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123화>
124. 새로운 세대가 이끌어 갈 마켓 프레시
* * *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파티션을 치면 되겠네요. 파티션은 안과 밖이 보이는 투명한 유리면 좋겠어요.”
인테리어 공사가 한창인 텅 빈 사무실.
이곳은 BO 푸드에서 분사하는 우리가 단독으로 사용할 공간이다.
탁 트인 전망에 한산한 도로.
공간은 2배 이상 넓어졌고 시설과 교통, 주변 환경 등이 이전보다 좋아진다.
아쉬운 것은 단 하나.
직원에게 무료로 제공되는 베이커리 카페가 없다는 것뿐이다.
김재열 사외이사는 내가 가리키는 곳을 보고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답했다.
“정말 그거면 돼?”
“네, 왜요?”
“너무 좁잖아. 그냥 위층에 이사실을 따로 쓰지?”
“자리가 멀어지면 일하기도 힘들어요.”
“그놈 고집 참…….”
김재열 사외이사는 수첩에 대강의 그림을 그린 후, 창밖을 보는 내 옆으로 다가와 말을 이었다.
“앞이 뻥 뚫려 있어서 해가 참 잘 들어오겠어.”
“네. 차들도 많이 없어서 조용하기도 하고요.”
“내가 여기 얼마나 어렵게 구했는지 알아?”
“알아요. 알아.”
마켓 프레시의 직원 250여 명이 쓰게 될 사무실.
6층에는 전략기획, 마케팅, 디자인, 개발, 회계, 감사 등의 부서가 들어가고 7층은 가장 인원이 많은 MD 사업부가 단독으로 쓰게 된다. 8층은 대표이사와 이사실, 그리고 여러 개의 회의실이 들어간다.
“집은 어떻게 할 거야?”
“근처로 이사하려고요.”
“하긴 지금 동네보다 여기가 싸겠지. 알아는 봤고?”
“네, 인근에 괜찮은 오피스텔들 많더라고요.”
김재열 사외이사는 씩 웃으며, 창밖을 바라봤다.
“기대된다.”
“뭐가요?”
“이제 진짜 시작이잖아. 경영진도 바뀌고, 사옥도 바뀌고…….”
“하긴 그러네요.”
나는 창밖의 호수공원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때,
지이잉! 지이잉!
주머니 속에서 휴대전화의 진동이 느껴졌다.
나는 휴대전화를 꺼내 발신자를 확인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오빠! 어디야?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이현아 대표.
김재열 사외이사에게서 등을 돌려, 밖으로 걸어나가며 답했다.
“일산.”
- 마프 이사하는 그 건물?”
“응, 네가 여길 어떻게 알아?”
- 지나가다가 잠깐 봤지. 그나저나 오늘 시간 돼?”
3시에 입점사 미팅이 끝나고 나면 별다른 약속은 없다.
“괜찮아. 근데 왜?”
- 할머니 만나고 싶다고 했잖아.
“오늘 시간 되신데?”
- 응. 이따 퇴근 시간 근처에 주차장으로 차 보낼 테니까, 그거 타고 와.
“그래. 알았어.”
전화를 끊자, 옆에 있던 김재열 사외이사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며 물었다.
“누구? 대표님?”
김지영 대표의 전화인 줄 아는가 보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주머니에 휴대전화를 집어넣었다. 그러자 김재열 사외이사가 내 어깨 위로 팔을 감싸며 바짝 달라붙었다.
“좋으냐?”
“뭐가요?”
“왜 그걸 나한테 물어? 흐흐흐“
음흉한 미소를 짓는 김재열 사외이사.
나는 그를 밀쳐 내고, 엘리베이터의 내려가는 버튼을 눌렀다.
“그만하고 돌아가죠.”
“왜! 천천히 밥이나 먹고 가자. 여기 칼국수 죽이는 집 있어!”
“3시에 입점사 미팅 있습니다.”
“그놈의 일, 일! 넌 먼저 들어가. 난 죽어도 오늘 칼국수 한 그릇 때리고 가야겠다.”
“그러세요.”
* * *
“괜찮아? 사진은 좀 찍었어?”
“인테리어는 거의 끝나가죠?”
이사하게 될 사무실이 궁금했던 김태하 팀장과 정진택 차장이 내 책상 옆으로 바짝 붙어 물었다. 나는 씩 웃으며, 휴대전화에 찍힌 사진을 열어 그들에게 보였다.
“오! 넓네.”
“이거 일산 호수 공원이죠? 와, 전망도 좋네요.”
“여기서 조금만 나가면 바로 자유로랑 외곽 타는 거지?”
궁금했는지, 그들은 사진 속의 사무실을 보며 많은 질문을 쏟아 냈다.
우린 새로운 시작을 기대했다.
BO 푸드의 사옥에서 분사한다는 기대와 더 나아진 환경에 대한 기대.
그리고 무엇보다 나와 김지영 대표, 정진택 차장, 김태하 팀장과 같은 새로운 세대가 이끌어 갈 마켓 프레시를 기대했다.
“이사님 자리는 어딘가요?”
정진택 차장의 질문에, 나는 휴대전화의 사진을 넘기며 한 곳을 가리켰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유리 벽을 세워 달라고 했어요.”
“괜찮겠어요? 그냥 위로 올라가시지.”
“맞아. 그냥 올라가. 또 얼마나 잔소리를 하려고.”
김태하 팀장이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나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사진의 한 곳을 가리키며 천천히 답했다.
“내가 너희 팀 여기다 놓고 맨날 달달 볶을 거야.”
“이봐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왜 그렇게 좋아?”
“그래. 아주 좋아 죽겠다! 죽겠어!”
휴대전화의 사진을 보며 장난을 하는 사이, 처음 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
나는 휴대전화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밖으로 걸어갔다.
“네. 원지훈입니다.”
- 1층 주차장에 도착했습니다. 내려오시면 됩니다.
차갑고 낮게 깔린 음성.
김선녀 여사가 보낸 사람인 것 같았다.
나는 전화를 끊고 가방을 챙겨 곧바로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주차장 가운데 비상등을 켜고 서 있는 검은색 고급 세단.
가까이 걸어가자, 뒷좌석의 문이 열리고 30대의 젊은 남자가 차에서 내렸다.
어깨까지 오는 파마머리에 동그란 안경.
개량 한복 같은 옷을 입은 남자는 나를 보고 반갑게 손을 내밀며 다가왔다.
“원 이사님!”
박성진.
국내 최고의 식품 벤더인 럭키밀의 대표.
럭키밀은 막강한 자본력을 가진 회사로 많은 식품 제조사들과 거래를 했다. 또한, 박성진 대표는 에이마켓의 최대 주주로 온라인 커머스들에게도 영향력이 큰 사람이다.
그리고 특이한 외모와 행동 때문에 많은 사람이 그를 괴물이라고 불렀다.
“박성진 대표님?”
“오랜만인데 알아보시네요. 하하하!”
개량 한복과 저 헤어스타일.
5년 전에 한 번 만났던 것뿐인데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럭키밀을 매각하고 제주도로 내려가 살고 있다는 말은 들었는데…….
“여긴 어떻게…….”
“일단 명함 먼저 드리죠.”
박성진 대표는 가슴에 달린 작은 주머니에서 명함을 한 장 꺼내 내게 건넸다.
받음과 동시에, 듣게 된 그의 기억.
<그때 원스몰의 꼬맹이가 여기까지 왔구나.>
나는 그의 명함을 주머니에 넣고, 내 명함을 그에게 건넸다.
물끄러미 내 명함을 내려다보던 그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마켓 프레시의 기사들 보면서 많이 기대했습니다.”
“여사님이 보내신 겁니까?”
“가시죠. 가면서 얘기하시죠.”
박성진 대표는 뒷좌석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내가 차에 올라타자, 그는 내 옆자리에 앉아 운전하는 기사에게 출발하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나에게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요새 상장 준비하느라 많이 바쁘시죠?”
“뭐 그렇죠.”
“듣자 하니까 요새는 MD들 데리고 다니면서 교육도 다니신다고요?”
역시 제조사와 벤더들 사이에 발이 넓은 사람이라 그런지, 소문이 빠른가 보다.
“어디서 들으셨나요?”
“광중에 김도훈 대표한테 들었습니다. 어제 얼마나 툴툴대던지……. 하하하.”
광중이라면, 어제 김연희와 함께 나갔던 돈가스를 생산하는 회사다.
광중의 김도훈 대표는 박성진 대표와 어떤 관계길래, 이렇게 쪼르르 불만을 털어놓은 것일까?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친하신가 보군요.”
“뭐 적당히요. 하여간 그래서 더 궁금했습니다. 원지훈 이사님이 어떤 분인지요.”
“칭찬인 거죠?”
“네. 잘하셨습니다. 아마 저라도 그렇게 했을 겁니다. 하하하“
나는 박성진 대표와 대화를 하며, 그가 만졌을 것 같은 곳을 오른손으로 조심스럽게 훑었다.
왜 그가 왔으며, 김선녀 여사와는 어떤 관계인지 알아야 했기에 내 손은 점점 분주해졌다.
그리고 뒷좌석 팔걸이에서 그의 짧은 기억이 들을 수 있었다.
<이번엔 여사님답지 못한 것 같군.>
김선녀 여사와 박성진 대표와의 관계를 먼저 알아야 한다.
그래야 이 기억이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는 그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저 대표님.”
“네?”
“여사님과는 어떤 관계이신지 물어도 될까요?”
“제가 드린 명함을 자세히 안 보셨나 보군요.”
조금 전은 갑자기 튀어나온 그에 놀라 명함을 확인하지 못했다.
나는 재빨리 주머니를 뒤져, 다시 명함을 꺼내 봤다.
---
SY홀딩스 이사
박성진
---
SY홀딩스.
김션녀 여사의 회사로 현재 이현아가 대표로 있는 회사다.
럭키밀의 명함이거나 에이마켓의 명함일 줄 알았는데…….
SY홀딩스의 명함을 가지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SY홀딩스라면…….”
“네. 맞아요. 여사님이 어린 손녀분이 불안하셨는지, 저를 부르셨습니다.”
“그럼 앞으로 SY에서 일하시는 겁니까?”
“글쎄요. 그건 두고 봐야죠.”
차가 멈춰 서고 박성진 대표가 먼저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상의 주머니에 있던 병원 전용 출입 카드를 꺼내 보이며 내게 손짓했다.
“가시죠.”
“네.”
그를 따라 병원의 VIP실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그는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며 옷매무새를 다듬고 병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를 세워 앉아 있던 김선녀 여사.
그녀는 우리를 보고 환하게 웃으며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네, 여사님.”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는 박성진 대표.
김선녀 여사 역시 고개를 살짝 숙이며, 그에게 예를 표했다.
“네. 이렇게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여사님이 부르시는데 당연히 와야죠.”
“원지훈 이사님.”
김선녀 여사의 낮고 근엄한 목소리.
조금 전 박성진 대표와 인사를 나누던 목소리와 달리 뭔가 위엄이 잔뜩 서려 있었다.
“네.”
“축하드립니다. 이사 선임되시고 처음 뵙는군요.”
“감사합니다.”
“요즘 많이 바쁘시죠?”
“아닙니다.”
“제가 듣기론 많이 바쁘신 거 같던데요? 그리고 그게 저 때문이라면 괜히 힘 빼지 마세요. 원 이사님의 예상이 맞으니까요.”
날카로운 표정과 차가운 말투.
저건 내가 경영권 방어를 위해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는 것을 알고 있다는 말이다.
김선녀 여사는 갑자기 표정을 풀고, 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하하, 뭐 그렇게 긴장하세요?”
표정이 드러났나?
역시 보통의 사람과는 다르구나.
“아닙니다.”
“아 참, 오시면서 박성진 이사님이랑은 인사하셨죠?”
“네.”
“이번엔 원 이사님이 저를 좀 도와주셔야겠습니다.”
갑자기 도와 달라니…….
무슨 뜻일까?
내가 머뭇거리자, 김선녀 여사는 나와 박성진 대표를 번갈아 보며 말을 이었다.
“박성진 이사님이 마켓 프레시의 새로운 이사로 선임될 수 있도록 이사회와 주총을 소집해 주세요.”
“……!”
상장하기 위해서는 최소 세 명의 사내 이사가 필요하다.
그리고 박성진 대표는 경험이 많고 인맥이 넓은 사람으로 회사에 큰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사람도 맞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지금 이 제안을 받으면 제2의 최구열 이사를 만들어 낼 뿐이다.
“싫습니다.”
내 입에서 바로 튀어나온 말을 듣고, 김선녀 여사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원 이사님.”
“네.”
“뭘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세요? 어차피 저나 원 이사님이나 목표는 똑같지 않나요?”
“목표는 같을지 모르지만 방법은 차이가 있는 것 같군요.”
말을 마치고 등을 돌렸다.
그리고 병실의 문을 열고 밖으로 걸어나갔다.
김선녀 여사가 사람을 보는 눈이 정확하다고?
아니 틀렸다.
최구열 이사는 이런 식으로 길들였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와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