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128화>
129. 노조에서 파업을 선언했습니다
* * *
깔끔한 원목 책상과 등받이 색상이 다양한 의자.
천장 중간마다 매달려 있는 초록의 화분.
통유리에서 쏟아지는 따뜻한 햇볕과 은은한 실내조명.
검은색 테두리에 깨끗한 유리로 특수 제작된 파티션.
그리고 사업부 한쪽 구석에 유리벽이 쳐진 내가 쓸 공간.
인테리어 공사를 마친 우리의 새로운 사무실은 마치 잘 꾸며진 카페와 같았다. 그것도 따뜻한 초록이 가득한 카페.
“와……. 진짜 좋네요.”
“도대체 얼마나 돈을 얼마나 쓴 겁니까? 하하하.”
“대박! 와 이거 색깔 봐.”
청소까지 깔끔히 마친 이곳은 우리가 꿈꾸던 공간이었다.
부서원들은 신이 난 표정으로 자신의 자리로 걸어가 들고 있던 짐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연신 감탄사를 내뱉으며 개인 집기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유리벽이 쳐진 방 안으로 들어가 널찍한 책상을 바라봤다.
투명한 아크릴로 적힌 명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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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켓프레시 MD 사업부 이사 원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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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끄러미 바라보다, 한쪽에 곱게 접힌 메모지를 발견했다.
메모지를 펼치자 안에는 김지영 대표가 손으로 직접 쓴 메모가 적혀 있었다. 나는 내용을 확인하고 메모지를 주머니 안에 넣었다. 그리고 한쪽에 있는 상자의 짐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그때.
“이사님!”
“와, 방 좋은데요?”
“여기 소파 안 하고 회의 테이블로 하신 거예요?”
마성근 팀장과 정진택 차장, 장선영 차장이 함께 들어왔다.
“테이블이 회의하기는 더 편하잖아요.”
“하긴 뭐 그렇죠. 그나저나 저거 어떻게 하실 거예요?”
“네?”
“저것들이요!”
정진택 차장이 미간을 구기며 밖을 가리켰고, 나는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봤다.
한쪽에 가지런히 줄지어 있는 화분들.
많다. 세 줄로 줄지어 놨는데도 너무 많다.
“와……. 많네요.”
“저거 이 방에 다 들어가면 정글이 되겠네요.”
정징택 차장은 한 손에 들고 있던 A4 종이를 내게 내밀었다.
“뭔가요?”
“선물 보내 준 분들 리스트입니다. 문식이 시켜서 정리하라고 했어요.”
“아……. 네. 오늘 전화 많이 해야겠네요.”
“네. 제가 볼 때는 일주일은 전화해야 할 거 같습니다. 지금도 계속 오고 있거든요.”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마성근 팀장이 환하게 웃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잘사셨네요.”
“네?”
“저 선물들이요. 잘살았으니까, 저렇게 잊지 않고 보내 주는 거죠.”
“그냥 자리가 깡패인 거죠. 마프가 그만큼 컸으니까.”
나는 피식 웃고, 마성근 팀장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을 이었다.
“자리는 마음에 들어요?”
“네, 마음에 쏙 듭니다. 해도 잘 들어오고, 출퇴근길도 안 막히고, 물류 센터도 가깝고.”
“아 참, 물류 센터는 가 봤어요?”
“짐만 정리하고 가려고요.”
“그럼, 저도 좀 데려가세요.”
내 말이 끝나자, 장선영 차장이 허공에 손을 휘휘 저으며 나를 불렀다.
“이사님, 오늘 바쁘시잖아요.”
“제가요?”
“이따 이사님 비서 면접, 까먹으셨죠?”
회사의 이사에게는 비서가 한 명씩 배치된다.
사실, 그동안 나는 혼자 해 왔기에 별로 필요 없다고 생각했었다.
“꼭 있어야 하나요?”
“그럼요. 회사에서 주는 특혜인데 다 챙기세요. 저한테는 다 챙기라고 하셨잖아요.”
하긴 스톡옵션이랑 복지들 꼭 챙기라 했었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그녀에게 질문했다.
“오늘 몇 시죠?”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20분 간격으로 있습니다.”
“하아……. 많네요. 꼭 제가 직접 봐야 하나요?”
“네. 이사님이 제일 많이 마주할 사람이니까 그렇게 하셔야죠.”
나는 고개를 돌려 마성근 팀장을 불렀다.
“팀장님.”
“네?”
“짐은 이따 정리하고 물류 센터 먼저 가 보죠.”
“그럴까요?”
새로 지어진 물류 센터가 보고 싶었다.
공사 도중 종종 보긴 했지만, 직원들이 들어간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네. 지금 바로 갑시다.”
“알겠습니다. 대성이도 같이 가는 데 괜찮죠?”
“네. 좋죠.”
* * *
30여 분을 달려.
나와 마성근 팀장, 김대성이 물류창고에 도착했다.
보라색 벽에 커다란 우리의 로고.
누가 봐도 우리의 물류 센터임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우리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물류가 내려지는 입구 쪽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하지만.
“뭐죠?”
“다들 어디 갔지?”
분주하게 움직여야 할 지게차는 멈춰 있었고, 있어야 할 직원들도 보이지 않았다.
마성근 팀장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휴대전화를 꺼내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잠시 후.
건물 안에 있던 센터장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이사님, 팀장님 오셨습니까?”
“어떻게 된 겁니까?”
“안 그래도 지금 전화드리려 했는데…….”
말끝을 흐리는 센터장.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노조에서 파업을 선언했습니다.”
“파업이요?”
“네. 막아 보려고 했는데, 너무 견해 차이가 커서…….”
노조와 협상의 최고 책임자는 최구열 이사.
그리고 협상의 실무는 전략기획부의 양주영 부장이 담당했었다.
“최 이사님도 알고 계십니까?”
“네. 안 그래도 양 부장이 남양주 센터로 출근했다고 들었습니다.”
“그쪽도 파업인가요?”
“네. 그것보다…….”
“뭐요?”
“양 부장이 업무 방해로 노조를 모두 고발했습니다. 지금 그쪽은…….”
“고소요?”
몰랐다.
그동안 협상이 순조롭다고만 들었는데…….
물류 센터가 멈추면, 신선한 식품을 관리하는 우리에게는 큰 타격이다.
그래서 업무 방해로 고소하고 빨리 처리하려고 한 것 같은데…….
왜 이렇게 강하게 대응했을까?
노조의 요청은 업무 시간 단축밖에 없었는데, 왜 이렇게까지 했을까?
나와 마찬가지로 파업에 대해 잘 모르고 있던 마성근 팀장도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노조들 다 어디 있어요? 남양주?”
“네……. 대부분이 남양주 센터에 있습니다.”
“노조 위원장은?”
“아마 경찰 조사를 받고 있을 겁니다.”
“하아…….”
허공에 한숨을 내쉬는 마성근 팀장.
물류 관리직으로 오래 일했던 그도 이번 일이 결코 쉽게 마무리되지 않으리라 예감한 것이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우선은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든 메워야 한다.
나는 다급하게 센터장에게 물었다.
“가동 가능한 인력은 얼마나 됩니까?”
내 질문에, 센터장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 그게.”
“아직 인원도 파악 못한 겁니까?”
“아……. 아닙니다. 이쪽은 50명 정도고, 남양주는 100명이 조금 넘을 겁니다.”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물류 센터 한 곳마다 200명 이상이 상주해야 한다.
“일단 단기 알바라도 좀 구해 보세요. 근처 아는 인력사무소에도 연락 돌리고, 예전 직원들에게도 전화 다 돌리세요.”
“네…….”
“대성아! 빨리 남양주로 넘어가자.”
내 말이 끝나자, 센터장이 손사래를 치며 우리를 말렸다.
“아……. 안 됩니다. 가지 마세요.”
“네?”
“거기 지금 난장판일 겁니다. 가시면 괜히 노조들한테 봉변이라도 당하시면…….”
“그런 일 없습니다.”
나는 단호하게 답하고, 차가 세워진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 * *
아수라장이 되어 버린 남양주 물류 센터.
붉은 글씨로 쓰인 현수막이 바람에 펄럭이고, 부러진 피켓과 종이 쪼가리들이 사방에 흩뿌려져 있었다.
그리고 차량이 통하는 입구 옆에 줄지어 앉아 있던 30여 명의 창고 직원들은 우리의 차량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대성아 잠깐!”
“세울까요?”
“응.”
차가 멈춰 서고, 나는 곧바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나를 물끄러미 보던 창고 직원 중 한 명이 벌떡 일어났다.
“원 부장님?”
“신 대리! 어떻게 된 거야?”
“부장님. 좀 도와주세요. 최 과장님…….”
거의 울먹이며 말하는 신두현 대리.
특판팀에 있을 때부터 알고 지내던 녀석이다.
그는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BO 푸드의 창고 관리직으로 입사했다. 그리고 BO 커머스 소속으로 바뀐 후, 특판팀과 자주 일을 해 왔다.
20대 초반의 가장인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기에 나와 마성근 팀장이 이 창고에서 가장 좋아하는 직원이기도 했다.
내가 잠시 멈칫하는 사이, 뒷좌석에 앉아 있던 마성근 팀장이 차에서 급하게 내렸다.
“두현아! 어떻게 된 거야? 협상 잘되고 있다고 했잖아.”
“팀장님. 이거 정말 너무하는 거 아닙니까?”
“뭐가?”
“최 과장님이랑 박 과장님 수갑 차고 끌려가셨습니다. 어떻게 협상을 한 번도 안 하고 이럴 수 있는 겁니까?”
협상이 없었다고?
그동안 양주영 부장이 이곳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협상을 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나는 한 손을 올리며 신두현 대리를 불렀다.
“잠깐! 신 대리 한 번도 협상한 적이 없다고?”
“네.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양 부장이 여기 계속 상주하지 않았어?”
“계속 있긴 했죠. 근데 저기 센터장의 사무실에서만 노닥거렸습니다.”
“최구열 이사는?”
“한 번도 못 봤습니다.”
뭘 한 건가?
그동안 협상 중이라는 인트라넷의 보고들은 모두 거짓이었던 것인가?
내가 멈춰 있는 사이, 신두현 대리 뒤에 있던 붉은 머리띠를 한 노조들이 앞으로 다가와 크게 소리쳤다.
“야! 신 대리! 뭐해?”
“그놈들은 말이 안 통하는 족속들이라니까!”
“양복 입은 놈들은 다 똑같지!”
이들은 잔뜩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
도대체 얼마나, 무슨 짓을 했길래, 이렇게 화가 나 있는 걸까?
“말만 번지르르한 새끼들이 뭘 안다고!”
“당장 꺼지라고 해!”
성난 노조들이 다가오자 신 대리는 양팔을 벌려 우리의 앞을 막아섰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당장에라도 우리를 덮칠 것 같은 표정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때.
운전석에 있던 덩치가 큰 김대성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190cm에 100kg이 넘는 거구의 김대성.
고등학교 씨름 유망주였던 그가 양팔을 벌리며 두 눈에서 무서운 위압감을 쏟아 냈다.
“뒤로 물러나세요!”
“물러나세요! 원 부장님하고 마 팀장님은 달라요! 대화로 할 수 있습니다!”
김대성과 신두현 대리의 외쳤지만, 그들은 막무가내였다.
“다르긴 뭐가 달라?”
“다 똑같지! 넥타이 맨 놈들은 다 똑같이 우리 뼛골 빼먹으려는 거야!”
“야! 신두현이 안 나와!”
그리고 그때.
“원 부장? 원지훈 이사?”
노조의 인원에 섞여 있던 백발의 남자가 한 발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고는 빨간 코팅이 된 목장갑을 낀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원지훈 이사님이시죠? 박남기라고 합니다.”
“원지훈입니다.”
나는 그의 손을 오른손으로 움켜잡았다.
<최동연이는 환갑 때도 나와서 일했어.>
<과로로 입원한 민식이까지 불러냈다고? 미쳤군. 아주 돈에 눈이 멀었어!>
<꼴랑 시간당 8천 원 조금 넘게 주면서, 사람을 그렇게 부려 먹어?>
<야근 수당은 왜 깎이는 건데!>
<겉만 그럴싸하면 뭐해? 속은 다 썩어빠진 놈들이!>
그렇게, 들은 지금까지의 기억.
과도한 업무와 부족한 급여에 대해 불만이 가득하다.
“여기로 이사님이 오신 건 처음이군요.”
“최 이사님은 안 오셨습니까?”
“네. 그 인간은 꺼내지도 마슈. 서류 종이 한 번 달랑 보내고, 여기 한 번도 안 왔으니까.”
“양주영 부장은 어디 있습니까?”
“왜? 같이 숨으려고? 저기 3층 사무실에 쥐새끼처럼 숨어 있을 겁니다.”
오늘은 모든 것들이 새롭게 시작되는 날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곳에 온 지금.
새롭게 시작한다는 기분은 우리만의 착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열악한 시스템과 복지, 급여.
본사 직원들의 나 몰라라 식의 방치.
장소만 변했을 뿐, 이들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었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나는 노조들을 가운데로 들어갔다.
그리고 홍해가 갈리듯 좌우로 벌어지는 그들을 지나 3층 사무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