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125화>
126. 절반은 확보했습니다
- 자네를 한번 믿어 보지.
최구열 이사의 짧은 카톡 메시지.
그가 내 손을 잡는 데까지는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이제 확보한 주식은 총 44%.
시작이 좋다.
나머지 6%의 동의를 구하러 간 정진택 차장이 좋은 소식만 가져오면 이제 한시름 놓는 것이다.
1층 주차장.
차에 시동을 걸고 액셀을 밟으려는 순간.
“이사님! 원 이사님!”
정진택 차장이 차 앞으로 허겁지겁 달려왔다.
차에서 내리자, 그는 손에 들고 있는 가방에서 A4 종이를 꺼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절반은 확보했습니다.”
“벌써요?”
생각보다 빠르다.
그에게 말한 지 겨우 6시간이 지났는데…….
내가 놀란 표정으로 묻자, 정진택 차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 짓은 예전 BO 푸드에서도 여러 번 해 봤거든요. 근데……. 문제가 좀 있습니다.”
“문제요?”
“나머지 3%가 SY홀딩스 직원의 가족이나 지인들이었습니다.”
그랬구나.
역시 김선녀 여사가 여기까지 손을 써놨구나.
나는 서명이 된 종이를 내려놓고, 정진택 차장에게 물었다.
“예상은 했습니다. 차장님 SY쪽에서 우리가 움직이는 것을 인지했을까요?”
“아니요. 절대 그릴 리 없습니다. 주주들의 사돈에 팔촌까지 조사해서 SY와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어 보이는 사람들은 제외했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보낸 9명 모두 서명한 것을 보면, 저희가 제대로 선별한 것 같습니다.”
“네, 잘하셨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정진택 차장이 받아온 서명 종이를 받아 들었다.
이제 확보한 주식은 47%.
3% 이상을 더 확보해야 한다.
그렇다면 마지막 희망은 역시 김상만 회장뿐인가?
내가 고민하는 사이, 정진택 차장이 다급하게 물었다.
“최 이사님은 동의하셨나요?”
“네.”
“흠……. 그럼 47%군요.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일단 회장님을 좀 만나 봐야 할 것 같네요. 수고하셨습니다. 나머지는 제가 해 볼게요.”
“김상만 회장님이요?”
“네.”
내가 고개를 살짝 숙이고 차에 올라타려고 하자, 정진택 차장은 다급하게 운전석의 문을 잡았다.
“이사님!”
“네?”
“혹시 도움이 될지 모르겠는데……. 제 친구 놈들이 BO푸드의 주식을 좀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요?”
“네, 처음에는 저를 돕겠다는 명분으로 조금씩 사들였습니다. 근데 아직도 들고 있더군요.”
5년 전, BO푸드는 경영권을 놓고 한 번의 큰 전쟁이 있었다.
그 전쟁의 주인공은 바로 김상만 회장과 정근영 대표.
BO 푸드를 함께 창업했던 그들은 자신들의 아들에게 경영권을 상속하기 위해 우호 지분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 치열한 싸움에서 김상만 회장이 승리했고, 패배한 정근영 대표와 정진택 차장은 커머스라는 새로운 법인으로 좌천된 것이라 들었다.
그때 확보한 주식을 지금 사용할 수 있다라…….
그들의 지분을 확보해서 김상만 회장을 도울 수 있다면, 커머스 지분을 김선녀 여사에게 팔지 않아도 될 수 있다.
“얼마나 될까요?”
“민우가 만든 홀딩스에만 한 5만 주 정도 들어가 있을 겁니다.”
BO푸드의 5만 주면 지분은 대략 0.8% 정도.
금액으로는 100억 이상이 될 것이다.
그리고 민우라면…….
혹시 지호 엔터의 최민우 대표를 말하는 것인가?
“민우라면, 지호 엔터의 최민우 대표님을 말하는 건가요?”
“어라? 이사님도 민우를 아세요?”
“아니요. 이름만 들어 봤습니다.”
“그놈이 돈 냄새 하나는 제대로 맡는 놈입니다. 그래서 5년 전부터 BO 푸드 주식을 야금야금 사 모았죠.”
“왜요?”
“커머스 처음부터 상장 목표로 만들어진 법인이잖아요. 그거 알고 당장 살 수 있는 지주회사 주식을 사 모은 거죠.”
계열사가 상장하면 지주회사의 주가도 상승하는 법.
그래서 계속해서 BO 푸드의 주식을 사 모았고, 이는 커머스 주식에 관심이 있다는 말이다.
나는 얼굴에 화색을 띠며 정진택 차장에게 물었다.
“전부 다 모으면 얼마나 될까요?”
“글쎄요. 연락을 좀 해 봐야 하는데……. BO푸드 주식은 갑자기 왜요?”
“푸드의 주식으로 회장님을 지지하면서, 회장님이 가진 커머스 주식을 받아 보려고 합니다.”
“아…….”
주식에 대해 해박한 정진택 차장.
그는 내 말을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회장님이 가지고 계신 커머스 주식은 SY홀딩스 자본이 아닌가 보군요.”
“네. 회장님 자본입니다.”
“그래서 SY홀딩스는 푸드 주식으로 커머스 주식을 확보하려는 거고.”
“네. 맞아요.”
“무섭네요. 이현아 대표인지 뭔지……. 어린 친구 같던데.”
“사실 SY홀딩스의 실 사주는 김선녀라는 분입니다.”
김선녀라는 이름에 화들짝 놀라는 정진택 차장.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었나 보다.
“김선녀 회장님이요?”
“아세요?”
“네. 그 할머니 이름 모르면 간첩이죠. 설계하는 애들 사이에서 유명하거든요.”
설계하는 애들은 주가를 조작하는 애들을 말하는 것.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정진택 차장은 한 손을 올려 나에게 잠시 기다리라는 손짓을 하고 등을 돌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렇게 두어 군데 전화를 돌린 정진택 차장은 내게 와서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퇴근하시는 거죠?”
“네.”
“시간 괜찮으시면 같이 가시죠. 민우랑 다른 애들 몇 나오라고 했으니까.”
그들이 보유한 주식이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어쩌면…….
이를 이용해서 김상만 회장이 가진 주식 일부라도 확보할 수 있다.
“가시죠.”
내 말이 끝나자, 정진택 차장은 재빨리 조수석으로 올라탔다.
* * *
“그래서 내가 어떻게 했는지 알아?”
말이 많은 지호 엔터의 최민우 대표.
“역시 민우야! 하하하.”
“잘했네. 정말 잘했어.”
그의 말에 맞장구를 치는 작은 건설회사의 박창민 대표와 제약회사의 김대훈 전무이사.
재벌 2세인 이들은 아버지의 지위에 따라 상하가 나누어져 있었다.
그중 가장 낮은 계급의 정진택 차장.
여기저기 비위를 맞추는 모습이 안쓰러울 정도였다.
그리고 그가 데려온 나도 이들에게는 그저 그런 회사원일 뿐이었다.
“원 이사님이라고 하셨죠?”
한참 동안 떠들던 최민우가 내 술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네.”
“드세요.”
한쪽 팔로 소파를 휘감은 그는 다리를 꼬고 앉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나는 그가 조금 전에 잡았던 양주병을 쓸어 만지며 그의 기억을 훑었다.
<11%나 가지고 있다고? 커머스를 팔라고 해 볼까?>
커머스의 주식을 원하고 있구나.
하긴, 주식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상장을 앞둔 커머스 주식을 탐내는 것이 정상이다.
내가 그의 기억들을 읽는 사이, 최민우는 나를 바라보며 한쪽 팔로 정진택 차장의 어깨를 감쌌다.
“이사님! 우리 진택이 좀 잘 부탁해요. 하하하 그래. BO 때문에 오셨다고요?”
“네.”
“그래요. 말씀해 보세요. 제가 뭘 도와드리면 됩니까?”
“BO 푸드의 주식은 얼마나 가지고 계십니까?”
내 질문에, 최민우는 거만한 표정으로 답했다.
“얘네들이랑 다른 친구들까지 합치면 11만 주는 될 겁니다. 근데, 제가 김상만 회장을 지지한다고 달라질까요? 듣자 하니 상대가 그 할망구인데?”
11만 주면 1.7~1.8% 정도.
김상만 회장이 얼마나 확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면 적은 수치는 아니다.
“지지해 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럼요?”
“푸드의 주식을 커머스의 주식으로 바꿔 달라는 겁니다.”
“스왑을 해 주겠다고요? 하하하하하. 내가 오늘 나오길 잘했네. 정말 잘했어.”
술잔을 내려놓고 크게 웃는 최민우.
그는 자세를 고쳐 앉고,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우리 이사님. 생각보다 화끈하시네. 얼마나 줄 수 있어요?”
푸드의 주가는 한 주당 15만 원대.
그리고 커머스는 장외주식 시장에서 5만 원 정도에 거래됐었다.
주식을 교환하게 되면 3대 1이 정상이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산술적 계산일 뿐이다. 상장을 4개월 앞둔 커머스의 주식은 잘 받으면 일대일까지도 받을 수 있으니까.
“일단 회장님과 협상해 보겠습니다.”
“회장님?”
“네.”
“에이, 난 이사님이 들고 있는 거 내놓으려는 줄 알고 흥분했었네요.”
최민우는 실망 가득한 표정으로 술잔을 입가에 가져갔다. 그리고 손가락 하나를 허공에 흔들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수고하실 필요 없어요. 김상만 회장은 내가 만나 봤으니까.”
“…….”
“그 노친네는 절대 이대일 이하로는 안 주려 하더군요. 그래서 뭐 그냥 나왔죠.”
이래서 김선녀 여사는 최민우가 김상만 회장 쪽에 붙었다고 생각했구나.
하지만 김상만 회장이 쳐 냈다라…….
이건 얘기가 달라진다.
“그래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최소 4%를 들고 오세요. 그럼 푸드 지분 1.7%는 바로 넘겨 드릴 테니까.”
BO푸드 1.7%에 BO커머스의 4%.
이건 이대일보다 더한 수치이다.
그리고 이런 조건을 가져가면 웃음거리만 될 뿐이다.
“없던 일로 하고 술이나 마시죠.”
나는 술잔의 술을 비우고, 그가 조금 전에 들어 올렸던 술병을 움켜잡았다.
<이모들이 BO 푸드 들고 있다고 했던 거 같은데. 방송하는 그놈도 개미들 좀 몰이했다고 했고. 동의서를 좀 구해 준다고 해 볼까?>
1.7%가 전부가 아니구나.
과연 얼마나 가지고 있을까?
이 단편의 기억으로 모든 상황을 예상할 수 없지만, 김선녀 여사가 긴장할 정도면 제법 가지고 있을 수가 있다.
내가 고민하는 사이, 최민우는 내 표정을 살피다 선심을 쓴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좋아요. 좋아. 3.5% 가져오세요. 그 이하는 절대 안 됩니다!”
2 대 1.
이렇게 빨리 꼬리를 내리는 것을 보니 커머스의 주식이 많이 탐났나 보다.
하지만 이 조건으로 김상만 회장을 설득할 수는 없다.
“그 조건으로 안 될 거 아시잖아요.”
“그러니까 이사님한테 이렇게 정중하게 부탁하는 거죠.”
“…….”
“싫어요? 싫으면 바로 그 할망구 찾아가고.”
협박까지 하는구나.
최민우는 여전히 거만한 표정으로 한쪽 팔로 소파를 휘감으며 말했다.
나는 씩 웃으며, 최대한 차분한 표정으로 답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네. 발로 좀 뛰어 주셔야겠습니다.”
“나한테 김상만 회장 우호지분을 가져오라는 겁니까?”
주식을 많이 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눈치가 빠르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남은 술을 목으로 넘겼다.
“잘 아시네요. 5년 전에 사들였다면 대부분 아직도 들고 있을 겁니다. 그들을 모아 주세요. 최소 7% 이상.”
“…….”
“그럼 커머스 주식 3.5%를 내드리죠.”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운 최민우.
그는 내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차갑고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만약 김상만 회장이 동의 안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가 가진 주식을 내 드리죠. 그거면 되겠습니까?”
“하하하, 역시! 화끈하시네. 하하하 내 속을 들어갔다 나오셨나? 어떻게 이렇게 딱 마음에 드는 말만 골라 하실까? 오케이! 탕탕탕!”
최민우는 테이블을 세 번 내려치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술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충분할 것이다.
1.7%를 스왑하고, 7%의 우호지분을 모아 준다면 말이다.
내가 알기엔 지금 당장 1%가 아쉬운 상황이니까.
나는 남은 술을 입안에 털어놓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