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124화>
125. 기회를 드리러 왔습니다
병실의 복도.
밖으로 나오는 도중, 한쪽 벽에 붙어 있던 휠체어를 건드렸다.
바퀴가 잠겨 있지 않은 휠체어가 살짝 흔들렸고, 나는 재빨리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삼성동 건물이 3일 안에 나갈 수 있을까?>
<왜 이렇게 서두르시는 거지?>
<에이마켓을 넘기고, 마켓 프레시에 하나에 집중하시려 하는 건가?>
<나도 상장하기 전에 빨리 마켓 프레시 주식을 알아봐야겠군. 그게 돈이 된다는 얘기니까.>
처음 듣는 남자의 목소리.
에이마켓과 마켓 프레시라…….
김선녀 여사와 그녀의 비서가 나눴던 기억인가?
나는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가 앉았을 시트 위로 손을 올렸다.
<현아가 또 일을 그르치겠구나.>
김선녀 여사의 목소리.
그녀가 쓰던 휠체어가 확실하다.
나는 눈을 감고, 들려오는 그녀의 수많은 기억에 집중했다.
<박상열까지 데려가다니……. 생각보다 세게 나오는군.>
<최민우. 이놈이었구나. 이놈이 김상만 쪽에 붙었어.>
<김상만……. 생각보다 쉽지 않겠어. 일단 병원을 나가야 하는데…….>
<병원 놈들은 나가지 못하게 구실만 찾기 바쁘고……. 빨리 나가야 해. 이러다 모든 게 틀어질 수도 있겠어.>
BO푸드를 아들에게 승계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김상만 회장.
김선녀 여사가 생각보다 고전 중이다.
매사에 침착했던 그녀의 다급한 목소리가 꽤 낯설었다.
그렇다면…….
김선녀 여사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을 공략하는 것이 유리하다.
그녀가 김상만 회장과 싸움하면서 놓치고 있는 카드.
바로.
10%를 가진 최구열 이사와 6%의 투자자들.
내가 가진 11%와 태하의 7%, 지영이의 7%, 정진택의 4%, 김재열의 4%, 이정우의 1%까지 하면 총 34%.
거기에 그들의 지분을 합치면 50%가 된다.
한마디로 51%를 못 가져도, 상대의 51%는 막을 수는 있다.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휠체어에서 손을 뗐다.
* * *
이튿날.
점심시간이 끝나고 자리를 비웠던 부서원들이 하나둘 사무실로 들어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진택 차장의 자리로 다가갔다.
“차장님!”
내 부름에, 턱을 괴고 마우스를 깔짝대던 정진택 차장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잠깐 시간 되시죠?”
“아……. 네.”
나는 그를 회의실로 데려가 문을 닫고 유리 벽의 블라인드를 내렸다. 그러자 정진택 차장은 내 옆으로 바짝 붙어서며 속삭였다.
“무슨 일이세요?”
“전에 도와주신다고 하셨죠?”
“드디어 제가 나설 차례입니까? 뭐든 말씀만 하세요!”
자신의 가슴을 툭 치며 자신감 넘치는 표정의 정진택 차장.
나는 그의 얼굴을 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주주명부를 확인하고 투자자들을 만나 주세요. 그리고 그들이 SY홀딩스와 관계있는지도 파악해 주세요.”
“SY홀딩스요?”
“네, 일전에 말했던 이현아 씨가 대표로 있는 회사입니다.”
“아……. 그렇군요.”
“최대한 빠르고 은밀히 움직이셔야 합니다. SY홀딩스 쪽에서 눈치채지 못하도록.”
6%의 지분을 나눠 가진 투자자들.
내가 기억하기론, 열다섯 명 정도였다.
인원은 많지만, 지금의 실적에 만족할 그들을 설득하는 것은 아마 어렵지 않을 것이다. 물론, 김선녀 여사의 사람들이 아니라는 전제하에 말이다.
정진택 차장은 마치 007작전을 수행하는 사람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
“알겠습니다. 꼭 설득하겠습니다.”
“네, 꼭 그러셔야 합니다.”
“이사님은 어디로 가시나요?”
“저는 최구열 이사님을 설득해 보겠습니다.”
“최 이사님을요? 그게 되겠어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는 정진택 차장.
나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쓰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미끼가 좋아서 아마 될 겁니다.”
* * *
최구열 이사의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무거운 표정을 한 그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리고 책상에 앉은 채로, 소파에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차 한잔하겠나?”
“아닙니다. 용건만 말씀드리고 가겠습니다.”
“나랑은 차도 마시기 싫다는 건가?”
미간을 구기는 최구열 이사.
한동안 패배 의식에 젖어 출근도 잘 하지 않았던 그였다.
“주시면 마시겠습니다.”
내가 밝게 웃으며 답하자, 그는 비서에게 차를 주문하고 소파의 상석으로 와서 앉았다.
그리고 안경을 벗어 하얀 천으로 닦으며 나에게 용건을 말해 보라는 듯한 손짓을 했다.
“기회를 드리러 왔습니다.”
내 말에, 최구열 이사는 피식 웃고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기회?”
“네, 기회요. 이사님도 경영권을 내주고 싶은 마음은 없을 테니까요.”
최구열 이사는 안경을 쓰고 내 눈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바라보며 입을 닫았다.
그는 생각이 많은 사람.
갑작스러운 내 제의를 받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그가 만졌던 안경을 닦는 천을 곱게 접으며, 그 안의 기억에 귀를 기울였다.
<경영권이 여사님께 넘어간다면? 그럼 나에게는 영영 기회가 없겠지.>
<그렇다고 이놈의 손을 잡아? 우스운 꼴만 될 뿐이다.>
<하지만 명분은 충분한데……. 경영권 방어라는 명분.>
흔들리고 있구나.
나는 씩 웃고 하얀 천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렇게 10여 분이 지나자, 최구열 이사는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로 자리로 돌아왔다.
“일단 지키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네, 우선은 최악의 경우는 막으려는 겁니다.”
“자네가 생각하는 최악은 무엇인가?”
“어제 럭키밀의 박성진 대표를 만났습니다. 여사님이 그분을 새로운 이사로 선임해 달라고 하더군요.”
“럭키밀의 박성진 대표?”
“네. 시간이 지나면 여사님은 그분을 대표이사로 앉히려 하겠죠.”
최구열 이사는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허공을 응시했다.
그리고 턱을 만지작거리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원 이사가 여기까지 와서 부탁하는 것을 보니, 회장님의 지분이 벌써 그쪽으로 넘어갔나 보군.”
알고 있었구나.
김상만 회장이 BO푸드의 경영권을 승계하기 위해서, 김선녀 여사와 싸우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결과에 따라 커머스의 지분 구도가 바뀔 수 있음을.
그렇다면 굳이 숨길 필요가 없다.
아니, 오히려 이는 나에게 더 유리할 수 있다.
“아니요. 아직입니다.”
“그래? 생각보다 잘 버티시는군.”
“이사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먼저 묻지. 투자자들이 가지고 있는 6%의 동의권은 확보했나?”
지는 싸움은 시작도 하지 않겠다는 것인가?
그는 내 질문에 답하지 않고, 내가 어디까지 준비하는지를 파악하려 했다.
“이제 해 볼 생각입니다.”
“그럼 자네는 그 6% 안에 여사님의 자본이 없다고 확신하는 건가?”
“물론 확신 못 합니다. 그래도 손 놓고 있을 수 없으니까 해 보려는 겁니다.”
“6% 중의 절반, 아니 어쩌면 6% 모두가 여사님의 차명일 수도 있네.”
“그래서 그냥 손 놓고 계실 겁니까?”
“그럼 우선 6% 먼저 확보하고 오게. 난 그 이후 결정할 테니.”
어차피 쉽게 내 손을 잡아 줄 거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최구열 이사는 그런 사람이니까.
나는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이사님은 회장님이 커머스의 지분을 여사님께 내줄 거라 보시는 겁니까?”
“회장님은 푸드를 절대 포기하지 못해. 그래서 여사님께 지분을 모두 넘길 거야.”
김선녀 여사는 BO푸드의 경영권 승계를 인정해 주는 대신, BO 커머스의 주식을 내놓으라 하고 있다. 하지만 김상만 회장이 김선녀 여사가 아닌 다른 주주들의 동의를 받게 된다면, 그는 BO 커머스의 지분을 내놓을 필요가 없게 된다.
한마디로 그가 가진 21%의 커머스 지분을 유지할 수 있다는 말이다.
“만약 아니라면요. 회장님이 이길 수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아시겠지만, 그렇게 되면 이사님의 지분은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부탁이 아니라 기회를 드린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내가 던진 수에 그는 이제 흔들릴 수밖에 없다.
김상만 회장의 21%가 우리에게로 넘어오면 총 55%로 그의 10%는 필요 없어지니까.
최구열 이사는 내 눈을 바라보고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숨 막히는 정적이 이어지고.
그는 내 눈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 그렇게 하시게.”
하긴, 최구열 이사가 겨우 이런 수에 넘어오지 않겠지.
나는 피식 웃으며, 미리 준비한 두 번째 시나리오로 그를 끌어들였다.
“제가 아무런 근거도 없이 움직일 거라 보십니까?”
“글쎄. 방금도 얘기했지만, 여사님은 그런 분이 아니야. 처음부터 모든 가능성을 막아 두고 움직였을 거야.”
“아주 그냥 여사님, 여사님. 극성 팬 나셨네요.”
“뭐?”
내가 비아냥대자, 최구열 이사는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이제 내가 가진 패를 꺼낼 차례다.
“선우 그룹의 박상열 회장과 지호 엔터의 최민우 대표가 회장님 쪽으로 돌아섰습니다. 이래도 회장님이 불리하다고 보십니까?”
휠체어의 시트에서 들었던 김선녀 여사의 기억.
솔직히 난 이들이 BO푸드의 지분을 얼마나 가졌는지, 어떤 영향력이 있는지는 잘 모른다. 선우 그룹과 지호 엔터의 대표라는 것도 인터넷 검색으로 알게 된 사실이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하다.
김선녀 여사가 경계할 정도면 결코 가벼운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최구열 이사도 이를 알 것이라는 생각에 던져 본 것이다.
“선우 그룹이?”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그가 선우 그룹과 지호 엔터라는 말에 움찔했다.
백 마디 말보다 큰 힘을 지닌 것이 몸짓.
나는 조금만 몰아치면 그가 내 손을 잡을 것이라 확신했다.
“네. 선우 그룹과 지호 엔터가 돌아섰습니다.”
“확실한가?”
“네.”
“어디서 들은 거지?”
“그것까지는 말씀드릴 수 없지만 확실합니다.”
“흠…….”
연경을 벗어, 다시 하얀 천으로 닦는 최구열 이사.
이는 생각이 깊어질 때 하는 그의 습관이다.
안경이 없는 그의 가느다란 눈은 내가 아닌 허공을 응시했다.
뭔가 알고 있구나.
선우 그룹과 지호 엔터가 어떤 키를 가졌는지를.
나는 그의 변화된 표정에 쾌재를 부르며, 말을 이어 갔다.
“여사님이 병원에 있는 사이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부지런하게 움직인 회장님이 승기를 가져가고 있다는 겁니다.”
“아니, 아직 부족해. 그걸로 전부 다 지키지는 못해.”
최구열 이사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혼잣말을 하듯이 중얼댔다.
그리고 한참 동안 닦던 안경을 다시 쓰고 안경을 닦던 천을 테이블 위에 던져 놨다.
기회다. 조금 전의 기억을 들을 수 있는 기회.
나는 재빨리 손을 뻗어 테이블에 헝클어진 하얀 천을 살짝 훑었다.
<선우가 차명으로 들고 있는 BO푸드의 지분은 6% 이상이다. 그럼 승산이 있다는 거 아닌가?>
<지호 엔터? 거긴 또 어디지? 이놈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봐서는 BO푸드의 주식을 쥐고 있는 놈들 같은데…….>
역시 그랬구나.
이들이 BO푸드의 경영권 승계에 키를 쥐고 있구나.
나는 좀 더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최구열 이사를 바라봤다.
“이틀 드리겠습니다. 충분히 알아보시고 말씀해 주세요.”
“…….”
나는 남은 차를 한입에 털어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제까지는 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내 손을 잡는 것밖에 방법이 없을 것이다.
김선녀 여사가 버렸던 카드를 다시 쥘 일은 없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