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144화>
145. 그럼 촬영 팀이랑 함께 가겠습니다
* * *
“이사님. 어제는 너무 죄송하고 감사했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내 방으로 찾아온 마성근 팀장이 고개를 숙였다.
일시칩 런칭까지 가장 큰 공을 세운 마성근 팀장.
물론 연말에 성과급은 나오겠지만, 그에게 뭔가 선물을 해 주고 싶었다.
그러던 중, 출근길에 우연히 주운 편지 봉투에는 아이들의 기억을 들었다.
아빠에 대한 사랑과 걱정.
원했던 것들을 너무 쉽게 포기하는 아이들의 기억이 너무도 예쁘게 느껴졌다.
차장 진급도 떨어진 그에게 위로의 말도 못했었는데…….
그래서 그의 가족들이 원하는 선물을 준비했고, 외식을 마친 가족이 돌아오길 기다렸다가 전해 준 것이었다.
“팀장님 성과에 비하면 적은 거죠.”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저는 그냥 좋은 제품이 있어서 들고 온 것뿐인데요…….”
“아니요. 팀장님 아니면 일시칩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 이번 생산 공장 확보도 그렇고. 잘하셨습니다. 정말 잘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이사님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90도로 허리를 굽히는 마성근 팀장.
그런 그의 모습은 언제나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아……. 팀장님 또 이러신다. 누가 보면 제가 괴롭히는 줄 알겠어요.”
“아닙니다. 제가 좋아서 이러는 겁니다. 느껴지지 않으세요? 이사님을 향한 제 마음이?”
“네, 느껴지니까 충분히 느껴집니다. 그러니까 제발 그만 하시죠.”
나는 재빨리 그를 일으켰다.
그리고 그때, 밖에 있던 이예나가 노크를 하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이사님. 이사회 가실 시간입니다.”
“벌써?”
“네. 대표님이 한 시간 앞당기자고 하셔서요.”
“알았어요.”
나는 옷매무새를 점검하고, 밖으로 나갔다.
* * *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
이사회는 매번 이랬다.
평소 잘 웃는 김지영 대표도 웃지 않았고, 최구열 이사는 이사회 안건이 적힌 종이만 뚫어지게 바라봤으며, 새로 이사에 선임된 유화성 이사는 다른 사람들의 눈치만 볼 뿐이었다.
이번 이사회 안건은 직원들의 스톡옵션과 신주 발행.
개인의 이익과 회사의 이익을 모두 생각해야 하는 자리이기에 이전보다 더 무겁게 느껴지는 것이 당연했다. 김지영 대표는 이사들을 번갈아 보다 천천히 입을 뗐다.
“직급에 상관없이 개인에게 1,200주의 스톡옵션을 배정하면 총 72만 주가 나가게 됩니다.”
현재 BO 커머스의 장외 시가는 한 주당 3만8천 원.
두 달 전까지 2만5천 원이던 주가는 일시칩의 성공과 유화성 이사의 선임으로 50% 이상 상승했다.
최구열 이사는 회계팀에서 준비한 자료를 넘겨 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행사 가격은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대략 3만2천 원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스톡옵션의 정확한 용어는 주식 매수 선택권이다.
즉, 주식 매수의 권한을 부여받은 내부 직원이 매수권을 행사해야 비로소 주식을 살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스톡옵션의 행사 가격의 결정은 주총일 전일을 기산일로 하여 일주일, 1개월, 2개월의 거래량을 가중 평균한 가액의 산술평균으로 하기에, 3만 2천 원이라는 금액은 아직 예상가일 뿐이었다.
나는 둘의 대화가 끝난 것을 확인하고 김지영 대표를 불렀다.
“대표님. 너무 적습니다. 72만 주면 겨우 1.5% 수준입니다.”
현재 BO 커머스의 발행된 주식은 약 2천만 주.
상장을 위해 신주를 발행하여, 4천만 주 정도가 될 것이다.
4천만 주 중에 72만 주는 약 1.5%.
이는 최대 20%까지 부여가 가능한 현행법에 비해 너무도 낮은 수준이다.
“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조정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럼 원 이사님은 어느 정도로 생각하시나요?”
“최소 200만 주 이상은 배정해 줘야 할 것 같습니다. 직원들이 주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절대 회사의 손해가 아닙니다.”
“그럼 500억 정도의 금액을 배정하는 겁니다. 괜찮겠습니까?”
“네.”
내 답에, 김지영 대표는 고개를 돌려 유화성 이사를 바라보며 물었다.
“유 이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원 이사님의 말에 찬성합니다. 겨우 두 달 만에 이렇게 훌륭한 성과를 이룬 것은 마켓 프레시의 600명이 넘는 인재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줬기 때문입니다.”
김지영 대표는 살짝 미소를 보이고,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려 최구열 이사에게도 물었다.
“최 이사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미 답을 정해 놓고 물으시는군요.”
“…….”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찬성이니까.”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최구열 이사.
스톡옵션을 늘리면, 외부에 판매할 수 있는 주식이 줄어들어 법.
한 마디로 더 많은 수익을 낼 수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최구열 이사는 반대할 줄 알았는데…….
예상외다.
김지영 대표는 최구열 이사의 표정을 보고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모처럼 모두의 의견이 맞았군요. 그럼 회계 팀과 얘기해서 새로운 안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다음 회의는 3일 후로 하고, 그때 신주 발행에 대한 것도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김지영 대표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곧바로 밖으로 나가는 그녀의 뒤를 따라가 옆으로 바짝 붙었다.
“괜찮겠어?”
“뭐가?”
“요새 많이 피곤한 거 같아서 말이야.”
“아니 괜찮아. 그나저나 예상왼데?”
“뭐가?”
“최 이사 말이야. 당연히 반대할 거로 생각했는데. 이럴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좀 높여서 잡아 볼걸.”
“그러게 나도 좀 의외였어.”
최구열 이사는 자신의 실리만 생각하는 사람으로, 내 의견에는 반대를 위한 명분을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랬던 그가 유화성 이사의 선임 이후로 완전히 변했다.
무슨 이유일까?
무엇이 그를 변하게 한 것일까?
나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김지영 대표에게 말했다.
“이따 몇 시에 퇴근해?”
“응?”
“간만에 밥이나 좀 먹자고. 회의 때만 얼굴 보고, 이러다 얼굴도 잊겠다.”
“알았어. 최대한 빨리 끝내고 연락할게.”
“그래.”
* * *
MD 사업부 사무실 입구.
나를 기다리고 있던 김태하 차장이 옆으로 바짝 붙으며 물었다.
“어떻게 됐어?”
“잘 얘기됐어. 직원들에게 200만 주 이상은 배정할 거야.”
“정말?”
“속고만 살았나. 잘될 거라고 했잖아.”
“최구열 이사가 찬성했어?”
“응.”
“와…….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변하지? 이거 불안한데?”
나는 김태하의 어깨에 손을 얹고, 내 방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며 말했다.
“왜? 난 좋기만 한데.”
“그래도 끝까지 방심하지 마. 언제 뒤통수 칠지 모르니까.”
“아니야. 이번엔 뭔가 좀 다른 거 같아.”
“왜? 또 무슨 일 있었어?”
“아니. 그냥 느낌이.”
“그놈의 느낌 타령은……. 이러다 조만간 작두 타겠어.”
나는 피식 웃고, 내 방으로 들어왔다.
자리에 앉자, 곧바로 휴대전화의 진동이 울렸다.
02로 시작하는 번호.
저장이 안 된 처음 보는 번호다.
“여보세요.”
- 원지훈 이사님이시죠?
“네. 맞습니다. 누구시죠?”
- 저 채진아입니다. 기억나세요?
채진아.
마켓 프레시의 TV 광고를 찍는 날, 갑자기 쓰러진 사람을 병원으로 함께 이동했던 뮤지컬 배우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복면 가수라는 프로그램에 나와 제법 화제가 된 것으로 기억한다.
“네. 기억합니다.”
- 아. 갑자기 전화 드려서 놀라셨나 보네요.
“네. 좀 놀랐습니다. 무슨 일인가요?”
- 사실, 지금 방송 촬영 중인데요. 생각나는 사람이 이사님밖에 없어서요.
잠깐, 그녀를 알던 당시는 부장이었는데 이사로 승진한 것은 어떻게 알았을까?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제 번호는 어떻게 아셨나요?”
- 이정우 대표님께 여쭤봤어요. 그나저나 너무 뜬금없는 부탁이라 이거 어떻게…….
그랬구나.
이정우 대표를 통해서 나에게 연락이 온 것이구나.
부탁이 뭘까?
나는 궁금한 마음에 다시 물었다.
“부탁이요?”
- 네. 혹시 이사님 우리 장터라는 프로그램 아세요? 지금 그 프로를 촬영 중인데요.
우리 장터라는 프로그램은 유명 쉐프가 각 지역의 특산물로 요리하는 법을 알리는 프로그램이다.
그리고 식품 MD를 하는 우리와 겹치는 부분이 많아서 자주 보긴 했었다.
“네, 알고 있습니다.”
- 이거 어떻게 말씀드려야 하나…….
계속해서 빙빙 돌리며 말을 하지 못하는 채진아.
광고나 PPL을 제안하려는 걸까?
아니다. 그런 거라면 출연자가 하지 않을 것이다.
뭘까?
채진아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잔뜩 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 후……. 이번 겨울 시금치가 가격이 너무 내려갔데요. 경매가가 겨우 400원이래요. 그것도 1킬로에…….
그랬구나.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이제 알겠다.
하지만 나는 모르는 척을 하고 그녀에게 되물었다.
“그걸 왜 진아 씨가?”
- 그냥 뭐라도 해야 할 거 같아서. 죄송합니다. 실례인 거 아는데 그래도 혹시나 해서……. 혹시나…….
그녀의 말에 그곳의 상황이 눈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채진아는 그때도 그랬다.
남의 일에 자신의 불이익도 감수하면서 나섰었다.
나는 빠르게 지금의 상황을 계산했다.
우리 동네면 주말 시간대 방영되는 프로그램으로 시청률은 모르지만, 50화 이상 방영했다.
그리고 이는 어느 정도 시청률이나 화제성이 있다는 말이다.
만약 그 프로그램에 마켓 프레시의 이름이 나간다면?
마켓 프레시가 어려운 농가를 돕는 이미지가 그려진다면?
이 또한 상장을 앞둔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그뿐 아니라, 방송에서의 자연스러운 홍보로 매출 상승까지 이끌 수 있다.
“남해인가요?”
- 어떻게 아셨어요?
“지금 철에 시금치면 남해죠. 현재 수확량이 얼마나 되나요? 아, 그것보다 샘플을 먼저 받을 수 있을까요?”
- 정말요? 정말 그래 주시겠어요?
“네. 한 상자만 가지고 올라오세요. 저희 주소는 문자로 보내드리겠습니다.”
-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좋은 일인데 함께해야죠.”
- 네. 올라가서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채진아는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내가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그녀가 다급한 목소리로 불렀다.
- 저 이사님!
“네?”
- PD님이 그러는데, 혹시 촬영도 괜찮을까요?
“촬영이요?”
- 네. 아무래도 무리겠죠?
당연히 좋은 일이다.
그림이 딱 나오는 데 이를 왜 망설이겠는가?
“아닙니다. 가능합니다.”
- 그래요? 그럼 촬영 팀이랑 함께 가겠습니다.
“네. 이따 뵙죠.”
나는 전화를 끊고, 정진택 차장과 신선팀의 김기열 팀장을 내 방으로 불렀다. 그리고 통화한 내용을 천천히 설명했다.
“우리 동네면 시청률 7%는 나오는 방송이잖아요.”
흥분한 표정의 정진택 차장.
“거기 장학범 쉐프가 시금치 요리 레시피 한두 개 만들어서 레토르트로 나가는 것은 어떨까요? 장학범 쉐프랑 방송 이름 걸고 가면 판매량도 좋아질 겁니다.”
아이디어까지 내는 김기열 팀장.
그들도 나와 같이 이번이 좋은 기회가 될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레토르트도 좋네요. 이따 사무실로 오면 두 분이 좀 만나 보세요.”
“네. 알겠습니다. 근데 이사님은 같이 안 보세요?”
“제가요?”
“네. 이사님이 나와 줘야 화면이 살죠.”
정진택 차장이 눈썹을 위아래로 빠르게 움직이며 말했다.
나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이따 일정 봐서 괜찮으면 참석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사님 전 잠깐 나갔다 오겠습니다.”
“어디 가시게요?”
“옷 좀 사려고요. 그래도 방송인데 신경을 좀 써야죠. 하하.”
정진택 차장은 크게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우연히 찾아온 이번 방송은 우리에게 큰 기회가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린 이를 꼭 큰 성과로 만들어 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