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138화>
139. 본성이 착한 건가?
* * *
광주 덕산식품 공장.
“피곤하지 않으세요?”
내 질문에, 황규연 부장이 땀을 닦으며 답했다.
“피곤할 틈이 있나요? 요즘은 정말 살맛납니다. 내 평생 이렇게 행복했던 적이 있었나 할 정도로요.”
“노력하셨으니까요.”
“에이. 뭘요. 다들 똑같이 노력하고 사는데요. 그리고, 이사님.”
“네?”
“정말 고맙습니다. 요즘 마누라도 기분이 좋아서 아침에 밥을 다 차려 주더라고요. 하하하.”
사실 황규연 부장에게 마켓 프레시의 이사직을 권유해 볼까 했다.
경험도 많고, 항상 직원들을 위했으며, 블루칼라의 노동자라 사회적인 이슈 몰이도 가능할 것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그는 지금에 만족했다.
그의 나이 62세.
무언가 새롭게 하기에는 어려운 나이며, 덕산식품에 대한 애정도 남다르기에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일시칩 수원 공장에서 추가 생산 들어갔습니다.”
“네. 김경일 팀장님께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쪽 공장에서 둘이나 파견 보냈거든요.”
“아……. 그랬군요.”
“근데 광주까지는 갑자기 무슨 일이세요?”
별다른 주제도 없이 뱅뱅 돌려 말하는 내가 의아했나 보다.
나는 그를 보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냥요. 모처럼 바람도 쐬고, 홍어삼합도 좀 생각이 나고…….”
“홍어요?”
“네, 전에 맛있게 먹었거든요.”
“역시 홍어는 광주죠. 근데 어쩌죠? 오늘은 납품 물량이 밀려서 같이 못 갈 거 같은데…….”
일시칩의 성공으로 덕산의 공장은 24시간 풀 가동 중이었다.
그렇게 해도 물량이 모자라서 온라인에는 아직 풀지도 못하고 있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래도 이사님이 여기까지 오셨는데…….”
“저 진짜 신경 쓰지 마세요. 그냥 바람도 쐴 겸 내려온 거니까요.”
“가만있어 봐. 대호 아시죠? 그놈 오늘 비번인데 부를까요?”
“아닙니다. 정말 괜찮아요. 하핫. 그냥 한 말입니다.”
“대호 놈도 이사님 무지 좋아해서 나오라고 하면 맨발로 뛰쳐나올 겁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약속 있으세요?”
“네. 다음 주에 수원 공장 돌아가는 거 확인하고 다시 내려올게요. 그때 꼭 한잔해요.”
“알겠습니다.”
나는 잔뜩 미안해하는 그를 두고 황급히 공장 밖으로 빠져나왔다.
“어? 이사님! 언제 오셨어요?”
공장의 입구에서 마주한 송민호 부장.
그는 나를 보고 환하게 웃으며 앞으로 다가왔다.
“조금 전에요.”
“미리 말씀 주시면 공항으로 마중이라도 나갔을 텐데.”
“아닙니다. 바쁜 거 아는데 제가 어떻게 그렇게 합니까?”
“그래도 이사님 마중 나갈 시간 정도는 있습니다.”
송민호 부장은 참 좋은 사람이다.
능력도 있고, 아이디어도 많고, 리더십도 있으며, 무엇보다 제품 개발을 주로 했기에 제품을 보는 눈이 남다르다.
하지만 그는 안 된다.
덕산의 실질적인 대표와 같은 그가 없으면, 공장이 멈출 수도 있다.
“그럼 전 올라가 보겠습니다.”
“벌써요?”
“네. 그냥 갑자기 그런 날 있잖아요. 훌쩍 떠나고 싶은 날.”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닙니다. 하하하“
나는 손사래를 치며 덕산의 공장을 빠져나왔다.
* * *
마장동 청년 고기 본사.
“왔어요?”
1층 매장에 앉아 있던 고재익 대표가 나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요즘도 매장에 자주 내려오세요?”
“그럼요. 이건 아버지가 가르쳐 주신 겁니다. 대표도 직접 손님을 상대해야 한다고요.”
고재익 대표는 참 부지런한 사람이다.
큰 육류 유통회사를 경영하면서 일반 소매와 배송까지 일일이 자신의 손으로 한다.
“대표님은 참 부지런하신 거 같네요.”
“그래야 먹고 살죠.”
그는 참 인상이 좋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하지만, 이는 그의 밝은 성격을 나타내는 트레이드마크와 같은 것이었다.
“요즘 괜찮으시죠?”
“네, 아주 좋습니다. 이렇게 좋아도 될까 싶을 정도로요. 근데 무슨 일이 있나요? 이사님이 직접 여기까지 나오시고…….”
“아니요. 그냥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왜 그러세요? 징그럽게……. 하하하“
“너무 징그러웠죠?”
“네, 아주 많이요.”
“저 신경 쓰지 말고 일 보세요. 좀 많이 걸어서 그런데 잠깐 앉아 있다 가도 되죠?”
“물론이죠.”
나는 그가 앉아 있던 원형 간이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오른손을 엉덩이 밑으로 집어넣고 그의 지난 기억들을 살폈다.
<명절 지났으니까 애들 휴가나 좀 보내 줘야지.>
<명가에 들어가는 고기도 좀 썰어 놓고.>
명가는 청년 고기에서 운영하는 정육식당 프랜차이즈로 창업 이후 한 달 만에 30개 이상의 직영점을 오픈한 곳이다.
“명가는 잘 되나요?”
“그럼요. 역시 소비자도 좋은 고기를 알아봅니다. 그리고 워낙 싸잖아요. 큰맘 먹고 중간 유통 몇 단계만 빼니까 바로 싸지더라고요.”
“그래서 요새 돈을 긁어모으신 다면서요?”
“헛, 벌써 거기까지 소문이 났습니까? 하하하.”
“저도 가맹 하나만 내줘요.”
“그럴까요? 하하.”
역시 그에게도 이사직을 제안하긴 힘들겠구나.
나는 씩 웃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고재익 대표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어디 가세요? 식사나 하고 가세요. 고기 좋은 놈 들어왔으니까 맛도 좀 보시고.”
나는 손목의 시계를 보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밥은 아까 먹었고 지금 세 시입니다.”
“벌써 그렇게 됐나요?”
“네. 고기는 다음에 꼭 얻어먹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다음에는 우리 꼭 소주 한잔해요.”
“네. 그리고 저 대표님.”
“네?”
“혹시 주변에 괜찮은 사람 좀 없을까요?”
내 말에, 고재익 대표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사람 소개는 좀……. 그래요. 이게 잘하면 본전이고 못하면 욕을 먹는 거라서요. 근데 어떤 사람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고재익 대표의 말이 맞다.
누군가에게 소개를 받아 데려가는 것은 최구열 이사와 다를 것이 없다.
내가 급하긴 급했나 보구나.
그리고 지영이도 사람들 만나고 다니느라 힘들었겠구나.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 보니 그러네요.”
“급하신 건가요?”
“아닙니다. 그냥 요새 좀 심심한 거 같아서 해 봤습니다.”
“심심하면 저랑 오늘 소주 어때요? 저녁에 제가 그쪽으로 넘어갈게요.”
“아닙니다. 다음에 제가 또 올게요.”
나는 그에게 손을 흔들고 등을 돌렸다.
* * *
다시 돌아온 사무실.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MD 사업부 식구들을 바라봤다.
“과장님! 이번에 포장 누가 한 겁니까? 불량이 너무 많잖아요.”
어깨에 전화기를 걸치고 한 손으로 서류를 넘기는 김태하 차장.
차장으로 승진은 했지만, 그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직접 거래처를 상대했다.
“내가 이 짬밥에 농장까지 직접 가야 해? 알아서 좀 못 움직여?”
부하 직원을 혼내는 정진택 차장.
신선팀은 언젠간 혼날 줄 알았다. 정진택 차장이 관여를 덜하면서 이번 여름, 가을 과일 계약이 늦어졌으니까.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로 가려는 순간.
“이사님!”
한 손에 종이컵을 들고 걷던 김명진 부장이 나를 불렀다.
“응?”
“마케팅 팀에 좀 같이 가 주시면 안 돼요?”
“왜? 무슨 일인데?”
“배너 순서 좀 바꾸겠다는데, 절대 안 된다네요. 도대체 이사님은 그 깐깐한 김태석 부장을 어떻게 구워삶은 겁니까? 그 인간 도통 말이 안 통하던데.”
마케팅 사업부의 김태석 부장은 보통 깐깐한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나도 그를 상대하는 것이 어렵긴 했었다.
“혹시, 심한 말한 거 있어?”
“글쎄요. 좀 격해져서 그랬을 수도 있는데…….”
“김 부장님 따바라 좋아해. 그거 한 잔 사서 최대한 부드럽게 다시 말해 봐.”
“바닐라 라떼요?”
“응, 김 부장님이 강해 보이지만 사실 속은 엄청 여린 사람이야. 미안하다고 하면서 살살 꼬드기면, 금방 넘어올 거야.”
“알겠습니다. 일단 이사님 믿고 그렇게 해 보죠.”
김명진 부장은 일을 참 잘한다.
하지만 그에게는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 있다.
바로 저 분노조절 장애.
그는 가끔, 의견이 맞지 않는 사람에게는 죽일 듯이 달려든다.
전에 고동수 부장과 한바탕 했던 것도 아직 앙금이 가라앉지 않았을 텐데…….
이번엔 그 욱하는 성질 버리고 잘하려나?
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 씩 웃었다.
그리고 내 방으로 가려는 순간, 빠르게 걸어 온 이예나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휴……. 다행이네요. 시간 맞춰 오셔서.”
“약속 있었어?”
“모르셨어요? 전략기획부 유화성 부장님 오신다고 하셨잖아요.”
유화성 부장.
그는 얼마 전 양주영 부장이 퇴사하고 전략기획부의 새로운 부장이 됐다. 그 또한 최구열 이사와 그룹폰에서 근무했었으며, 양주영 부장의 밑에서 오랫동안 일을 해 왔다.
하지만 이상하게 나와는 접점이 없었다.
지난 1년간 대화를 한 것이 손에 꼽을 정도의 사람이다.
“아 그랬지? 오셨나?”
“네.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내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테이블에 앉아 있던 유화성 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30대 후반의 나이.
머리를 짧게 잘라서 그런지 나이는 30대 초반으로 보인다.
그리고 하와이 셔츠 같은 것을 자주 입었던 것 같은데, 오늘도 역시 화려한 문양이 그려진 셔츠를 입고 있었다.
“제가 좀 늦었죠?”
“아닙니다. 제가 약속보다 일찍 왔습니다.”
“네. 앉으세요.”
오늘은 인사를 하겠다고 온 자리.
그와 딱히 할 말이 없다.
나는 내 앞에 놓인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요즘 전략기획부는 어때요?”
“좋습니다.”
이렇게 단답형으로 답하니, 더 할 말이 없어지는구나.
나는 형식적인 미소를 보이고, 다시 할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자 유화성 부장도 할 말이 없었는지,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내 방 안을 천천히 살폈다.
“좋네요. 잘 꾸며 놓으셨네요.”
“꾸미긴 뭘요. 그냥 있는 짐들 대충 때려 박은 건데.”
“그런가요? 하핫, 이사로 선임되시고 부서원들이랑 같이 있어 주시고……. 부럽습니다.”
“왜요? 최 이사님도 잘해 주시잖아요.”
“네. 잘해 주십니다.”
진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유화성 부장.
정말 잘해 주나?
그는 사고만 터지면 꼬리 자르기 바쁜 사람인데…….
“부장님 표정 보니까 정말 많이 잘해 주시나 본데요?”
“그런가요? 하하.”
그의 표정에는 거짓이 전혀 묻어 있지 않았다.
양주영 부장도 최구열 이사의 뒷담화는 종종 했는데…….
나는 갑자기 그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그의 손을 확인하고, 오른손으로 테이블을 훑어 기억을 살폈다.
<최 이사님 아니었으면, 이렇게 한국으로 돌아오지도 못했을 거야.>
정말 최구열 이사와 무슨 사연이 있나 보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
“요즘 상장 준비하느라 바쁘죠? 하필 이런 시기에 승진하셔서. 하하.”
“뭘요. 원래 해 왔던 일인데요.”
담담하게 답하는 유화성 부장.
그의 표정의 보고 문득 들었던 소문이 기억났다. 일하지 않던 양주영 부장이 누군가에게 자기 일을 다 미뤘다는 소문이.
혹시 그 사람이 유화성 부장일까?
“부장님은 양 부장님이 나가셔서 좋겠습니다.”
“네?”
“그전에 일은 일대로 하고, 공은 양 부장님이 다 챙겨 가고.”
“아닙니다. 그런 거 없었습니다.”
그리고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기억 또한 마찬가지다.
<양 부장님도 좋은 분이셨지. 다만 욕심이 좀 많으셔서…….>
본성이 착한 건가?
보통 이 정도하면 속으로는 그 사람을 원망하거나 욕을 할 텐데…….
신기했다.
아직도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것이 말이다.
나는 그에 대한 궁금한 마음에 다시 질문을 이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