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122화>
123. 좋은 인재는 뽑는 게 아니고 키우는 것이다
* * *
달리는 차 안.
다리 위로 손을 모은 이연희가 긴장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운전을 하던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표정을 확인하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긴장돼?”
“조금요.”
지난밤, 이연희는 자신을 도와주는 삼인방과 함께 광중의 실적 데이터를 확인했다. 그리고 판매 실적의 하락이 제조사 공장의 파업이나 중량의 변화가 아닌, 다른 이유였다는 것을 찾아냈다.
그것은 바로 돈가스를 튀기는 기름.
처음 출시 때는 옥수수와 현미로 만든 특별한 튀김유를 사용했지만, 원가 절감을 위해 시판되는 평범한 튀김유로 바꾼 것이 문제였다.
보통 브랜드 담당자들은 고객 후기와 판매 실적으로 이를 찾아내 개선을 요구하지만, 일을 제대로 배우지 않은 이연희가 이를 모르고 넘겼던 것이다.
“제가 싫은 소리를 잘 못해서…….”
고개를 떨구며, 힘 빠진 목소리로 답하는 이연희.
그녀는 그런 사람이다.
못하면 피하고, 무서우면 도망치는…….
그래서 발주서를 한 번도 작성해 보지 않았고, 거래처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을 꺼려 했다.
“못하겠어? 그러면 다른 사람을 보낼까?”
“…….”
“연희 씨가 선택해. 원한다면 차 돌려서 회사로 돌아가도 돼.”
“아닙니다. 해 보겠습니다.”
어금니를 꽉 깨물며 말하는 이연희.
사실, 오늘 출근 전까지는 그녀를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침 일찍 나를 찾아와 되돌려보겠다는 의지를 보였고, 기회를 줘야겠다는 생각에 함께 광중으로 가는 것이었다.
나는 씩 웃으며 액셀을 더 세게 밟았다.
광중식품의 주차장.
조수석에 앉아 있던 이연희가 크게 한숨을 내쉬고 가방에서 화장품이 담긴 파우치를 꺼냈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파우치의 지퍼를 내렸다.
순간.
우르르
안에 있던 각종 화장품이 차에 쏟아졌다.
“어머!”
깜짝 놀라며 화장품을 주워담는 이연희.
나는 차에 널브러진 화장품들을 주워 주며, 그녀의 지난 기억들을 들었다.
<유화유지로 바꿨나? 알레르기 있는 사람도 있을 텐데.>
<냄새가 올라오는 거 보니까 참기름 바꿨나 보네.>
어떻게 이런 것들을 알았을까?
맛이 변했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지만, 그 안의 재료가 바뀐 것까지 정확히 지적하긴 어렵다.
특히, 튀기거나 굽는 데 쓰는 기름은 더더욱 그럴 텐데…….
“연희 씨.”
“네?”
“튀김유 바뀐 건 어떻게 찾았어?”
“냄새 때문예요.”
“냄새?”
“네, 어제 최 과장님이 돈가스를 시식해 보자고 레인지에 돌려주셨는데, 이전과 좀 다른 냄새가 올라오더라고요. 저희 집이 예전에 방앗간을 해서 기름 냄새는 잘 맡아요.”
“아……. 그렇구나. 그래서?”
“오전에 박 대리님이 튀김유 회사에 전화해서, 광중에는 6월까지만 납품된 사실을 확인했어요.”
그랬구나.
누구나 자신만의 무기가 있다.
그리고 겁 많고, 수동적인 그녀는 남들보다 정확한 후각을 가지고 있다.
요리에 사용된 튀김유까지 분간할 수 있는, 말 그대로 절대 후각.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떨어진 화장품들을 그녀에게 건네줬다.
“이제 올라가 볼까?”
“네!”
* * *
광중식품의 회의실.
회사 로고가 박힌 회색 점퍼를 입은 광중의 박정신 과장.
20대 후반 정도 됐을까?
삐져나온 코털 두 가닥과 때가 잔뜩 낀 점퍼의 소매.
머리는 또 왜 그렇게 긁적이는지…….
어깨에는 하얀 비듬이 가득했고, 머리는 까치집을 지은 것처럼 곳곳이 움푹 파여 있었다.
“연희 씨, 이거 너무 하는 거 아니에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의 박정신 과장.
그는 5% 낮은 단가의 공급가를 제시하는 우리에게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나는 일부러 팔짱을 끼고 뒤로 살짝 물러났다.
그리고 이연희는 최선을 다해 박정신 과장과 맞섰다.
“이건 광중이 너무한 거죠. 튀김유를 바꿔서 생산비는 낮추고, 우리한테는 똑같은 공급가를 요구하셨잖아요.”
“그건 정말 어쩔 수 없었어요. 위에서 마진을 올리라는 압박이 심해서…….”
“이 상태면 답 나오지 않는다는 거, 과장님도 아시잖아요.”
“회사원이 까라면 까야지. 낸들 어찌합니까? 이번만 대충 넘어갑시다. 다음엔 내가 어떻게든 해 볼 테니까.”
“안 됩니다. 계약 취소하겠다는 거, 제가 억지로 이사님 모시고 온 겁니다.”
“하아……. 진짜 죽겠네.”
잘한다.
가공식품 팀 삼인방이 특별한 교육을 해 줬나?
그녀는 마치 준비한 대본을 외운 배우처럼, 모든 상황에 술술 답을 내놨다. 비록 목소리에 가는 떨림이 느껴졌지만, 경험이 적어 보이는 20대의 과장을 상대하기에는 충분했다.
내가 나서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을 할 찰나,
“아이고! 원지훈 이사님이 직접 오셨습니까?”
광중식품의 김도훈 대표.
노련한 적이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회의실로 들어왔다.
“이사로 선임되셨다고 들었습니다. 하하하,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사옥 이전하면 제가 아주 비싼 난으로 하나 보내드리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제가 그런 거 잘못 키워서요.”
“아……. 그래요? 요새는 필드 좀 나가세요? 제가 시즌권이 있는데…….”
“아니요. 골프는 친 적 없습니다.”
본론을 피해 나와의 공통점을 찾으려는 김도훈 대표.
내가 가진 경계심을 줄이고, 담당자인 이연희를 압박하기 위한 전략이다. 그는 자신과 내가 공통점이 없음을 알고는 노련하게 목표를 바꿨다.
“이렇게 아름다우신 분이 마프에 계시다니……. 그래서 우리 박 과장이 맨날 마프, 마프 했나 보군요!”
“네?”
“우리 박 과장 어때요? 책임감 있고, 모아 둔 돈도 좀 있고. 얼굴 뭐…….”
그는 고개를 돌려, 박정신 과장의 상태를 보고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한 손을 허공에 휘휘 저었다.
“남자가 잘생기면 매력이 떨어지는 겁니다! 하하하 얼굴값 한다고 하잖아요.”
“대표님 그게 아니라…….”
“에이 한번 만나 봐요. 내가 지원 사격 확실하게 해 줄 테니까!”
“괜찮습니다.”
“어라? 연희 씨 표정 보니까 영 아닌데? 박 과장이 뭐 실수한 거 있어요?”
“아……. 아닙니다.”
김도훈 대표는 고개를 돌려 박정신 과장을 노려봤다.
“야! 박 과장! 너 무슨 짓을 했길래 연희 씨 반응이 이래?”
“죄송합니다. 제가…….”
“내가 다른 데 신경 쓰지 말고 마프만 신경 쓰라고 했어, 안 했어?”
“…….”
“그동안 너무 편했지? 김 이사가 너 뽑지 말라고 했을 때 그 말 들었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담당자를 혼내서 동정을 유발하는 아주 오래된 방법.
아마, 자신보다 나이가 한참 어린놈이 이사 명함 달고 왔으니 먹힐 줄 알았나 보다.
나는 한귀로 흘렸지만, 업무 미팅이 적었던 이연희는 달랐다.
“아닙니다! 대표님. 그런 거 절대 없었습니다.”
그녀는 양손으로 손사래를 치며 애써 박정신 과장을 변호했다. 그러자 김도훈 대표는 다시 인자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쐐기를 박기 위한 노력을 했다.
“제가 오늘 담당자 바꿔 드릴게요. 정말 죄송합니다. 난 박 과장이 잘해 드릴 거로 생각했는데.”
“괘……. 괜찮습니다. 정말 그런 거 아닙니다.”
역시 경험이 부족하구나.
이런 고전적인 수법에 준비해 온 모든 것을 내려놓을 만큼.
나는 피식 웃고, 의자를 앞으로 당겨 앉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바꿔 주세요.”
“네?”
놀란 표정의 김도훈 대표와 박정신 과장.
나는 두 손을 테이블 위로 올려 깍지를 끼고 말을 이었다.
“바꿔 주세요. 너무 말이 통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하하하, 그래요. 원 이사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당연히 그래야죠. 온라인 마케팅팀의 새로 온 팀장이 있는데, 바로 불러올까요?”
김도훈 대표는 노련하게 지금의 위기를 모면하려 했다.
하지만 내 돌발 행동에 눈가가 파르르 떨리는 것까지는 감추지는 못했다.
“아니요. 저희 담당자는 마케팅이 아니라 제품 개발 책임자로 좀 바꿔 주셨으면 합니다.”
“……!”
“이게 말이나 됩니까? 소비자를 우롱하는 것도 아니고, 처음에는 좋은 튀김유 쓰다가 좀 팔리니까, 싸구려 튀김유로 싹 바꿔치기 하고.”
“아……. 그건 제품 원가가…….”
“그래서 우리도 공급가를 줄이겠다는 겁니다. 10% 이상 낮추려다가 연희 씨가 하도 부탁해서 5%로 줄인 겁니다.”
“…….”
“광중은 튀김유 바꿔서 7~8%는 원가 절감하셨잖아요. 안 그렇습니까?”
“아……. 그게.”
상대방을 몰아칠 때는 끊김이 없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이연희에게 직접 보여 주기 위해서 나는 계속해서 김도훈 대표를 몰아쳤다.
“연희 씨가 못 찾았으면 어쩔 뻔했습니까?”
“이사님. 저희도 진짜 얼마 안 남아요. 마프에 거의 최저가로 공급해 드리잖아요.”
“그래요? 그럼 발주서 폐기하고 위탁 계약서 가져올까요? 수수료 최저로 맞춰드릴 수 있는데.”
사입을 하지 않고 위탁으로 판매하겠다는 말.
이건 우리가 가진 가장 큰 협박이고, 광중은 당장 이를 거부할 수 없을 것이다.
“후…….”
긴 한숨을 내쉬는 김도훈 대표.
이는 패배를 인정한다는 뜻과 마찬가지다.
그는 주머니에서 안경을 꺼내, 우리가 가져온 발주서를 가만 들여다봤다. 그리고 보던 발주서를 내게 건네며 입을 열었다.
“이전에 생산한 제품은 오픈마켓에만 풀겠습니다. 그리고 마프에 들어가는 제품은 새로 생산하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처음에 쓰던 튀김유만 써서요.”
이건 우리가 가장 원하는 베스트 답안이다.
이 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 크게 기대 안 했는데…….
나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주시겠습니까?”
“네. 어쩔 수 없죠. 대신 공급가는 이전과 같이 갔으면 합니다.”
“그렇게 하죠. 그럼 이건 폐기하고 새로운 발주서는 연희 씨 통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발주서에 손을 올리자 들려오는 김도훈 대표의 기억.
<원지훈. 소문대로 진짜 여우 같은 놈이네.>
<담당자라는 애는 어리바리하니까 시간이 좀 지나서 대충 섞으면 모를 거야.>
나는 발주서를 이연희에게 넘겨주며 입을 열었다.
“연희 씨 새로 작성하는 발주서에는 특약 하나만 넣어 줘.”
“네?”
“다시 광중에서 원재료가 변동할 경우, 이에 해당하는 손해 배상을 한다는 내용.”
“아……. 네 알겠습니다.”
고개를 돌려, 미간을 심하게 찌푸린 김도훈 대표를 바라봤다.
“대표님, 이 정도는 괜찮죠?”
“당연히 그래야죠!”
“네, 이해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이연희는 부랴부랴 자리에서 일어났고, 맞은편의 김도훈 대표와 박정신 과장도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를 배웅할 준비를 했다.
“아, 참. 대표님.”
내가 김도훈 대표를 부르자, 그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네?”
“직원들 너무 야근시키지 마시고요. 가끔 사우나도 좀 보내 주세요. 음식 만드는 회사에서 저 비듬이 다 뭡니까?”
나는 박정신 과장의 양쪽 어깨에 있는 비듬을 툭툭 털어 주고, 그의 옷매무새를 만져 줬다. 그리고 김도훈 대표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좋은 인재는 뽑는 게 아니고 키우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나는 최대한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이연희는 내 옆으로 바짝 붙어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
“저……. 이사님.”
“응?”
“그 말 진심이세요?”
“뭐?”
“좋은 인재는 뽑는 게 아니고 키우는 거라는 말이요.”
“그럼 진짜지. 그러니까 연희 씨도 빨리 배워. 가공식품 팀 사수들 훌륭하잖아.”
배시시 눈웃음을 치는 이연희.
그녀는 고개를 끄덕인 후, 내 앞을 막아서며 고개를 숙였다.
“기회를 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