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억을 듣는 회사원-134화 (134/223)

<기억을 듣는 회사원 134화>

135. 내게 좋은 수는 상대방에게도 좋은 수

* * *

“두 분 다 제정신입니까?”

이사회의.

덕산을 인수하자는 말을 들은 최구열 이사가 대뜸 소리를 질렀다.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부채가 200억이 넘는 회사.

그것도 내일 당장 폐업 신고를 해도 모자를 회사를 인수하자고 했으니.

“이사님 끝까지 설명을 들어보세요.”

내가 타이르는 듯한 목소리로 말하자, 최구열 이사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슨 설명을 들으라는 겁니까?”

“일단 덕산의 이번 제품을 시식해 보시고 제품으로 판단을…….”

“원지훈 이사님! 우리는 3개월 후에 상장합니다. 근데 하필 왜! 왜 지금 이 시기에 부채가 있는……. 그것도 부채가 200억이 넘는 다 망한 회사를 인수하자는 겁니까!”

최구열 이사는 내 말을 끊어 냈다. 그리고 나와 김지영 대표를 번갈아 보며 다시 소리쳤다.

“그리고 대표님! 대표님은 도대체 무슨 생각이십니까? 원 이사가 원하면 다 찬성하시겠다는 겁니까? 안 됩니다. 절대 안 됩니다. 지금 우리는 이런 말도 안 되는 모험이 아닌 안정을 우선으로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최 이사님. 언제 원지훈 이사가 틀린 적이 있었습니까? 제품에 자신이 있다고 하잖아요. 그리고 이번 M&A가 성사되면 과연 우리에게 마이너스일까요?”

옅은 미소를 짓는 김지영 대표.

그녀는 뭔가 계획이 있다는 표정으로 나와 최구열 이사를 번갈아 보며 말을 이었다.

“저는 지금이 가장 적기고, 어쩌면 이번 제안으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얻어요? 도대체 재무 상태가 그 지경인 회사에서 뭘 얻겠다는 겁니까? 그리고 겨우 과자 쪼가리에 적기가 어디 있습니까? 정말 그 제품이 마음에 들면, 샘플 따다가 다시 만들면 그만입니다.”

그의 말이 맞다.

스낵은 비교적 레시피가 단순하여, 얼마든지 모방할 수 있으니까.

예전 꿀 버터 칩의 경우, 겨우 2개월 만에 유사한 상품들이 쏟아질 정도였으니까.

최구열 이사가 양손을 벌리며 소리쳤지만, 김지영 대표는 침착한 표정으로 제 생각을 쏟아 냈다.

“최 이사님. 우리 약간만 틀어서 생각해 보죠.”

“틀긴 뭘 틀어요?”

“겨우 20억 정도면 충분합니다. 100년이나 된 회사를 인수하는 데 겨우 이 정도의 돈이라면 솔직히 복덩이 아닙니까?”

“복덩이요? 하…….”

“네. 복덩이요. 그리고 우리가……. 즉, 상장을 앞둔 회사가 망해 가는 기업을 인수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요? 미친 짓이라고 할까요? 아니면 그 안에 무슨 의미가 있다고 생각할까요?”

“……!”

눈을 동그랗게 뜬 최구열 이사.

그는 안경을 벗고 자리에 털썩 앉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나도 그제야 그녀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었다.

모든 일은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200억의 부채가 있는 회사.

반대로 생각하면 200억의 가치가 있는 회사라 생각할 수 있다. 꼼꼼히 자산의 가치를 따진 은행이 그 정도의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이번 M&A가 성사되면 겨우 20억 정도의 돈으로 200억이 넘는 자산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린 상장을 앞둔 회사.

그런 회사가 200억의 부채가 있는 회사를 사들이면, 외부에서는 필시 무슨 이유가 있을 것으로 판단할 것이다.

결국, M&A는 시너지다.

내게 좋은 수가 남들에게도 좋은 수가 되도록 만드는 시너지.

왜 이 생각을 못했던 것일까?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린 최구열 이사는 어이없다는 미소까지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출 승계가 가능할까요?”

“은행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돈 냄새를 잘 맡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들은 상장을 앞둔 우리에게 힘을 실어 줄 겁니다. 알아서 덕산의 가치를 올리고 이를 홍보해 줄 겁니다.”

“…….”

“사람들은 의심이 많습니다. 우리가 덕산을 인수하겠다고 하면 덕산에 특별한 무언가가 있을 거로 생각할 겁니다. 그리고 우린 정말 특별한 무언가가 있잖아요. 원지훈 이사의 확신. 이보다 더 특별한 게 있을까요?”

김지영 대표는 씩 웃으며,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원 이사님은 덕산의 대표를 만나서 최대한 서둘러 주세요. 저는 다음 주에 긴급 주총을 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모든 상황은 이를 이용하는 사람의 목적에 따라 달라진다.

내가 단순히 덕산의 제품과 그 사람이 마음에 들었다면 김지영 대표와 최구열 이사는 지금 그들의 환경과 주주들의 반응에 더 관심을 보였다.

아직 배울 게 더 많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조용한 일식집.

내 맞은편 자리에 앉아 있는 30대 후반의 남자가 아무런 말없이 술잔을 비워 냈다.

“저는 평생 덕산과 함께 살아왔습니다. 근데 겨우 열다섯 장으로 덕산을 가져가시겠다고요? 하……. 참 어이가 없군요.”

덕산의 대표 김명종.

눈가의 다크서클이 짙은 그는 온몸에 명품을 휘감고 있었다.

부자는 망해도 3대는 간다고 하더니…….

도박에 빠져 있다는 말과 달리 옷과 생긴 것은 멀쩡해 보였다.

“부채가 200억입니다.”

“반대로 얘기하면 200억 이상의 가치가 있다는 말이죠. 제 말이 틀립니까?”

“대표님은 현재도 덕산이 그 정도의 가치가 있는 회사라 생각하십니까?”

“이거 섭섭하군요. 덕산은 지난 100년 동안 이런 일을 수도 없이 겪어 왔습니다. 오늘은 이렇지만, 내일은 달라질 수 있는 회사입니다.”

미세하게 떨리는 눈가.

그리고 한 곳을 집중해서 쳐다보지 못하는 동공.

김명종 대표는 지금 준비해 온 시나리오대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손을 거쳐 갔던 술병에서 들었던 기억과 지금의 말투가 그것을 확신하게 만들었다.

“그때는 지금과 달랐죠. 최소한 대표이사가 신제품 개발과 마케팅을 위해 뛰어 다니셨으니까요.”

“그럼 전 아니라는 겁니까?”

차가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는 김명종 대표.

도박하는 사람의 눈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

바로 저 독기.

이번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내뿜는 표독스러운 눈빛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그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좋습니다. 그 얘기는 그만하죠. 대표님. 그럼 대표님이 생각하시는 적절한 금액은 얼마입니까?”

“큰 거로 백 장은 주셔야 할 겁니다.”

100억, 거기에 200억의 부채와 밀린 이자와 급여까지 계산하면 대략 320억 정도라는 말이다.

이렇게 욕심이 많았었나?

아니면 자신의 회사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재무제표는 보시고 말씀하신 건가요?”

“꼭 숫자가 모든 것을 말해 주지는 않습니다.”

“숫자는 증거죠. 그동안 이 기업이 어떻게 해 왔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에 대한 증거.”

“아니요. 기업을 판단하는 증거는 바로 역사입니다. 90년대에도 이런 적이 있었지만 잘 버텨 냈습니다.”

“그때와 지금은 다르지 않습니까?”

“뭐가 다릅니까?”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는구나.

그렇다면 이제 다른 작전을 시도해 봐야겠구나. 일종의 협박을.

“덕산의 직원들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탐이 날 정도로 좋은 분들이더군요.”

“그래서요?”

“대표님도 아시다시피 저희는 충분한 재력이 있는 회사입니다. 새로운 제과회사를 만드는 데 얼마나 들까요?”

“…….”

“그럼 덕산에 뭐가 남을까요?”

씩 웃는 김명종 대표.

그는 술잔을 비우며 허공을 응시한 채로 답을 했다.

“만나 보셨다니 잘 아시겠군요. 돈으로 그들을 살 수 없다는 것을.”

“…….”

“덕산 맨은 죽어도 덕산 맨입니다.”

김명종 대표는 내가 그 사람들을 탐내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랬기에 덕산의 껍데기가 아니면 그들을 데려갈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직원들의 충성을 이런 식으로 이용하다니…….

그리고 그 충성은 대표이사가 아닌, 회사에 대한 것인데.

화가 났다.

하지만 지금의 자리에서 먼저 화를 내면 그건 바로 패배를 인정하는 꼴이 되는 것이기에 나는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유지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시죠. 서로 생각의 차이가 크니까.”

M&A라는 것은 참 아이러니하다.

우리가 갑의 입장인데, 오히려 매달려야 하는 김명종 대표가 더 느긋하다.

내 실수다.

마음만 급했던 내가 처음부터 실수한 것이다.

다른 작전을 준비했어야 했는데…….

내가 멈칫하는 사이, 김명종 대표는 주머니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다. 그리고 실내에서 너무도 태연한 표정으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제가 BO만 만났겠습니까? 덕산을 탐내는 회사는 여럿 있었습니다.”

하긴 그랬을 것이다.

김지영 대표와 같은 생각을 하는 기업은 그동안 많았을 것이다.

근데 왜 그들에게 팔지 않고 계속 회사를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출근도 잘 하지 않을 정도로 회사에 애정도 없으면서.

“그때는 왜 거절을 하셨던 겁니까?”

“그럼 내가 겨우 열다섯 장 정도에 감사합니다. 하고 머리를 숙여야 할까요? 저 그렇게 쉬운 사람 아닙니다. 그리고 그 정도 돈은 하룻밤에도 충분히 만들 수 있고요.”

“생각은 있는 겁니까?”

“좋은 조건이 생각을 만들어 주죠. 새로운 조건을 주시면 그때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김명종 대표는 밥을 먹던 그릇에 담뱃불을 껐다.

그리고 팔짱을 끼고 태연한 표정으로 의자의 등받이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덕산의 사람들, 덕산의 기획제품 그리고 지금의 상황까지.

모든 게 탐이 난다.

하지만 이 김명종이라는 대표의 말과 행동은 그 모든 것들을 반감시켜 버렸다.

“새로운 조건은 없습니다. 생각할 시간은 이틀 드리죠. 그 전에 답을 주셨으면 합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등을 기대고 반쯤 감긴 눈을 한 김명종 대표가 소리쳤다.

“원지훈 이사님!”

고개를 돌리자, 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너무도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이틀까지 갈 거 뭐 있겠습니까? 지금 답을 드리죠. 우린 절대 BO 커머스와 협상하지 않겠습니다.”

이대로 끝이구나.

자신을 덕산 맨이라 부르던 황규연, 송민호 부장과 다른 직원들.

그리고 MD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던 그 스낵과는.

나는 등을 돌려 밖으로 나가기 위해, 식당의 미닫이문 손잡이를 잡았다.

그때.

<덕산까지 내주면 뭐가 남아? 그냥 몇 장 쥐고 나면 땡인데.>

<솔직히 BO 정도면 땡큐지. 이 정도 회사라면 덕산을 다시 끌어올릴 수 있잖아.>

김명종 대표의 목소리.

이 생각을 못했구나.

이 사람은 자신이 혼자 무언가를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열정적인 할아버지, 그 뒤를 물려받은 아버지.

그리고 능력 없는 철부지 도박꾼 자신.

보나 마나 뻔하다.

그런 능력 있는 조부와 부친 사이에서 이놈이 어떻게 살아왔을지.

그리고 처음 이 방을 들어오면서 들었던 그의 기억은 M&A가 아닌, 도박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김명종 대표는 그런 사람이다.

오로지 도박에 대한 생각뿐인 그런 사람.

한때, 기억을 듣는 이 능력으로 카지노에서 살아봤던 나는 이런 놈들이 가장 좋아하는 미끼를 알고 있다.

“덕산의 지분 10%를 남겨 드리죠.”

“……!”

“그럼 되겠습니까?”

“하하하. 이제야 말귀를 좀 알아들으시네요. 그럼 다시 얘기해 볼까요?”

자리에서 일어나 내 앞으로 다가와 손을 내미는 김종명 대표.

이 제안을 받아들이면 앞으로 그는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도박에 빠졌던 지난날을 뉘우치고 지분을 통해 나오는 배당금으로 착실하게 살아가거나.

자신의 지분을 야금야금 팔아치우거나.

그리고 나는 후자가 될 것을 확신했기에 이런 제안을 한 것이다.

내가 내민 손을 무시하고 자리에 앉자, 그는 피식 웃고는 내 맞은편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큰 거 열다섯 장. 그리고 20%의 지분을 남겨 주세요.”

이제 목적을 드러냈으니, 주도권은 내가 가져온다.

“10억에 10%. 그 이상은 절대 드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10%에는 의결권을 드리지 않을 겁니다.”

“그럼 나는 돈만 먹고 빠지라는 겁니까?”

“네. 맞습니다.”

잠시 정적이 이어지고, 김종명 대표는 갑자기 크게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역시 덕산의 가치를 제대로 보고 계시는군요!”

“아니요. 반대겠죠. 대표님이 BO의 가치를 제대로 보고 계시는 거겠죠.”

내게 좋은 수는 상대방에게도 좋은 수가 될 수 있는 법.

지금의 경우가 그렇다.

나는 덕산의 사람과 역사를 가질 것이고, 김종명 대표는 오로지 돈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단언컨대, 그가 이 지분을 파는 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좋아요. 내일 이 시간에 다시 보시죠. 최종 결정은 그때 하겠습니다.”

“아니요. 내일은 선약이 있습니다.”

“그럼 약속이 없는 시간에…….”

“다음 주에 회사로 들어오세요. 그때 다시 얘기하시죠.”

“다음 주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의 김명종 대표.

나는 이제 그를 최대한 달아오르게 하여야 한다.

그래야 이놈이 더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네. 다음 주요. 정확한 날짜와 시간은 따로 연락드리겠습니다.”

나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밖으로 나와 곧바로 김지영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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