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141화>
142. 먹는 거로 장난치면 안 되죠
회사로 오는 길가에 노란 개나리가 가득 올라왔다.
길가의 나뭇가지에는 초록이 하나둘 자리를 잡았고, 우린 마지막 상장 준비에 최선을 다했다.
유화성 부장은 결국 최구열 이사를 설득했다.
그의 욕심과 의지에 자신의 사람을 아끼겠다던 최구열 이사도 두 손을 든 것이다.
그렇게 이사회를 거쳐 임시 주총이 열렸고, 김상만 회장을 포함한 주주들은 유화성 부장의 능력과 의지보다는 그의 배경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결국, 주총 20분 만에 결정이 났다.
유화성 이사.
상장을 위해 꼭 필요한 세 번째 이사 자리에 그가 선임됐다.
뭐가 그리 쉬운지.
나는 그렇게 어렵게 올라왔던 자리인데…….
주총이 끝나고 밖으로 걸어 나오자, 내 뒤를 따라 나오던 김상만 회장이 나를 불렀다.
“원 이사!”
고개를 돌리자, 그는 내 옆으로 바짝 붙어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번에도 원 이사 작품이라면서?”
“아닙니다.”
“하여간 수고했어. 내가 말년에 사람 복이 있나 봐. 요새 지영이는 어때?”
“상장 준비하느라 바쁩니다.”
“그래. 그러겠지. 잘 좀 챙겨 주게.”
“네.”
김지영 대표가 주로 했던 업무는 회계.
기업의 실적을 공개해야 하는 지금, 그녀는 회계 팀과 매일 늦게까지 근무를 해서 나도 잘 만나지 못했다.
“그래. 자네가 있어서 얼마나 든든하지. 요새는 밥을 먹지 않아도 힘이 나.”
“BO 푸드는 어떻습니까?”
“이쪽도 큰 문제는 없네.”
“다행이군요. 건강 잘 챙기시고 다음에 찾아뵙겠습니다.”
“그래. 고맙네.”
김상만 회장은 내 인사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가 떠나고, 벽에 기대서 물끄러미 보던 정진택 차장이 다가왔다.
“서운하지 않으세요?”
“뭐가요?”
“원 이사님은 이사 선임되기 위해 그렇게 노력했는데, 유 이사님은 한 방에 끝났잖아요.”
역시나 정진택 차장은 내 마음을 참 잘 안다.
처음 봤을 때는 이런 망나니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이전과 너무도 달라진 그가 가끔은 어색했다.
“다 그런 거죠. 뭐.”
“오늘 일정 있으세요?”
“글쎄요. 딱히 없을 겁니다.”
“그럼 저랑 같이 바람이나 쐬러 가실래요?”
“어디 가는데요?”
“해남이요.”
멀리도 가는구나.
나는 피식 웃고, 정진택 차장의 등을 쓰다듬으며 답했다.
“김 양식장?”
“잘 아시네.”
“근데 또 직접 해남까지 내려가세요?”
“제가 좀 그래요. 직접 가서 확인하지 않으면 잠이 안 오거든요.”
내가 정진택 차장을 높게 사는 이유가 바로 이거다.
부하 직원을 보내도 그만인데, 그는 첫 계약 시에는 꼭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려 했다.
“새로 계약하시려고요?”
11월부터 4월까지 수확하는 김.
지금은 막바지 수확 철로 내년 양식물량에 대해 미리 계약해야 하는 시기이다.
“그래야죠. 이번에 PB 제안서 보셨죠?”
“네. 봤습니다.”
김은 국내에서도 꾸준한 매출을 보이는 아이템으로 요즘은 국내 보다 수출이 더 핫하다. 그래서 정진택 차장이 준비하는 PB 제품은 국내가 아닌 해외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었다.
이미 수출을 담당하는 벤더들까지 확보해 둔 상태로, 전년도 물량보다 300% 이상의 물량을 확보해야만 했다.
“남들 움직이기 전에 빨리 움직여야죠.”
“그래요. 이따 몇 시에 출발합니까?”
“지금 공항으로 가면 딱 맞을 겁니다. 티켓팅은 사무실에 해 두라고 할게요.”
“그럼 오는 길에 덕산 공장에도 잠깐 들립시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네?”
“덕산의 송 부장님을 이미 그쪽으로 불렀거든요.”
“왜요?”
“김부각도 잘 나간다고 해서 덕산 쪽에서 생산할 수 있을지 좀 확인해 보려고요.”
일시칩의 생산 공장은 총 다섯 군데.
마성근 팀장과 김경일 팀장이 직접 발품을 팔아 가동률이 낮은 공장을 저가의 비용으로 임대했다. 덕분에 편의점과 마트의 공급량이 일정해졌고, 온라인은 우리 마켓 프레시에서만 독점으로 판매할 수 있게 됐다.
참 많이도 변했다.
예전에는 하나하나 내 손을 거쳐야 했는데…….
나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네요.”
“가시죠.”
* * *
해남의 김 양식장.
정진택 차장은 양식장의 대표와 나란히 서서 먼 바다를 응시했다.
“사장님. 너무 비싸요.”
“요새 인건비가 얼마나 오른 줄 알아?”
“그래도 그렇지 생김을 킬로에 천삼백 원이나 달라시면 어떡합니까? 무슨 도둑놈도 아니고.”
“나도 마프니까 그렇게 하는 거지. 다른 놈들이 오면 킬로에 천오백 원은 받아 낼 거야.”
“작년에는 천원에 해 주신다고 했잖아요.”
“이번에 태풍에 수온까지 올라서 생산량이 반 토막 났잖아. 진짜 나도 더 이상은 힘들어.”
이곳은 작년에 해남 지역에서 가장 크게 양식을 하는 곳으로, 작년에는 계약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정진택 차장이 큰마음을 먹고 내려온 곳인데, 가격 협상이 영 쉽지 않아 보였다.
이래서 직접 나가야 한다고 했구나.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말없이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사장님. 어떻게 좀 안될까요? 올해는 꼭 계약해 준다고 하셨잖아요.”
정진택 차장은 양식장 대표의 팔 사이에 자신의 팔을 끼워 넣고, 어울리지 않는 애교를 떨었다.
“나도 그렇게 해 주고 싶지.”
“정말 절 죽이려고 하시는 겁니까? 이번에 작년보다 세 배나 더 가져가야 한다고요.”
“저기 봐요. 저기.”
양식장 사장이 가리키는 곳에는 50여 명의 직원이 배에 실려 온 김을 일일이 손으로 주워 담고 있었다.
정직택 차장은 그 광경을 보고,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저게 뭐요?”
“저기 아줌마 일당이 10만 원이야. 50명이면 하루에 오백이고, 저기서 공장까지 옮겨져서 분류에 포장까지 하면 돈 천 이상 들어가. 어디 그뿐이야? 작년에 마프 때문에 생산량 늘린다고 세척기 고장 난 거 새로 들였잖아.”
“그게 왜 또 우리 때문입니까?”
“정 차장 요구 조건에 맞추려고 세척기 빵빵한 놈으로 새로 맞췄잖아.”
“사장님! 그건 억지죠.”
쉽지 않겠구나.
양식장의 대표는 거래를 시작도 하지 않은 우리 때문에 힘들어졌다고 돌려서 말하고, 정진택 차장은 이를 계속해서 부인하니.
나는 그들을 두고, 물에 젖은 김을 주워 담고 있는 아주머니들이 있는 배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날씨 허벌나게 좋구마잉.”
“그러게. 오늘은 주갔제?”
“오늘도 안 주면 사람도 아니지.”
“자네는 얼마나 밀렸는감?”
“아따 고거시 참 거시기 허구마잉.”
일당이 밀렸다는 말인가?
나는 대화를 나누는 두 아주머니의 앞에 쭈그려 앉아 물었다.
“얼마나 밀렸습니까?”
“오메. 깜짝이야.”
내 목소리에 쭈그려 앉아 있던 아주머니가 뒤로 발라당 나자빠졌다. 그리고 선착장에 앉아 있는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누구세요?”
“마켓 프레시에서 왔습니다.”
“마켓? 아……. 사장 거시기에서 왔나 보네.”
거시기는 무슨 뜻인지 정확히 모르지만 대충 사장의 거래처가 아니냐고 묻는 것 같다.
“네, 맞아요.”
내가 환하게 웃으며 답하자, 아주머니들은 자신들끼리 숙덕거리며 키득거렸다. 그리고 아주머니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한 사람이 장난을 치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난 3일이나 밀렸는데. 박 씨는 일주일 이상 밀렸을걸?”
“그래요?”
“왜? 서울 총각이 주려고?”
“일단 사장님이랑 얘기 좀 해 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서울 총각 높은 사람인가 보네?”
“네?”
“그놈은 꽉 맥힌 사람이라 상대하기 힘들 거야. 여긴 다른 데보다 일당도 이만 원이나 싸.”
“근데 왜 여기서 일하세요?”
“여기가 제일 쉬우니까. 딴 데는 새벽에 약 쳐야 하는데, 여긴 그건 자기들이 알아서 해서 좀 편하거든.”
김의 품질을 향상시키고 생산량을 증대하기 위해서는 새벽에 꼭 유기산 활성 처리제를 뿌려야 한다.
이는 김 양식장의 잡초 제거와 병해 방제, 성장 촉진용으로 반드시 해야 하는 작업으로 만약 이 작업을 하지 않으면 파래, 매생이, 구주류 등의 이물질이 김의 성장을 방해하게 된다.
“그래요? 이렇게 넓은데, 사람을 쓰지 않는다고요?”
해남에서 가장 큰 규모의 양식장.
사람을 쓰지 않고서는 도저히 활성 처리제 작업을 할 수 없는 규모다.
“여긴 그래서 좋다니까.”
“여기 직원이 많은가요?”
“아니. 열 명도 안 넘을걸?”
열 명도 안 되는 사람이 배를 타고 바다 한가운데 있는 곳에 활성 처리제를 뿌린다라…….
아마 10시간 이상이 걸릴 것이다.
한 마디로 말이 안 된다.
“흠……. 이상하네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봤다.
한곳에 쌓여 있는 유기산 활성 처리제의 빈 페트병들을 보고 그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오른손을 내밀어 페트병들의 표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렇게 한참을 만졌지만, 어떤 기억도 들리지 않았다.
작업을 할 때 두꺼운 장갑을 껴서 그런 것인가?
나는 옆에 버려진 목장갑들의 무더기 위에 오른손을 올렸다.
그때 비로소 들려오는 이들의 기억.
<우리가 원액을 붓는 것도 아니고. 왜 반대를 하는 거야?>
<이렇게 금방 끝나고 효과도 훨씬 좋은데 말이야.>
정부에서는 김 양식 과정에서 산의 농도가 짙은 무기산을 쓰지 못하도록 규제했다.
이는 먹거리의 안전을 위해서였고, 그래서 대부분의 김 양식장은 비싸고 효율도 낮은 유기산 제품을 쓰면서 5배가 넘는 작업 시간을 들이고 있다.
설마 이들은 유기산이 아닌, 무기산을 쓰는 것인가?
그래서 이 유기산 페트병에는 기억이 들리지 않았던 것인가?
나는 페트병 하나를 꺼내 구석에 적힌 유통 기한을 확인했다.
2012년 2월 17일.
무려 8년 이상 된 병들이다.
그렇다면 이건 단속을 피하고자 마련해 둔 궁여지책용인가?
참 기가 막힌다.
사람이 먹는 제품에 염산이랑 가까운 무기산 활성 처리제를 뿌리다니…….
내가 페트병을 하나하나 꺼내서 유통 기한을 확인하는 그때,
“이봐요! 거기 뭐하는 겁니까?”
덩치가 큰 한 남자가 소리를 지르며 내게로 다가왔다.
나는 페트병 하나를 들고 그의 앞으로 천천히 다가가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뭐요?”
“유통 기한이 8년이나 지났잖아요.”
“아……. 이거 수거 업체가 일이 많아서 밑에 있는 것들은 못 가져간 겁니다. 최근에 쓴 약병은 위에 쌓아 놔서 그건 다 가져갔어요.”
준비된 시나리오대로 말하는 남자.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그는 아마도 이 양식장의 가장 막내인 것 같았다.
“그래요?”
“네. 왜요?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여기 사장님이랑 저희 차장님은 어디 가셨나요?”
그제야 구겼던 인상을 피는 남자.
내가 단속반인지 알고 그렇게 쏘아 댔나 보다.
남자는 멀리 떨어진 컨테이너 사무실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 마프에서 오신 분이구나. 두 분은 사무실로 들어가셨습니다.”
나는 남자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사무실을 향해 걸어갔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안에는 정진택 차장과 양식장의 사장이 소파에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이사님!”
정진택 차장은 사무실로 들어오는 나를 보고 환하게 웃으며 브이를 그려 보았다.
“네?”
“사장님이 진짜 잘해 주셔서 킬로에 천 원에 가져가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내년 수확부터는 전부 다 우리한테 주신다네요. 하하하.”
“그래요?”
나는 정진택 차장의 옆에 앉아 양식장 사장을 쏘아보며 말했다.
“사장님.”
“네?”
“먹는 거로 장난치면 안 되죠.”
“장난이라뇨?”
“사장님 아들딸이 염산이 들어간 김을 먹는다고 쳐 봐요. 기분 좋겠습니까?”
내 차가운 말투에 양식장의 사장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답했다.
“뭐, 잘못 알고 오셨나 본데, 무기산 활성 처리제 거래 장부 보내 드렸잖아요!”
“맞아요. 이사님 그건 저도 처음에 확인했습니다.”
정진택 차장이 고개를 돌려 양식장 사장의 말에 동의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보여 주기 식의 장부일 뿐.
실제로 유기산의 제품을 써서 바꿔치기한 것이 분명하다.
나는 팔짱을 끼고 뒤로 기대어 앉아,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경찰을 불러야겠네요.”
“불러보시든가! 내가 여기 정 차장 열심히 일하는 거 같아서 잘해 주려 했더니…….”
“경찰이 오면 그때 말씀하시죠.”
내가 밖으로 나가자, 정진택 차장이 부랴부랴 내 뒤를 따라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