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130화>
131. 스펙이 상당하시네요
회의는 최구열 이사의 찬성으로 금방 끝이 났다.
물류 센터의 전 직원들에게 스톡옵션을 배정하기로 했고, 나는 회의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남양주에 남아 있는 마성근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 팀장님!”
- 어떻게 됐어요?
다급하게 묻는 마성근 팀장.
회의 결과를 기다렸다는 것이 목소리에 그대로 묻어났다.
“물류 센터 모든 직원에게 스톡옵션을 지급하기로 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회계 팀에서 마 팀장님 메일로 전달해 드릴 겁니다.”
- 잘됐네요. 다들 좋아하겠어요.
“네, 노조에 전달하고 해산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
- 예,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마성근 팀장이 나를 불렀다.
- 저 이사님!
“네?”
- 고맙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요.
“당연히 그래야죠. 처음에 제가 신경 쓰지 못해서 미안할 뿐입니다.”
- 아닙니다. 어떤 회사가 물류직 직원들까지 챙깁니까? 여기 애들도 분명 좋아할 겁니다.
“네, 그래요.”
- 양 부장이랑 센터장은 어떻게 할까요?
최구열 이사는 양주영 부장과 센터장을 직접 고소했다.
이는 자신도 의심을 받을까 봐 그렇게 처리한 것으로, 나는 뒤처리를 하겠다는 그를 말리지 않았다.
“금방 경찰이 갈 겁니다. 최 이사님이 직접 신고 절차를 밟는다고 하셨습니다.”
- 최 이사님이요?
“네.”
- 믿어도 될까요?
자신의 사리사욕 때문에 노조를 움직인 양주영 부장.
징계 해고는 물론이고 배임, 횡령 등의 법망을 피해 갈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감사 팀 박승하 팀장은 최소 집행유예 이상을 받아서 앞으로 구직 활동까지 힘들어질 것이라고 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나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네. 믿어도 될 겁니다.”
전화를 끊자, 회의에 참석했던 김지영 대표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누구? 특판 팀 마성근 팀장님?”
“네.”
“잘 처리하시겠지?”
“마 팀장도 BO 푸드 물류 관리직에 있어 봐서 이들의 마음을 잘 압니다.”
“그래. 내가 미리 챙겼어야 했는데.”
“아닙니다. 저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요.”
“그나저나 원 이사 오늘 비서 면접 아니야?”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2시 55분.
면접까지 5분이 남아 있었다.
“헛 그러네요.”
“빨리 가 봐. 그리고 꼭 좋은 사람 뽑아. 원 이사를 도와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예.”
나는 씩 웃고, MD 사업부의 사무실로 향했다.
* * *
오후 3시.
MD 사업부 내 방 앞으로 면접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일렬로 앉아 있었다.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 나를 보고 장선영 차장이 옆으로 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내 귓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이사님! 이렇게 늦으시면 어떡해요?”
“시간 맞춰 왔으면 됐죠. 근데 차장님이 왜 여기 계세요?”
“그냥요. 이거 가지고 가세요.”
장선영 차장은 옆구리에 끼고 있던 파일 철을 내밀었다.
파일 철을 열어 보자, 면접을 보게 될 사람들의 이력서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왜 이렇게 늦는 거야? 오늘 면접이라고 말했는데.>
<자꾸 이러면 내가 신경을 안 쓸래야 안 쓸 수 없잖아. 그냥 내가 봐?>
나를 걱정한 장선영 차장의 기억.
평소 시크하고 걸크러시 뿜뿜인 그녀가 이렇게 신경을 써 주다니…….
나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뭐가요?”
“그냥 다 고마워요. 차장님은 이제 일 보시고, 면접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나는 파일 철을 넘겨 첫 번째 면접자의 이름을 확인하고, 대기 중인 세 명의 면접자를 바라봤다.
“한소영 씨.”
20대 중반의 여자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일어났다.
“네.”
“들어오세요.”
“네…….”
나는 사무실로 들어가, 블라인드를 내렸다.
그리고 멀뚱멀뚱 서 있는 그녀에게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다리를 가지런히 모으고 앉은 그녀는 내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스펙이 상당하시네요.”
그녀의 이력서는 무려 7장.
학교 생활과 어학 연수, 봉사활동 등등.
빼곡히 적어 둔 내용이 참 힘들게 살아왔다는 것을 호소하는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뭐가 제일 재미있었나요?”
“네?”
한소영은 내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소영 씨가 이 스펙을 만들기 위해서 해 왔던 일 중 뭐가 제일 재미있었는지 묻는 겁니다.”
“그……. 그건.”
“별로 재미있는 일 없었죠?”
“아닙니다. 자기 계발을 위해서 했던 노력으로 재미있었고, 후회도 없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떨구며 수줍은 표정으로 웃었다.
“여긴 재미있을 거 같아요?”
“네, 재미있게 일하겠습니다.”
뻔한 답이다.
나는 테이블을 오른손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러자 그녀와 함께 공유하고 있는 이 테이블에서 그녀의 기억이 들려왔다.
<마켓 프레시 이사 맞아? 뭐 이렇게 젊어? 그리고 사무실이 왜 사업부 안에 있지?>
<재미없을 것 같다고 하면 안 되겠지?>
나는 그녀의 기억에 귀를 기울이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참 불공평한 거 같아요. 20년이 넘도록 이 악물고 이런 완벽한 스펙을 만들었는데. 또 재미없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는 게요.”
“아닙니다.”
<그러게. 사는 게 왜 이렇게 재미없죠? 산 넘어 산이네요.>
손사래를 치며 황급히 답하는 한소영.
겉으로 보이는 표정과 생각이 확연히 다른 사람이다.
나는 파일 철을 넘겨, 장선영 차장이 꼭 물어보라고 했던 질문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빼곡히 적어 둔 그녀의 손 글씨에 피식 웃으며 다음 질문을 이어 갔다.
“다른 회사도 지원하셨나요?”
“아닙니다. 마켓 프레시만 지원했습니다.”
“왜죠?”
“마켓 프레시의 회원으로 꼭 여기서 일해 보고 싶었습니다.”
“주로 어떤 제품을 구매해 보셨나요?”
“우유와 퓌레는 삼 일에 한 번씩 구매했습니다.”
너무 교과서를 읽는 느낌이다.
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다음 질문을 이었다.
“회원 아이디를 물어봐도 될까요?”
“네?”
<아이디는 왜? 구매 내용 일일이 까보려는 거야?>
당황한 한소영.
역시 답변과 생각은 다르다.
“비서학 전공자가 아니시네요?”
“네. 비서학 전공은 아니지만, 비서가 되기 위해 모임에도 나갔고 자격증까지 취득했습니다. 그리고 사설 학원에서 교육을 배우면서 실무 훈련도 많이 쌓았습니다. 전공과 다르다고 걱정하실 수 있겠지만, 다양한 경험을 해 본 사람으로 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달달 외운 질문이 그대로 나왔네.>
면접을 통해 암기 능력을 볼 생각은 없다.
나는 파일 철을 덮고, 테이블 위로 깍지를 꼈다.
“자, 그럼 이번에는 소영 씨가 외우지 못했을 것 같은 질문을 해 볼게요.”
“네?”
“북극곰 한 마리가 방에 들어왔다고 상상해 보세요. 그것도 명품 슈트를 입고 노크까지 하고 두 발로 걸어서 들어왔다고 쳐 보죠. 북극곰이 우릴 보고 뭐라고 할까요?”
“네?”
테이블은 답변하지 못하는 그녀의 생각을 들려줬다.
<이 새끼 완전 잘또 네.>
잘또? 이건 무슨 줄임말이지?
나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빨리 답을 달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자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화……. 환경 보호를 해 달라고 할 것 같습니다.”
<북극곰은 또 무슨 개소리야. 아……. 잘또 새끼.>
사라지는 북극곰이라는 홍보 영상 때문에 사람들은 북극곰을 환경 보호의 아이콘쯤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그녀도 북극곰이라는 말에 대뜸 환경 보호 먼저 생각했을 것이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
오랫동안 공부만을 해 온 그런 평범한 사람.
어딜 가도 흔하게 만날 수 있는 그런 사람.
나는 다시 이력서를 펼치고,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여기 와서 왜 그 얘기를 할까요? 환경부나 환경 단체를 찾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그……. 그건.”
“네. 수고하셨습니다.”
그렇게 면접은 계속됐다.
나의 황당한 질문에 다들 답을 하지 못했고, 어디서 면접 질문을 들었는지 장선영 차장이 다음 면접자를 대신해서 들어왔다.
“이사님!”
“네?”
“뜬금없이 면접에 북극곰이 왜 나와요? 그리고 자신을 동물에 비유해 보라는 건 또 무슨 소리예요?”
“어떻게 알았어요?”
“면접자들 얼마나 수군대는지 알아요?”
“그랬어요?”
“네. 도대체 왜 그런 질문을 하시는 겁니까?”
“똑같은 교육에 똑같은 스펙을 가진 사람들이라서, 이런 질문이 아니면 구분하기 어려울 것 같아서요.”
장선영 차장은 내 말뜻을 이해하고,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하……. 그래도 그렇지. 그래서 답이 뭡니까?”
“없어요.”
“네?”
“그냥 기발하고 재미있는 답을 하는 사람을 찾는 겁니다.”
“이사님답네요.”
“아 그리고……. 차장님. 잘또가 뭔가요?”
“왜요? 누가 이사님한테 대놓고 잘또래요?”
“아뇨. 대놓고는 아니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걸 들어서요.”
“그 면접자 사람 볼 줄 아네.”
“뭔데요?”
“잘생긴 또라이.”
잘생긴 또라이라…….
뭐, 기분 나쁜 말은 아니구나.
나는 피식 웃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장선영 차장에게 말했다.
“다음 면접 좀 볼게요. 이제 두 명 남았네요.”
“아……. 네.”
장선영 차장이 나가고, 나는 다음 면접자를 내 방으로 불렀다. 그리고 이력서가 있는 파일 철을 넘기며, 앵무새같이 똑같은 질문을 했다.
“이예나 씨. 스펙이 좋으시네요.”
“네, 하기 싫은 것들 하느라 죽는 줄 알았습니다.”
“하기 싫었어요?”
“네, 누가 하고 싶어 하겠어요?”
망설임 없이 답하는 이예나.
그녀는 커다란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나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이전의 면접자들과 다를까?
힘이 잔뜩 실려 있는 그녀의 목소리에 이상하게 기대감이 들었다.
“음……. 이예나 씨가 채소로 환생하면 어떤 채소가 될 거 같아요?”
나는 그녀와 마주한 테이블을 오른손으로 쓰다듬으며 그녀의 기억을 훑었다.
<시작이구나.>
그래. 시작이다.
뭐라고 답할 것인가?
그녀는 기대에 찬 내 눈빛을 물끄러미 보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상추나 깻잎 같은 쌈 채소가 될 것 같습니다.”
“왜죠?”
“제가 워낙 사람을 잘 감싸는 사람이라서 그렇습니다.”
사람을 잘 감싼다라…….
이는 비서로서 자신의 성격이 딱 맞는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나는 피식 웃고, 또 황당한 질문을 했다.
“북극곰 한 마리가 방에 들어왔습니다. 그것도 명품 슈트를 입고 노크까지 하고 두 발로 걸어서 들어왔어요. 북극곰이 뭐라고 할까요?”
“왜 마켓 프레시에서는 바다표범을 안 파냐고 물어볼 거 같습니다.”
바다표범은 북극곰의 먹이.
역시 그녀는 내 예상을 뛰어넘는 답변을 했다.
“그럼 입장을 바꿔 보죠. 제가 답을 할 테니, 예나 씨가 질문을 해 보시겠어요?”
내 말이 끝나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사님께서 팔고 싶은 물건이 있는데, 이를 회사의 다른 직원들이 반대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런 제품이라면 팔지 않겠죠.”
“근데 그 제품이 다른 오픈마켓에서 대박을 쳤어요. 이사님의 판단이 맞았던 거죠. 그럼 다음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직원들을 문책하실 건가요?”
“아니요. 우리가 그 제품을 팔았다면 망했을 겁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마켓 프레시의 제품들은 다 MD의 손을 거쳐서 탄생하는 겁니다. 그래서 판매 전부터 MD가 실패할 거로 생각했던 제품은 절대 성공할 수 없습니다.”
“MD의 판단이 옳았다는 건가요?”
“네.”
“그럼 이사님. 전 어떻습니까? 저도 판단해 주시겠습니까?”
기가 찬다.
어디서 이런 인물이 나온 것인가?
나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나에게 이런 답을 유도한 그녀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성공하실 겁니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서 이곳에 왔습니다.”
“출근은 언제부터 가능하시죠?”
“원하시는 시간에 맞추겠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비서를 허드렛일만 하는 사람으로 취급한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비서는 나와 가장 가까이서 일에 관한 얘기를 공유하고, 내 의견을 대신 전달해 주거나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래서 비서 면접에 공을 들였던 것이다.
160이 안 되는 작은 키에 아직 젖살도 빠지지 않은 얼굴의 이예나.
22세의 그녀는 다른 면접자들과 확연히 달랐다.
내 질문에 망설임 없이 답했고, 그 답들 모두가 날 만족하게 했다.
순발력과 위기 대처 능력.
자신이 원하는 대화로 끌어가는 능력은 다른 MD들을 뛰어넘는 것 같았다.
“좋아요. 곧 연락드리죠.”
나는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면접을 마치고 나가는 그녀는 문을 닫기 전 내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