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140화>
141. 많이 힘들 겁니다
늦은 밤.
파란 천막을 손으로 들추고 허름한 포장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포차의 가운데에는 진한 기름 냄새를 풍기는 커다란 기름 난로가 있었고, 사방에 놓인 간이 테이블 앞으로 사람들이 옹기종기 앉아 있었다.
그리고 가장 끝.
난로의 열기가 미치지 못하는 곳에 앉은 최구열 이사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자신의 잔에 조용히 술을 따르고 있었다.
한 시간 전, 그의 갑작스러운 전화에 이곳으로 달려왔다.
왜 나를 불렀을까?
또 홀푸드마켓과 아마존을 설득하려고 하는 것일까?
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한 걸음 앞으로 걸어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최 이사님.”
“아……. 왔어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는 최구열 이사.
그는 원래 나에게 존대를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내가 이사에 선임된 이후로는 사석에서도 쉽게 말을 놓지 않았다.
“말씀 편하게 하세요.”
“지금도 편합니다.”
술을 많이 마셨는지, 그의 얼굴은 이미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초점을 맞추지 못하는 눈빛.
반쯤 풀린 넥타이와 바지 밖으로 끄집어 낸 셔츠.
이렇게 헝클어진 모습을 보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앉아요. 식사는 했어요?”
“네, 했습니다. 혼자 드신 건가요?”
최구열 이사는 내 질문에 답하지 않고 빈 소주잔을 허공에 들며 새로운 잔을 가져다 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잠시 후, 포차의 아주머니가 소주 한 병과 소주잔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으며 최구열 이사에게 말했다.
“아들?”
최구열 이사는 나이에 비해 더 들어 보이긴 한다.
그래도 아들이라니…….
이건 좀 심했다.
“사장님. 내가 그렇게 늙어 보여요?”
“아닌가?”
“아니에요. 내가 몇 살인데…….”
“여기 이 총각이 너무 젊어 보여서. 호홍“
“그래도 너무 섭섭하네. 내가 여기 얼마나 자주 왔는데……. 이럴 때 립서비스라도 한 번 해 주면 얼마나 좋아요?”
“우리 집에 립은 없고, 일단 내가 탕탕이 하나 해 줄게.”
“이게 그 립이 아닌데?”
“나도 다 알아. 그래서 오늘만 특별히 챙겨 주는 거니까 사양 말고 들어요.”
포차의 아주머니는 최구열 이사의 어깨를 툭 치고 재빨리 주방으로 돌아갔다.
진짜 아는 걸까?
나는 피식 웃고, 소주의 뚜껑을 뜯어 최구열 이사의 빈 잔에 술을 따라 줬다.
“계속 혼자 드신 겁니까?”
“아니요. 조금 전까지 화성이 있다 갔어요.”
“유화성 부장이요?”
“네.”
“저 이사님. 둘이 있을 때는 말 좀 편하게 하시면 안 될까요? 제가 불편해서 그럽니다.”
최구열 이사는 씩 웃고, 내 잔에 술을 따라주며 말했다.
“정말 불편해요?”
“네, 상당히 불편합니다. 여기 사장님은 아들이라고까지 하잖아요. 길 가던 사람이 보면 욕합니다.”
“하하하, 하긴 그렇겠네. 내가 좀 겉늙었죠? 하는 짓도 영 꼰대 같고.”
많이 취했나?
최구열 이사는 농담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나는 테이블 밑에 쌓인 소주병을 힐끔 보고 다시 고개를 돌려 그에게 말했다.
“얼마나 드신 겁니까?”
“글쎄요. 좀 마신 것 같은데. 그래도 더 마실 수 있어요.”
“…….”
“원 이사도 괜찮죠?”
“네, 주세요.”
나는 빈 잔을 두 손으로 공손히 내밀고 그가 따라주는 술을 받았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돌린 후 한입에 털어 넣었다.
“술은 잘해요? 진작 이런 자리를 마련했어야 하는데.”
기억하지 못하나 보다.
김재열 이사와 첫 대면에서 간단하게 술을 마신 적이 있는데.
“네, 기분 맞출 정도는 마실 수 있습니다.”
내 말에, 최구열 이사는 씩 웃고 다시 빈 잔에 술을 따라줬다.
“어때요. 직접 보니까?”
“네?”
“유화성 부장.”
“아……. 네. 좋은 사람 같더군요. 능력도 있고.”
“어디 그뿐인가? 뒷배도 좋잖아요.”
“네. 그것도 그렇죠.”
“솔직히 화성이는 내가 데리고 있기 아까운 놈이죠. 내가 원 이사 무슨 생각하는지 맞춰 볼까요?”
술에 취한 최구열 이사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소주병을 잡고 천천히 자신의 잔 앞으로 가져갔다. 나는 재빨리 그가 들고 있는 소주병을 가로채 두 손으로 그의 잔에 소주를 따라줬다.
“제가 드리겠습니다.”
<내부에서 뽑고 싶다 하더니, 결국 화성이인가?>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진짜 인정해 줘야겠어.>
<하긴, 화성이 만한 놈이 없지. 사실 양주영이나 고동수 밑에 있을 그릇이 아니잖아.>
소주병에서 들려온 최구열 이사의 기억.
그는 이미 내 생각을 알고 있다.
아직 유화성 부장에게도 내 속마음을 말하지 않았는데…….
최구열 이사는 경험이 많은 사람이라 그런지 눈치 하나는 빨랐다.
“화성이를 이사로 선임할 생각이라면, 미안하지만 난 찬성할 수 없습니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당연히 찬성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처음에는 화해 모드로 갈 것 같이 하더니, 이제는 대놓고 해 보자는 건가?
나는 내 잔에 소주를 따르고, 다시 한 입에 털어 넣었다.
“이사님도 유화성 부장이 얼마나 능력 있고, 열정도 있는 사람인지 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말씀하시던 스타성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잖아요.”
“그놈을 아껴서 그러는 겁니다.”
“아껴요?”
“나도 알죠. 능력도 있고, 야망과 열정도 있는 놈이라는 것을. 근데 아직은 아닙니다. 화성이가 이사 자리까지 올라가면, 분명 다치게 됩니다. 이사님은 모릅니다. 그놈이 얼마나 마음이 여린 놈인지.”
“……!”
아끼기 때문에 안 된다는 건가?
솔직히 나도 이것이 가장 걱정이었다.
회사가 유명 국회의원 아들인 그를 이용했다는 비난을 받는 것은 잠깐이지만, 정작 유화성 부장 본인은 그 비난의 굴레에서 빠져나오기 어려울 것이다.
최구열 이사에게도 이런 면이 있었구나.
몰랐다. 그가 유화성 부장을 이렇게까지 생각하고 있을 줄은.
“알겠습니다.”
“…….”
“포기하겠습니다.”
내 빠른 포기가 의외였는지, 최구열 이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괜찮겠어요?”
“네. 유화성 부장이 다치는 것은 저도 원하지 않습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고맙네요. 이해해 줘서. 난 어떻게 원 이사를 설득해야 하나 한참을 고민했네요.”
최구열 이사는 눈웃음을 짓고, 내 잔에 술을 따라줬다.
아깝지만 어쩔 수 없다.
내 욕심 때문에 유화성 부장처럼 좋은 사람을 다치게 할 수는 없으니까.
그렇게 술잔이 오갔고, 최구열 이사는 자신의 속에 있던 말들을 꺼내 놨다.
“미국에서 그룹폰을 오픈했을 때 조그만 동양인이 만든 회사라고 무시를 당했죠. 그래서 이를 더 악물었습니다. 독하게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이해합니다.”
“힘들게 키운 그룹폰을 넘기고……. 그냥 조용히 살려고 했죠. 그런데 어느날 마켓 프레시를 해 보자는 정근영 대표님의 말이 너무 가슴을 뛰게 하더군요. 그룹폰에서 못했던 것들이 너무 많았으니까. 커머스는 나에게도 그런 존재입니다. 좋은 제품으로 소비자를 설득한다는 것은 그만큼 재미있는 일이니까요.”
“…….”
“근데 막상 와 보니 개판이더군요. 김상만 회장이랑 정근영 대표는 맨날 으르렁대고, 체인마켓 출신들은 자기들끼리 똘똘 뭉치고……. 미국에서 온 내 식구들은 여전히 찬밥이더군요. 그래서 싸웠어요. 나도 내 식구들을 다치게 할 수 없으니까.”
어떻게 보면 그도 자신과 자신이 데려 온 식구들을 보호하기 위해 싸웠던 것이다. 그것이 사내 정치 싸움으로 이어졌고, 결국 나와도 대립했던 것이다.
“이해합니다.”
“이해해 주니 고맙네요.”
최구열 이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혼잣말처럼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 * *
“고마워요. 진짜 고마워요.”
고맙다는 말이 벌써 몇 번째인지.
최구열 이사는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술에 취해 있었다.
어떻게 포차에서 버텼는지.
그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다리가 풀려, 여러 차례 바닥을 나뒹굴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와 어깨동무한 채, 택시가 서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댁이 어디세요?”
“한 잔 더 해야죠! 오늘 우리 마프의 기둥들이 똘똘 뭉쳤는데! 안 그래요?”
“다음에 하시죠. 오늘 많이 취하셨습니다.”
이런 모습은 처음이다.
무엇이 완벽해 보이던 그를 무너트렸을까?
자신이 데려온 직원들이 하나둘 내쳐지면서?
아니면, 지분과 경영권 싸움에서 완전히 뒤처지면서?
아니다.
그때도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다.
지금 그가 이렇게 힘들어 하는 것은 바로 자신이 아끼는 사람, 즉 유화성 부장을 걱정하는 마음에 이렇게 된 것이다.
나는 몸도 가누지 못하는 그를 질질 끌고 택시를 멈춰 세웠다.
“이사님! 이사님! 댁이 어디세요?”
그를 택시에 태우고 흔들어 깨웠다.
그리고 어렵게 집 주소를 들은 후, 택시기사에게 오만 원권을 쥐여 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좀 부탁드릴게요.”
“아……. 술 취한 손님 잘 안 태우는데…….”
“잔돈은 가지시고요. 아마 가는 내내 주무시기만 할 겁니다.”
간신히 만취한 그를 택시에 태워 보내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지이이잉! 지이이잉!
새벽 1시간 넘은 시간인데.
나는 주머니의 진동을 느끼고 휴대전화의 화면을 확인했다.
“네, 부장님이 늦게 무슨 일이세요?”
- 최 이사님은 가셨나요?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의 유화성 부장.
나는 택시 승차장에 있는 벤치에 주저앉으며 답했다.
“네, 방금 가셨습니다.”
- 이사님. 그럼 실례가 아니면 저 좀 잠깐 볼 수 있나요?
“지금요?”
- 네, 꼭 오늘 뵙고 싶습니다.
“후……. 알겠습니다. 어디로 갈까요?”
- 아까 포차로 오시면 됩니다. 혹시나 해서 다시 왔는데, 이미 가셨더군요.
“네. 금방 가겠습니다.”
* * *
“해 보고 싶습니다.”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유화성 부장이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뭘요?”
“최 이사님에게 들었습니다. 원 이사님이 저를 사내 이사로 추천하실 거라는 말을요.”
“…….”
“하고 싶습니다. 아니 꼭 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부장님. 그건 이미 최 이사님과 얘기를 마쳤습니다. 오늘은 일단…….”
유화성 부장은 결의에 찬 눈빛으로 내 말을 끊어 냈다.
“제가 다친다고요?”
“후……. 그건 저도 최 이사님 생각에 동의합니다. 부장님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그냥 쥐 죽은 것처럼 살라는 겁니까?”
“…….”
내가 아무런 답을 하지 못하자, 그는 글라스 잔에 소주를 가득 따르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내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소리쳤다.
“길에서 침을 뱉어 본 적도 없습니다. 술집에서도 언제나 구석 자리에서 조용히 남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행동했습니다. 심지어 주차 딱지 한번을 끊어 본 적이 없습니다.”
“…….”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겁니까?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도 못하고, 욕심나는 자리도 남들 눈치 보느라 못하는 겁니까? 이 기회를 남들 눈치 보느라 날려 버리라는 겁니까?”
“저랑 최 이사님은, 부장님 걱정이 돼서 그러는 겁니다.”
“마켓 프레시가 이사님들께 소중한 만큼, 저에게도 소중합니다. 기회를 주세요. 이번에도 기회를 놓친다면 평생 두 분을 원망하고 살 것 같아서 그럽니다.”
“그러면, 부장님이 힘들어지실 수 있습니다.”
“차라리 해 보고나 그런 말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해 보지도 않고 도망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나는 그의 진실한 눈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가 마시던 글라스 잔에 소주를 가득 따르고 그대로 마셔 버렸다.
“많이 힘들 겁니다.”
“네.”
“매일 사람들 입에 오르고 내리게 될 겁니다.”
“네.”
“어쩌면 아버님까지 피해를 당할 수 있습니다.”
“네.”
“말도 안 되는 루머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네.”
“후…….”
“더 없습니까?”
나는 고개를 좌우로 젓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좋아요. 해봅시다. 대표님은 내가 설득할 테니, 부장님은 최 이사님을 설득해 주세요. 만약 최 이사님이 반대하시면 저도 찬성하지는 않을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이 판단이 나중에 어떻게 돌아올지 모른다.
설령 잘못되더라도 나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