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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듣는 회사원-126화 (126/223)

<기억을 듣는 회사원 126화>

127. 지금까지 쌓아 온 것들이 아깝잖아요

이른 아침.

내 책상 위로 하얀 봉투 하나가 덩그러니 올려져 있었다.

그리고 봉투의 새하얀 겉면에는 사직서라는 글씨가 선명히 적혀 있었다.

이사로 선임되고 받는 첫 사직서.

그것도 상장을 앞둔 지금, 모두가 스톡옵션을 기대했는데.

누굴까?

누가 스톡옵션까지 포기하면서 그만두려는 것일까?

자리에 앉아 봉투를 열어 보려는 순간,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벽에 붙어 있는 인사 발령 공고 때문인가 보다.

“이사님!”

환하게 웃으며 내게 다가오는 박대영 차장.

아니, 이제 부장이다.

나는 재빨리 봉투를 서랍 안에 집어넣고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박대영 부장님.”

“힘 써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 장선영 차장과 김태하 팀장을 놓고 한참을 고민했었다.

그리고 개인의 실적이나 능력을 비교한다면 그들이 더 훌륭하겠지만, 사람을 다루는 리더십은 박대영 차장이 한 수 위라 판단했다.

부장이란 자리는 개인의 능력보다는 부서원들의 능력을 올려 줘야 하는 법.

나는 그래서 박대영 차장을 선택했다.

“아닙니다.”

“앞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허리를 90도로 숙여 보이는 박대영 차장.

나는 무안한 마음에 고개를 돌리고 헛기침을 했다.

그가 자리로 돌아가고, 서랍에 있는 봉투를 조심스럽게 꺼내, 곱게 접힌 종이를 펼쳤다.

사직서

성명 : 장선영

직위 : 차장

사유 : 개인 사유

성의 없고 무미건조한 사직서.

그 안에서 그녀의 나지막한 기억이 들려왔다.

<아……. 재미없다.>

<로또나 살까? 어휴……. 어디서 돈벼락 좀 맞았으면 좋겠다.>

<도대체 그 지경이 될 때까지 뭘 한 거야!>

단편의 기억일 뿐이다.

예상이 가는 것이 있긴 하지만, 일단 그녀에게 직접 들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장님.”

내 부름에,

멍하니 앉아 있던 장선영 차장은 기다렸다는 듯한 표정으로 답했다.

“네…….”

“잠깐 얘기 좀 할까요?”

“네, 아침부터 와인은 심하고, 달달한 라떼는 괜찮죠?”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평소처럼 장난을 치는 장선영 차장.

하지만 그녀의 동공은 심하게 요동치는 것이 보였다.

“위로 갈까요? 아니면 밖으로?”

“밖이요. 멀리 가면 더 좋고요. 헤헷.”

그녀는 검지를 입가에 가져가며, 어울리지 않게 귀여운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녀의 장난에 구역질을 하는 척을 하고,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 * *

달리는 차 안.

출근 시간이 지난 도로는 한산했다.

덕분에 사무실에서 하남까지 걸린 시간은 겨우 20분.

평소보다 두 배는 빨랐다.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던 장선영 차장은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음악을 흥얼거렸다.

봄이 다가오는 지금, 가을이라도 타는 건가?

나는 피식 웃으며 운전하는 내내 닫아 두었던 입을 열었다.

“노래방을 갈 걸 그랬나?”

내 농담에, 장선영 차장은 씩 웃으며 답했다.

“이렇게 다른 여자랑 드라이브하면 대표님께 혼나지 않아요?”

“혼 좀 나죠. 뭐.”

“오! 우리 이사님 꽉 잡혀 사시나 보네?”

“이제 그런 말도 할 줄 알아요? 한국말 엄청 늘었네.”

장선영 차장은 피식 웃고,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봄이네요. 이사님. 창문 오픈, 괜찮죠?”

“네.”

내가 답하자, 장선영 차장은 창문을 열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서울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이렇게 프레시한데. 우리 어디로 가요?”

이제야 묻는구나.

운전하는 내내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더니.

“다 왔어요. 저기.”

김지영 대표와 함께 왔던 커피숍.

커다란 창에 여유로운 북한강의 줄기가 보이는 곳이다.

내가 차에서 내리자, 장선영 차장은 주변을 둘러보고 코를 킁킁댔다.

“커피 향, 좋네요.”

“괜찮죠? 여기가 커피를 직접 로스팅해서 맛도 좋아요. 20분 넘게 달려온 보람이 있을 겁니다.”

“네.”

걸크러시 뿜뿜하던 그녀였는데, 지금 보니 영락없는 여자구나.

나는 북한강이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따뜻한 커피 두 잔을 주문했다.

잠시 후, 주문한 커피가 나오고 따뜻한 머그잔을 어루만지던 장선영 차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해하실까 봐 먼저 말하는 건데. 제 사직서는 이번 인사랑 아무 상관없어요.”

“오해하지 않았는데요?”

“아……. 네. 그럼 다행이고요.”

나는 말없이 강줄기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재미없죠?”

“네?”

“요즘 재미없었죠?”

장선영 차장은 내 눈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차장을 되고 페이가 올라서 좋았는데, 일은 너무 루즈해졌네요.”

그녀는 직접 실무를 보는 것을 좋아한다.

사람을 대하고 상품을 기획하면서 쾌감을 느끼는 인물이다.

하지만 차장, 부장은 실무보다 관리직의 느낌이 강하기에 일에 흥미를 붙이지 못했나 보다.

“그만두면 뭐하게요?”

“말해도 돼요?”

“네. 뭐든 말해도 됩니다. 에이마켓에서 스카웃 제의가 왔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게요.”

내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장선영 차장.

그녀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와, 귀신이네.”

정말인가?

에이마켓에서 우리 직원을 빼 가려 한다는 말을 듣고 농담을 해 본 건데.

“정말요?”

“네, 정말요.”

장선영 차장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답했다.

미국에서 오래 살다 온 사람이라 그런지, 그녀는 언제나 솔직했다. 지금의 표정은 오히려 자랑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차장님. 너무 솔직한 거 아니에요? 그래도 예의상 좀 아쉬운 척이라도 해 주시지.”

“제가 좀 그래요. 하핫.”

“조건은 좋은가요?”

“네, 아주 좋아요. 제가 원하는 일이고, 페이는 베스트고, 환경도 쓸 만하고……. 또 뭐가 있더라? 음…….”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꼽으며 말하는 장선영 차장.

마치, 내가 자신을 잡지 못하도록 미리 선수를 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난 차장님을 잃고 싶지 않아요.”

“빈말이라도 고맙네요. 사실, 고민 많이 했어요. 근데 어쩌겠어요. 이렇게 된 거…….”

나는 일전에 사무실 공공집기에서 그녀의 기억을 들었던 적이 있다.

어린 나이에 미국에 입양이 보내졌던 그녀가 얼마 전에 생모를 만났다는 기억을.

그리고 이 능력…….

기억을 들을 수 있다는 이 능력은 마냥 좋은 것이 아니다.

지금처럼 들으면 안 되는 남의 기억도 강제로 들을 수도 있으니까.

“페이가 문제라면, 그건 제가 해결해 줄 수 있습니다. 이제 몇 달 후면 스톡옵션이 나올 텐데 챙기셔야죠.”

“스톡옵션 좋죠. 근데 반대로 생각하면 줴일(Jail. 감옥) 이잖아요. 1년간 팔지도 못하는데…….”

“재미있지 않아요? 1년 후 나와 동료들이 만든 성과로 더 높은 금액을 벌어 갈 수 있다는 게?”

얼마 전에 만난 생모.

돈이 필요하다는 기억.

이 두 가지를 짜 맞추면 답은 하나밖에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 말을 내가 먼저 꺼낼 수는 없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그녀가 자연스럽게 속에 있는 말을 꺼낼까?

내가 고민하는 사이, 장선영 차장이 자리에서 반쯤 일어나며 말했다.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나는 그녀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조금 전까지 움켜잡고 있던 머그잔에 손을 가져갔다. 그녀를 잡아야 하는 마음이 급했기에.

<일주 3일만 빼달라고 해 볼까? 아니야. 염치도 없지.>

<스톡옵션? 그래. 나도 사람인데 당연히 욕심은 나지.>

스톡옵션에 욕심이 나는 것은 당연하다.

적게는 2배, 많게는 5배 이상도 벌 기회니까.

그리고 일주일에 3일을 빼 달라고 해 본 다라…….

무슨 일이 있는 걸까?

내가 생각하는 사이,

화장실에서 돌아온 장선영 차장은 자리에 앉아 창밖을 바라봤다.

“이사님. 저 와인 딱 한 잔만 해도 돼요?”

“아침부터 와인을?”

“네.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한 잔만요. 네?”

“그래요.”

장선영 차장은 내 답을 듣고 곧바로 와인 한 잔을 주문했다. 그리고 와인에 입술을 조금씩 적시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여기 정말 좋네요. 나중에 누구랑 같이 와야겠네요.”

“누구요?”

“있어요. 그런 사람.”

장선영 차장은 오늘 평소 같지 않았다.

양 볼에 바람을 가득 넣고 허공을 응시하며 안 하던 행동을 자주 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고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뗐다.

“어머니?”

“……!”

놀란 표정의 장선영 차장.

내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대충은 알아요.”

“이사님 설마 직원들 뒷조사하고 막 그래요?”

“우연히 들었어요.”

“민정 팀장이 말했나 보죠? 하……. 걔는 입이 싸서.”

다행이다.

조금 난처했는데, 알아서 넘겨짚어 주는구나.

나는 그녀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커피가 담긴 머그잔을 들어 올렸다.

장선영 차장은 씩 웃고, 다시 와인잔을 들어 올리며 창밖을 바라봤다.

“드라마 보면 친구 얘기라고 하던데, 전 그런 거 못해요.”

“알아요.”

“제가 엄마가 있대요. 30년이 넘도록 모르고 살았는데, 저도 엄마가 있대요.”

“…….”

알고 있다.

그리고 지금 고민도 그에 관한 것이라는 것까지.

장선영 차장은 씁쓸한 미소를 짓고, 다시 창밖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아프대요. 내 엄마라고 하는 그 여자가.”

“…….”

“투석? 그거를 하는데……. 처음 보는 사람인데……. 왜 나까지 아프죠? 여기가 왜 이렇게 찢어질 거처럼 아프죠? 난 처음 보는 사람이데……. 진짜 처음 보는 사람인데!”

장선영 차장은 가슴 한가운데를 가리키며, 격하게 소리쳤다.

북한강의 조용한 분위기와 한가한 커피숍, 알콜이 있는 와인이 들어가면서 감정이 올라왔나 보다.

“…….”

“나……. 이사님한테 너무 솔직했나 보다. 미안해요.”

“가끔은 엄한 사람한테 속 얘기도 하는 겁니다. 그래야 숨이 쉬어지니까.”

내 말에, 장선영 차장의 커다란 눈에서 고여 있던 눈물이 떨어졌다.

나는 말없이 테이블 구석에 있는 휴지를 뽑아 그녀의 앞에 밀어 줬다. 그리고 말없이 그녀의 눈물이 멈추길 기다렸다.

한참 후.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마음은 좀 풀렸어요?”

“네. 좀 후련하네요. 그리고 이사님 진짜 서른 맞아요? 호적 신고를 10년 늦게 했다거나 그런 거 아니에요?”

기억을 듣는 것은 어디까지나 아주 작은 조각일 뿐.

사람의 속마음을 듣는 데는 진실한 마음으로 대해 주는 것뿐이다.

그녀를 잡고 싶다.

음료 쪽에서 그녀만 한 인재는 없고, 많은 여직원의 리더인 장선영 차장이 흔들리면 다른 직원들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

나는 식어 버린 머그잔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부장, 차장, 팀장은 다른 사람을 빛나게 해 주는 사람입니다. 꼭 차장님의 손으로 모든 일을 메이드할 필요는 없어요. 과장, 대리, 사원들이 직접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

“차장님이 가진 노하우를 나눠 주세요. 더 많은 장선영이 이 마켓 프레시에 늘어날 수 있도록요. 그리고 어머니 병간호 할 수 있도록 시간은 빼줄게요. 그동안 어머니랑 못했던 것들 많이 해 봐요.”

“……!”

“이제 부장이 아니라 이사잖아요. 그 정도는 할 수 있어요. 그리고 마지막.”

“…….”

“김재열 사외이사님 아시죠?

“네…….”

“그분이 돈놀이를 좀 하거든요. 아주 저금리로.”

거짓말이다.

내가 가진 돈을 그녀에게 빌려 주기 위해 김재열 이사를 파는 것이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스톡옵션은 그동안 고생한 것에 대한 보상입니다. 못 가져가면 억울하잖아요. 1년간 무이자 거치. 어때요?”

“네? 거치?”

“그러니까 1년간 무료로 빌려 주겠다고요. 그 이후에 주식을 팔아서 갚든, 월급을 쪼개서 갚든, 잘해서 성과급으로 갚든 그건 차장님 마음이고요.”

말없이 나를 바라보는 장선영 차장.

그녀는 잔에 남은 와인을 입안에 털어 넣고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건가요?”

“글쎄요. 나도 몰라요. 근데 지금 차장님을 보내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

“아깝잖아요. 지금까지 쌓아 온 것들이. 그리고 앞으로 할 일들도.”

장선영 차장은 내 마지막 말에 고개를 떨구고 다시 눈물을 쏟아 냈다.

나는 다시 그녀의 눈물을 멈추기 기다렸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녀의 입에서 그 말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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