹는 거라고.”
“그런 말을 듣고도 산 거예요?”
“근데 이건 정말 상 팔아먹자고 하는 거 아니라니까! 원 이사도 우리 제품 좋은 거 알잖아.”
“우리 함 대표님, 꼰대에 한 발자국 가까워지셨네.”
“아니라니까! 내가 무슨 꼰대야? 나 같은 사람이 어디 있다고!”
함중식 대표는 트로피를 다시 진열대에 올려놓고,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내 맞은편 자리에 앉아 다 식은 차를 마시며 말을 이었다.
“그냥. 뭐라도 있으면 좋잖아. 그리고 수상을 하면 광고비도 50%나 할인해 준다고 하고.”
이는 언론사들이 지면 광고를 팔기 위해 하는 뻔한 수작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진열장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함중식 대표가 먼지를 털어 냈던 트로피의 끝을 오른손으로 만졌다.
<좀 쉴까? 이제 알아서 돌아가잖아.>
<이번에도 서 실장이 큰 거 했네. 나는 절대 그렇게 못했을 텐데.>
1년 전, 양지푸드는 함중식 대표가 없으면 돌아가지 않는 회사였다.
하지만 지금은 변했다.
제품 개발은 서보미 실장이 훌륭히 해냈고, 마케팅과 거래처 확보는 새로 들어온 직원들이 제 몫을 다하고 있었다.
“꼰대 짓 맞아요.”
“…….”
함중식 대표를 본 지는 7년이 넘었다.
그래서 나는 그를 잘 안다.
자신의 손으로 이뤄 내는 것을 좋아하는 그인데, 지금은 자신이 신경 쓰지 않아도 회사가 알아서 돌아간다.
아니, 자신이 뛰던 때보다 성과가 훨씬 좋다.
자신이 필요 없다고 느껴질 때.
자신이 후배들보다 못하다고 느껴질 때.
그때 사람은 꼰대가 되고, 일종의 매너리즘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언론사가 광고를 팔려는 미끼임에도 알고도 제안을 덥석 받아들였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돌려 소파에 앉아 있는 그를 보고 말했다.
“고래 식품 알죠?”
“고오오래?”
함중식 대표는 씩 웃으며 내 말에 장난을 쳤다.
나는 미간을 좁히고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고래 식품에서 대표님 좀 소개해 달라고 하던데요?”
“나를?”
“네. 말 나온 김에 오늘 보실래요? 제가 알기엔 고래도 이 근처인데.”
“그럼 나야 좋지. 근데 고래가 뭐 파는 애들이야?”
“닭발이랑 오돌뼈 같은 레토르트요.”
“그래. 가자.”
함중식 대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옷걸이에 걸린 점퍼를 걸쳐 입었다.
* * *
고래식품 대표이사실.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박석우 대표가 공손하게 함중식 대표를 맞이했다.
“직접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하하, 아닙니다. 근처 있는데 진작 만나볼 걸 그랬네요.”
함중식 대표는 머리를 긁적이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박석우 대표는 인터폰으로 무언가를 지시했고, 잠시 후 곱창전골과 순대 볶음이 조리된 상태로 들어왔다.
“이게 뭡니까?”
함중식 대표가 묻자, 박석우 대표는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저희 새로 출시할 제품입니다. 평가를 좀 받고 싶어서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요? 근데 왜 평가를 저한테…….”
“사장님. 저 기억 안 나세요?”
“글쎄요.”
“저 양지 제품 개발팀 막내로 있던 박석우입니다.”
그제야 기억이 났는지, 함중식 대표는 손뼉을 치며 답했다.
“아! 석우! 커다란 뿔테 안경 끼던 박석우 맞지?”
“네, 맞아요. 안경을 벗어서 모르셨나?”
“하하하, 그래. 난 네가 이렇게 성공할 줄 알았어. 요즘 잘나가나 보네?”
“아닙니다. 아직 멀었죠.”
예전 직원이었구나.
근데 왜 직접 연락하지 않고, 김명진 부장 통해서 연락해 달라고 했을까?
나는 자리에 앉아 둘의 대화를 가만 들었다.
“근처 있으면서 진작 연락하지. 왜 이제야 연락한 거야? 그것도 원 이사 통해서.”
“용기가 안 나더라고요. 그때 양지 있을 때도 맨날 사장님께 혼났잖아요.”
“그랬었나?”
“네, 그래서 이렇게 신제품 출시 전에 사장님께 평가를 받고 싶었습니다.”
“내가 뭐…….”
“사장님이 절대 미식가시잖아요. 뜬다는 제품은 다 떴고요.”
“하긴 내가 그랬지. 하하.”
“그리고 여기 원 이사님도 제품 보는 눈이 뛰어나신 분이고요.”
박석우 대표는 나무젓가락의 포장지를 뜯어 나와 함중식 대표의 앞에 내려놓았다.
함중식 대표는 곧바로 맛을 봤고, 나도 조금 떠서 입안에 넣었다.
맵다.
지금까지 먹어 본 곱창전골과 순대 볶음 중에 가장 맵다. 닭발과 오돌뼈를 메인으로 했던 회사라 그런지, 그 양념을 그대로 쓴 것 같았다.
“아……. 이거 너무 매운데요?”
나는 별로라 판단했고, 이는 함중식 대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연거푸 시식을 해 보고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너무 매운 거 아냐?”
“그래요?”
“응. 너무 매워. 그리고 배즙 넣었지?”
“네.”
“끝에 과일 향이 딱 감싸주는데, 제품이 너무 매워서 이거 중화할 무언가가 필요해. 채소를 좀 더 넣든가, 아니다. 아예 떡을 넣는 거 어때? 그러면 제품 단가도 줄일 수 있고, 맵기도 줄일 수 있을 거야.”
함중식 대표는 자신이 할 일을 찾은 것처럼 신이 나서 말했다.
그리고 다시 제품의 맛을 본 내 머릿속을 스치고 가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저 박 대표님!”
“네?”
“이거 양지의 군만두 피랑 같이 해 보면 어떨까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얼마 전까지 가공식품 팀이 공들였던 제품 콜라보.
양지푸드의 만두피는 두툼하다.
그리고 만두피를 만들 때 그 안에 감자 전분과 특별한 소스를 함께 넣어서 고소한 맛이 강하다.
떡을 넣는다는 것.
어쩌면 만두피가 이를 대신해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거 오돌뼈랑 닭발도 같은 소스죠?”
“네. 맞습니다.”
“함 대표님. 만두소 안에 고래 식품의 오돌뼈를 넣으면 어떨까요?”
“오돌뼈를?”
“네. 양지의 만두피는 쫀득한 식감이잖아요. 그 안에 오도독한 식감과 매콤한 맛이 들어가면 딱 맞아떨어질 거 같은데요?”
내 말에, 함중식 대표는 앞에 놓인 제품을 다시 맛봤다.
그리고 환하게 웃으며 박석우 대표에게 말했다.
“박 대표. 오돌뼈도 맛볼 수 있을까?”
“물론이죠.”
박석우 대표가 인터폰으로 제품을 주문했고, 잠시 후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오돌뼈가 들어왔다.
함중식 대표는 곧바로 오돌뼈를 집어 입안에 넣고 오도독 씹으며 입을 열었다.
“와……. 이거 식감 좋은데? 양념도 좋고.”
“감사합니다.”
“이거 진짜 원 이사 말처럼 우리 만두피 안에 넣으면 딱 맞겠는데?”
“고맙습니다.”
“이거 나한테 팔아라. 갑자기 욕심나네. 오돌뼈 만두. 느낌 확 오지 않아?”
“이거 저희 메인인데…….”
“내가 완전 강하게 푸시해 줄게. 이전에 소매하던 거보다 확실히 더 매출은 올라올 거야. 어때?”
적극적으로 구애하는 함중식 사장.
하지만 박석우 대표는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씩 웃으며, 그들의 중간에 껴서 입을 열었다.
“자자, 그러지 마시고. 두 회사가 이번 기회에 콜라보 한 번 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콜라보?”
“네. 양지와 고래의 콜라보 오돌뼈 만두. 두 회사 로고 딱딱 박고, 모델도 섞어서 만들어 보는 겁니다. 양지는 기존 고객들 통해서 판매하시고, 고래는 새로운 고객들 통해서 오돌뼈를 알릴 수 있는 겁니다.”
내 말에 두 대표의 표정이 환해졌다.
특히, 함중식 대표는 오돌뼈를 연신 맛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완전 어울리겠는데? 박 대표. 제품 개발팀에 애들 좀 우리 회사로 보낼 수 있어?”
“네, 가능합니다.”
“이거 한 달 아니, 일주일 만에 찍어 보자. 진짜 원 이사 말대로 잘 맞을 거 같아.”
“네. 저도 괜찮을 거 같습니다.”
나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럼 생산된 제품 판매는 마프 독점인 거죠?”
“와! 원 이사. 이 상황에서 또 실리를 챙기네.”
“제가 아이디어 낸 거잖아요.”
“알았어. 알았다고.”
나는 함중식 대표의 답을 듣고, 고개를 돌려 박석우 대표에게도 물었다.
“고래 식품도 동의하는 거죠.”
“네. 저희야 당연히 좋죠.”
스테디셀러인 양지푸드의 군만두.
마니아층이 확고한 고래 식품의 오돌뼈.
제품을 콜라보 하게 되면 두 회사는 서로의 제품을 교환하고 새로운 고객층 확보에 나설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스낵이나 아이스크림을 합치는 경우는 많았다. 그리고 유명한 불닭 소스를 첨가한 레토르트들도 많았다.
하지만 소스가 아닌, 제품을 합치는 경우는 아마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과연 소비자들은 이 제품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간만에 의욕이 생긴 함중식 대표는 오돌뼈를 계속해서 집어먹으며 환하게 웃었다.
“박 대표. 이거 진짜 맛있다.”
“그래요? 좀 싸 드려요?”
“응. 우리 서 실장도 먹여 보게 좀 싸 줘. 그리고 개발팀 미팅은 말 나온 김에 오늘 어때? 아예 서두르자고.”
“네. 그래 주시면 저희야 감사하죠.”
함중식 대표는 이번 일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러면 나는 확신한다.
그의 손에서 만들어진 제품이 고객에게 선택을 받을 것이라는 확신을.
나는 씩 웃으며, 흥분한 두 대표를 번갈아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