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145화>
146. 여기 직원이세요?
“와……. 정말 좋은데요?”
정진택 차장은 시금치를 들고, 이리저리 살피며 말했다.
그리고 끝을 뜯어 씹어 보고, 코를 킁킁대며 냄새를 맡는 등.
말 그대로 할 수 있는 리액션을 다 했다.
“농가에서 자식같이 키운 시금치입니다. 근데 그런 시금치가 킬로에 400원이라면 너무 한 거 아닙니까? 시중에는 킬로에 5천 원 가까이 판매되잖아요.”
미간을 좁히며 말하는 채진아.
요새 방송을 많이 해서 그런지, 그녀는 조금의 어색함도 없이 술술 얘기했다.
“유통의 단계가 많다 보면 그럴 수 있죠. 그래서 저희 마켓 프레시는 농가와 직접 계약하고 유통의 단계를 줄여 좋은 제품을 빠르고 안전하게 고객님의 식탁까지 배송해 드립니다.”
정진택 차장은 준비한 홍보 멘트를 날렸다.
그러자 이 방송을 담당하는 PD가 들고 있던 대본을 허공에 휘휘 흔들며 소리쳤다.
“컷!”
“…….”
눈을 동그랗게 뜬 정진택 차장.
PD는 그의 앞으로 걸어가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말했다.
“차장님. 너무 그렇게 직설적으로 홍보하시면 어떡합니까? 제가 대본 드렸잖아요. 그리고 너무 심하게 웃지 마세요.”
“왜요?”
“아……. 그게 좀…….”
PD의 말처럼 정진택 차장의 웃는 표정은 좀 그렇다.
아니, 많이 그렇다.
뭐랄까.
드라마 속 악역이 뭔가 간계를 꾸미며 웃는 것처럼 영 찜찜하다.
“웃는 게 왜요?”
“아니, 좀 자제해 달라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아무래도 시청자들이 볼 때 너무 웃으면 진정성이 없어 보여서…….”
참 잘하는 PD구나.
정진택 차장이 최대한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저렇게 대응하다니…….
나는 팔짱을 낀 채로 피식 웃고 등을 돌렸다.
그때.
“거기! 거기요!”
PD가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내가 등을 돌리자, 그는 가까이 다가와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여기 직원이세요?”
“네, 그런데요.”
“촬영 좀 도와줄 수 있어요? 그냥 몇 마디만 해 주시면 됩니다.”
화장을 고치고 있던, 채진아는 나와 PD의 대화를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PD의 앞으로 걸어와 말했다.
“이분이 제가 말씀드린 이사님이세요.”
“아……. 원지훈 이사님?”
“네, 너무 젊어서 놀라셨죠?”
“좀 놀랐네요. 하하하. 근데, 이사님이 방송하시지 왜 뒤에 계셨어요? 그러지 말고 딱 핫 컷만 땁시다. 잠깐이면 되니까.”
PD는 다짜고짜 나를 카메라 앞으로 밀었다.
그렇게 조명 앞에 선 내가 어찌할 줄 몰라하자, PD가 다시 소리쳤다.
“저기 차장님. 잠깐 이번 컷은 이사님으로 가겠습니다.”
“왜요?”
“혹시 몰라서 따 놓으려는 겁니다.”
정진택 차장은 고개를 돌려 나를 보고, 옆구리를 푹 찌르며 말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이놈의 외모 지상주의.”
그가 투덜대며 카메라 밖으로 나가자, 대본을 수정하던 방송 작가가 달려와 손으로 직접 적은 메모지를 내 손에 쥐여 줬다.
그렇게 듣게 된 작가의 기억.
<마프에서 다 받아 주긴 어려울 텐데. 에이마켓에도 연락해 볼까?>
얼마나 되길래 다 받아 주기 어렵다는 걸까?
나는 대본을 대충 훑어보고, 화장을 고치는 채진아에게 물었다.
“얼마나 되나요?”
“네?”
“시금치요.”
“아……. 제가 얼핏 듣기론 2톤이 넘는다고 했어요.”
마켓 프레시에서 판매 중인 시금치는 200g씩 개별로 포장해서 판매한다.
그럼 대략 1만 세트 정도.
유통 기한은 최대 2주.
배송까지 고려한다면 일주일 안에 팔아치워야 한다는 말이다.
“그럼 저희가 다 구매하도록 하죠.”
“정말요?”
“네. 좋은 일이니까요.”
그때, 뒤에서 방송을 준비하던 장학범 쉐프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괜찮겠어요?”
“네. 쉐프님이 도와주시면 더 쉬워질 것 같은데요?”
장학범 쉐프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 피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장학범입니다.”
“원지훈입니다. TV보다 실물이 훨씬 좋으시네요.”
“그런 말 많이 듣습니다.”
가벼운 농담까지 차가운 표정으로 뱉어 내는 장학범 쉐프.
그는 불같이 화를 내는 인물로 유명하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의 음식에 대한 곧은 신념과 거침없는 말투에 열광했다.
“어떤 요리를 준비하세요?”
“글쎄요. 아직 고민 중입니다. 뭐 필요한 거라도 있어요?”
“퓌레나 디핑 소스 좀 만들어 주세요.”
내 말에 장학범은 잠시 멈칫하다가, 금세 내 의도를 알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일주일 안에 물량 다 빼긴 힘들겠죠?”
“아니요. 그건 가능합니다.”
“그래요? 그러면 왜 퓌레나 디핑 소스를 만들어 달라는 건가요?”
퓌레나 디핑 소스는 보관만 잘하면 1년까지는 문제없다.
그래서 장학범 쉐프는 내가 이를 만들어 판다 생각한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니다.
난 지금이 아니라 그 후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방송은 이번 주만 대충 넘기면 끝이겠지만, 저희는 아니거든요. 잠깐 반짝하려고 이 방송하는 거 아닙니다. 좋은 제품을 오랫동안 받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내 말에, 장학범은 갑자기 크게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하.”
“…….”
“좋아요. 해 봅시다.”
그렇게 촬영이 시작되고, 나는 작가가 준 대본대로 채진아와 장학범의 질문에 답을 했다.
촬영이 끝나갈 때쯤 이어진 장학범의 돌발 질문.
“얼마까지 생각하십니까?”
“네?”
“시금치요. 여긴 전부 사입을 한다고 들었는데, 얼마에 사입하실 생각이십니까?”
방송에 우리의 사입가를 공개하라는 건가?
대본에는 없었다.
그리고 이건 어떻게 보면 비밀과도 같은 부분인데…….
“지금 공개해야 합니까?”
내가 미소를 지으며 넘기려 하자, 장학범은 더 날카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물론 하셔야죠. 어려운 농가를 돕기로 했는데, 똑같이 400원에 사 가시면 절대 안 되죠.”
이제 보니 쉐프가 아니라 방송쟁이구나.
그렇다면 장단에 맞춰 춤을 춰 줘야 하는 법.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눈을 바라보며 답했다.
“마켓 프레시 자체 풀 콜드체인으로 운송하면 유통가를 낮출 수 있습니다.”
“아……. 저도 들었습니다. 여기 콜드체인이 잘되어 있다고. 그래서 얼마요?”
“일주일 정도 창고에 보관해야 하니까…….”
“창고에도 콜드체인이 돼 있는 건가요?”
“물론이죠. 마켓 프레시는 식품 전문 커머스입니다. 당연히 준비해야죠. 매일 자체 위생 점검도 시행합니다.”
제법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장학범 쉐프도 이를 눈치채고 내 말에 일부러 맞장구를 쳐 준 것이다.
방송에 나갈지 모르겠지만, 일단 할 수 있는 건 다했다.
“그래서 얼마요? 딱 말씀해 주세요.”
“일단 남해로 내려가 제품을 모두 확인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상이 없으면 킬로에 1,500원까지 가능할 것 같습니다.”
“와! 시세에 네 배네요? 역시, 이사님을 찾아오길 잘했네요. 하하하.”
그렇게 방송이 끝나고.
스탭들이 하나둘 철수했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채진아는 내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혹시 제가 피해를 드린 건 아닌지 걱정이네요.”
“아닙니다.”
“혹시 모든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하세요. 저 이 프로 고정으로 들어갈 것 같거든요.”
“그래요? 잘됐네요. 앞으로 자주 볼게요.”
“네. 감사합니다.”
그녀와 짧은 인사를 마치고, 등을 돌렸다.
그러자 정진택 차장이 내 옆으로 다가와 툴툴대며 말했다.
“방송쟁이세요?”
“네?”
“이사님이요! 뭐 그렇게 말을 잘하세요?”
“음……. 저도 생각해 봤는데, 좀 타고난 거 같아요.”
나는 피식 웃고, 내 방으로 돌아갔다.
* * *
일주일 후 김지영의 집.
지영이는 과일과 디저트를 들고 와 소파 앞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내 볼에 입을 맞추고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우리 동네 시작할 때 됐지?”
“응.”
“과연 우리 지훈이 얼마나 잘 나올까?”
“나야 뭐 타고났으니까 하하하.”
내가 크게 웃으며 장난을 치자, 그녀는 딸기 하나를 포크로 찍어 내 입에 넣어 주며 말했다.
“충분히 아니까, 그만해도 돼.”
“그래? 요즘 종종 까먹는 거 같던데? 맨날 일에만 빠져 있고 말이야.”
“아니야. 내가 우리 지훈이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응?”
그녀는 나를 달래고, TV 화면에 집중했다.
그렇게 촬영한 장면이 나오고, 나와 채진아가 하나의 화면에 잡혔다. 그러자 지영이는 미간을 구기며 입을 열었다.
“좋았냐?”
“뭐가?”
“진아 씨 좋아했었잖아!”
“내가?”
“어쭈 이제 오리발까지 내밀어?”
나는 씩 웃고,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오랜만에 보니까 영 아니더라. 화장을 많이 해서 그런지 피부에 트러블도 많고. 난 우리 지영이가 제일 예뻐.”
“말로만?”
“그럼 몸으로 보여 줄까?”
나는 TV의 전원을 끄고, 그녀의 옆으로 바짝 달라붙었다. 그리고 천천히 얼굴을 가져가, 그녀의 부드러움 입술에 내 입술을 포갰다.
그때.
지이이잉! 지이이잉!
동시에 울리는 나와 지영이의 휴대전화.
지영이는 재빨리 입술을 떼고 휴대전화의 발신자를 확인했다.
“뭐야? 전화가 더 중요하다는 거야?”
“유 비서 전화야. 예상 데이터 나오면 바로 보내라고 했거든. 미안. 잠깐만.”
지영이는 한 손을 올려 미안함을 표하고, 휴대전화를 받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계속해서 울리는 내 휴대전화의 발신자를 확인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이사님! 방송 보고 계시죠?
다소 흥분한 목소리의 정진택 차장.
TV의 볼륨을 줄이고 그의 말에 답했다.
“네. 봤습니다.”
- 이사님이랑 장학범 쉐프랑 얘기했던 장면들 다 살렸던데요? 제가 설명했던 건 다 잘라 버리고…….
장학범 쉐프와 마켓 프레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전부 다 방송으로 나왔다.
물론 마켓 프레시라는 말에는 삐 소리와 자막에는 마켓 **시 라고 나왔지만, 이는 방송을 보는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게요.”
- 실검 보셨어요?
마켓 프레시가 실검에 잡혔겠지.
뭐 그런 거 가지고 호들갑인지…….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목소리로 답했다.
“왜요? 마켓 프레시 실검 잡혔어요?”
- 아니요.
“그럼요?”
- 마켓 프레시 이사가 잡혔네요. 12위에는 이사님 이름도 있어요. 와……. 실시간 댓글들 좀 보세요. 장난 아니네요.
이런 결과가 있을 줄은 전혀 예상 못했다.
“일단 끊어 봐요.”
나는 전화를 끊고, 검색 포털로 들어가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댓글들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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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ri****
마프 훈남 이사님은 군더더기 말 하나 없이 장쉡 까다로운 질문에 팩트만 척척척 대답하심…… ♡
park*****
뭐야,완전 존잘이었네…….
chzh******
꺄아아악! 완전 잘생겨뚜 !
iceb****
아~~~♡ 시금치 퓌레 완죤 기대 됨!
linm*****
요즘 마프가 대세지
happ******
너무 맛있어 보여요! 마프에서 시금치 퓌레, 시금치 디핑소스 검색하면 되나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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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에 관한 이야기가 대략 70%.
시금치나 마켓 프레시에 대한 평가는 겨우 30%였다.
방에서 통화를 마친 지영이도 이를 봤는지, 입술을 앞으로 삐쭉 내밀며 내게 다가왔다.
“피……. 이러다 우리 지훈이 유명해지겠네. 훈남 MD, 존잘 MD, 원지훈이라는 이름도 실검 7위까지 올라갔네.”
“왜 질투나?”
“그래. 질투 난다. 왜!”
나는 씩 웃고,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녀의 머리를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