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129화>
130. 영업 방해가 맞으니까, 그냥 두세요.
3층 물류 센터장의 사무실.
가관이었다.
소파에 앉은 채로 다리를 테이블 위로 올리고 잠들어 있는 양주영 부장.
그의 맞은편에 앉은 센터장은 책을 보며 바둑돌이나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사태가 이 지경인데…….
너무도 태연한 그들의 모습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양주영 부장님.”
나지막한 내 목소리.
하지만 그는 양손을 가슴 위에 올린 채로 마치 죽은 사람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반면 그제야 나를 확인한 센터장은 한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양주영 부장을 흔들어 깨웠다.
“저……. 부장님. 부장님.”
“아……. 왜!”
“부장님. 저…….”
“뭔데? 뭔데 그렇게 호들갑이야?”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고개를 돌린 양주영 부장.
그는 잔뜩 화가 난 나를 보고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쿠웅!
다리가 꼬여서 바닥에 형편없이 나뒹굴고 말았다.
그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뒤에 있던 마성근 팀장과 김대성이 키득거렸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위원장을 데려오세요.”
“네?”
“내 앞에 지금 당장 데려오라고요!”
불 같은 내 목소리에, 뒤에서 키득거리던 마성근 팀장과 김대성이 웃음을 멈췄다.
“저……. 그게.”
“뭐 합니까? 빨리 안 갑니까?”
“저……. 그게 노조의 요구가 너무 어이가 없어서…….”
“양주영 부장님!”
“…….”
회사에서 이렇게 소리를 질러본 적이 있었던가?
내 모습에 당황한 마성근 팀장과 김대성이 양쪽에서 내 팔을 잡아당겼다.
“이사님. 진정하세요.”
“이사님! 이사님!”
팔을 크게 흔들어 둘을 뿌리치려는 순간, 나도 모르게 양주영 부장이 앉아 있던 소파를 스치고 말았다.
<역시 처남을…….>
그의 음흉한 목소리.
일단 이 기억을 끝까지 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오른손을 소파에 기대고 서서, 양주영 부장을 노려봤다.
<역시 처남을 박아 두길 잘했어. 하여간 이런 쪽으로는 누나 닮아서 머리가 비상하다니까. 흐흐>
<못 배운 것들. 조금만 선동하니까 날뛰는 꼴 하고는.>
<빌어먹을. 왜 원지훈이가 온 거야?>
처남? 노조 위원장이 양주영 부장의 처남이었단 말인가?
그래서 미리 짜고 지금의 사태를 만들었다는 것인가?
무엇 때문에…….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꾸민 것일까?
머릿속에 가득한 의문들.
나는 침착하게 소파의 상석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소파를 훑기 시작했다.
<노조 간부들에게만 스톡옵션 50만 주를 배정하는 거야.>
<내 사람들이니까, 이는 나중에 큰 힘이 되겠지.>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다가 나중에 주총에서 짜잔 하고 내가 등장하면? 생각만 해도 재미있겠어.>
센터장과 양주영 부장의 목소리.
스톡옵션.
이를 목적으로 자신의 사람들에게만 많은 배당을 하려고 했구나.
노조 위원장의 선임은 두 달 전.
내가 힘들게 경영권 방어를 위해 뛰어다니는 사이, 양주영 부장은 센터장과 손을 잡고 지금의 시나리오를 준비했던 것이다.
나는 최대한 침착한 표정으로 물었다.
“노조가 원하는 게 뭡니까?”
“뻔하죠. 임금 인상과 신규 인력의 충원입니다. 솔직히 이걸 다 수용하기에는 무리입니다. 상장이 코앞인데……. 이런 걸로 부스럼 만들면 우리만 손해입니다.”
“그래서 위원장을 업무 방해로 고소한 겁니까?”
“사실, 그 친구가 원하는 게 너무 어이가 없어서…….”
말끝을 흐리는 양주영 부장.
배우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연기다.
“말씀해 보세요.”
“직접 보시겠습니까? 입에 담기도 무안해서…….”
“주세요.”
내가 손을 내밀자, 양주영 부장은 책상 위에 있는 파일 철을 조심스럽게 건넸다.
노조 간부들에게 스톡옵션 50만 주를 내달라는 협상문서의 초안.
혹시 최구열 이사와 관련이 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그는 사람을 잘 믿지 않는다.
만약 그가 이 일과 관련이 있다면, 노조 위원장의 자리에 자신의 지인을 박아 뒀을 것이다. 그리고 이 정도로 허술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는 파일 철을 덮고, 뒤에 있는 마성근 팀장에게 보라는 손짓을 했다.
그리고 양주영 부장을 보며 말을 이었다.
“최 이사님께 보고하셨습니까?”
“지……. 지금 보고하려 했습니다.”
“부장님. 정말 이 협상안이면 된답니까?”
“네…….”
“그럼 하세요.”
“네?”
“최 이사님께 보고하시라고요.”
“지금요?”
“네. 지금 제 앞에서 전화하세요.”
양주영 부장은 책상 위에 있는 일반 전화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최구열 이사에게 협상안 초안의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든 내용이 전달되고.
나는 양주영 부장에게 손을 내밀어 전화를 바꿔 달라는 손짓을 했다.
“원지훈입니다.”
- 원 이사! 이게 다 무슨 말이야?
화가 머리끝까지 난 최구열 이사.
그리고 오른손으로 잡은 수화기에서는 양주영 부장의 기억이 들려왔다.
<아 머리 아파. 시간을 더 끌었어야 하는데. 괜히 원지훈이 놈까지 껴서…….>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스피커폰 버튼을 눌러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했다.
“들어서 아시겠지만, 노조 간부들에게 스톡옵션 50만 주를 배정해 주면 노조를 설득하겠다고 합니다.”
- 돈벌레 같은 놈들……. 그래, 자네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최 이사님이 결정하셔야죠. 결정권자는 제가 아니라 최 이사님인데.”
- 센터가 멈추면 손실이 얼마나 날 것 같나?
“하루에 20억 이상은 날 겁니다.”
잠시 머뭇거리는 최구열 이사.
그는 긴 한숨을 내쉬고 천천히 답을 했다.
- 후……. 알았네. 대표님은 내가 설득해 보겠네.
“그럼 내주겠다는 겁니까?”
- 노조를 설득만 해 준다면야 일단 나쁜 조건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말끝을 흐리는 최구열 이사.
스톡옵션을 직원에게 주식을 싸게 파는 것이다.
단기로 본다면 당장 많은 근로자의 임금과 노동 시간을 줄여 주는 것보다 훨씬 적은 비용이 들어간다.
“그래요?”
- 그래. 그리고 시간도 너무 없고…….
통화 내용을 듣고 있던 양주영 부장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만약 세 시간 안에 해결하지 않으면, 내일 배송에 차질이 생긴다.
그래서 양주영 부장이 시간을 질질 끌었던 것이다.
하지만 틀렸다.
중간에 내가 들어왔기에 이제 조건은 변하기 시작할 것이다.
나는 양주영 부장의 표정을 확인하고 다시 스피커폰의 마이크에 대고 입을 열었다.
“제가 조건을 조금 바꿔도 될까요?”
- 조건을 바꾼다고?
“네. 50만 주를 물류 센터 근무자들에게 스톡옵션으로 내주면 어떨까요?”
물류 센터의 정규직 직원은 400여 명.
그럼 상장 전에 1인당 1,200주 정도를 구매할 수 있다.
- 흠…….
“그들에게도 기회를 주자는 겁니다. 이 회사가 1년 후 더 많이 성장해서 더 큰돈을 만질 수 있는 기회를.”
- 그 조건을 노조 간부들이 수락할까?
“수락할 겁니다.”
내 말 한마디에 얼굴이 잿빛으로 변해 버린 양주영 부장과 센터장.
그들이 받고 싶어 하던 스톡옵션이 400여 명의 직원에게 골고루 나뉠 것에 꽤 당황한 것 같았다.
내가 전화를 끊자, 양주영 부장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현장직 인원들은 언제 그만둘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이런 특혜를 줘 봤자, 이해도 못하고…….”
“노조에서 원한 거라면서요?”
“노조 간부들에게 넘겨주고 밑에 직원들을 설득하면 그만입니다. 그냥 노조 간부들을 이용하세요. 그럼 앞으로 3년은 편해질 수 있습니다.”
“이용이요?”
“네. 현장 애들은 오늘 당장 돈 만 원 더 쥐여 주길 원합니다. 미래? 그런 거 생각할 겨를도 없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놈들이라서 줘 봤자 아무런 도움도 안 됩니다! 그리고 스톡옵션을 살 돈이나 있을까요? 1,200주면 3천이 넘을 텐데요!”
양주영 부장은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어떻게든 끼워 맞추려 했다.
나는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씩 웃으며 고개를 좌우로 살짝 틀었다.
“양 부장님이 왜 이렇게 열을 내실까?”
“…….”
“당장 고소 취하하고 위원장이랑 간부들 데려오겠습니다. 같이 얘기해 보시죠.”
“싫은데요.”
“아까 조금 전까지 데려오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마음이 변했습니다.”
“그럼, 제가 50만 주가 아니라 30만 주 정도로 다운시켜 보겠습니다.”
“오……. 대단한 능력이시네요. 진작 그렇게 하시지. 근데, 그냥 두세요.”
“네?”
“영업 방해가 맞으니까, 그냥 두시라고요.”
나는 말을 마치고, 고개를 돌려 마성근 팀장을 불렀다.
“마성근 팀장님. 전 다시 회사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남아서 이곳 노조들을 설득해 주세요.”
“제가요?”
“네. 이들과 가장 잘 대화할 수 있는 분이니까 맡기는 겁니다.”
“스톡옵션을 물류직 직원들에게도 주겠다는 건가요?”
“네, 최구열 이사님도 수락했으니까 그렇게 될 겁니다.”
“알겠습니다.”
마성근 팀장은 마치 자기 일인 것처럼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양주영 부장이 내 앞을 막아서며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사님. 괜히 일을 크게 만들지 마시고 그냥…….”
“일이 커지는 건가요?”
“당장 제가 가서 노조 위원장이랑 간부들 데려오겠습니다. 말이 통하는 친구들이니까 그들과 얘기하면 더 빨리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나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고개를 돌려 마성근 팀장을 다시 불렀다.
“마성근 팀장님!”
“네?”
“제가 하나 까먹은 게 있군요. 여기 대성이랑 남아서 양 부장이랑 센터장님 어디 못 가게 잘 지키고 계세요.”
“지키라고요?”
“네. 회사로 들어가면 양 부장님이랑 센터장님을 정식으로 고소할 거니까.”
“……!”
내 말에 화들짝 놀란 양주영 부장과 센터장.
그들은 일이 잘못됐음을 직감하고 재빨리 내 옆으로 바짝 달라붙었다.
“이사님!”
“부장님 그리고 센터장님. 이런 장난이 통할 거라고 생각하셨습니까?”
“그게……. 무슨.”
“경찰이 오면 그때 말씀하세요.”
“경찰이요?”
“네, 두 분도 영업 방해를 하셨으니까.”
“그게 무슨 말입니까!”
“몰라서 물으십니까? 양 부장님은 머리 좋은 처남이 있어서 참 좋으시겠습니다.”
처남이라는 말에 양주영 부장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그리고 옆에 있던 센터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저, 이사님! 이사님 그게 아니라.”
나는 그들을 뿌리치고,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머리에 붉은 띠를 매고 사무실 입구에 줄지어 앉아 있던 노조 인원들.
그들은 계단을 뛰어내려오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다.
이들을 선동해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 하다니…….
난 그들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잠시 멈칫하자, 사람들 무리에 섞여 있던 백발의 남자와 신두현 대리가 앞으로 다가왔다.
“이사님 어떻게 됐습니까?”
다급하게 묻는 신두현 대리.
나는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회사로 넘어가서 대표님과 상의하고 다시 올게.”
“고소는 취하해 준답니까? 위원장님이 없어서 다들 지금 혼란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손목의 시계를 보고, 신두현 대리 옆에 있는 백발의 남자를 바라봤다.
“아까는 정신이 없어서 통성명도 못했네요. 원지훈이라고 합니다.”
“네, 이사님. 물류 팀의 박영철 과장입니다.”
“박 과장님. 여기서 일한 지는 오래되셨죠?”
“BO 푸드에서부터 35년간 일했습니다.”
“그래요. 그럼 다른 노조 분들께 제 말 좀 전해 주시겠습니까?”
나는 그와 신두현 대리를 따로 불러, 사무실에서 알게 된 모든 것을 얘기해 줬다.
처음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들이었지만, 둘은 모든 정황을 맞춰 보며 결국엔 내 말을 수긍했다.
“그랬군요……. 그래서 그렇게 노조 간부들이 감정적인 말들을 쏟아 냈군요.”
“과장님. 노조들을 설득해 주시겠습니까? 내일 배송에 문제만 없도록 이요.”
“네……. 일단 해 보겠습니다.”
“부탁합니다.”
나는 박영철 과장에게 고개를 숙이고, 곧바로 차에 올라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