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119화>
120. 부장님 회사가 아니라 우리 회사
* * *
“부장님!”
모니터를 멍하니 보던 내 앞으로 정진택 차장이 다가왔다.
“네?”
그는 평소와 달리,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약속 있으세요?”
이 말은 술을 마시자는 뜻이다.
어제 몇 병을 마셨더라…….
그 자리에서는 눈을 부릅뜨고 취기를 억눌렀는데, 어떻게 집에 갔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오늘요?”
“네, 중요한 일입니다.”
피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진지한 표정으로 중요한 일이라는 말하는 그의 표정에 짧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후……. 그래요. 어디로 갈까요?”
“신사동 매운 갈비 괜찮으시죠?”
예전에는 대충 먹던 정진택 차장이었는데.
유별난 MD들과 1년 넘게 생활하면서 입맛이 고급이 되어 버렸다.
“좋죠.”
“알겠습니다. 그럼 제 차로 가시죠.”
“네.”
보나 마나 술을 마시게 될 텐데, 오늘도 차는 회사에 두고 가야겠구나.
차 키를 받고 아직 시동도 걸어 보지 못했다.
정진택 차장이 자리로 돌아가자, 이번에는 퇴근 준비를 마친 마성근 팀장이 차 키를 빙빙 돌리며 내 자리로 다가왔다. 얼마 전까지 내가 가지고 다니던 차 키를.
“이사님! 원 이사님!”
누군 부장이라 하고 누군 이사라 부르고…….
호칭도 참 제각각이다.
나는 씩 웃으며 그의 부름에 답했다.
“벌써 이사입니까?”
“며칠 안 남았잖아요. 퇴근 안 하세요?”
“가야죠. 팀장님은요?”
“전 지금 퇴근합니다. 요즘 차 가지고 다니니까 출퇴근 시간이 30분은 준 거 같아요. 하하하.”
어깨를 으쓱하며 크게 웃는 마성근 팀장.
그는 내가 타던 차를 받았다. 아직 리스 기간이 2년이나 남아서 차장 이상에게만 나오는 차량이 그에게까지 지원된 것이었다.
“그렇게 차이가 나요?”
“네, 지하철 노선이 하도 지랄 같아서 환승만 세 번 했습니다.”
“그럼 처음부터 차 가지고 다니시지.”
“주차 지원 안 되잖아요.”
BO 푸드의 건물에 얹혀 사는 우리가 받아 낸 주차구역은 20개 정도가 전부였기에, 차장 이하는 회사 주차장을 쓰지 못했다.
“사무실 이사하면 많은 사원이 주차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네. 그러겠죠. 그나저나 애 엄마도 이 차 보고 얼마나 좋아하던지……. 주말에 애들 데리고 강릉이나 다녀올 생각입니다.”
“네, 잘 다녀오세요.”
“힘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사님.”
마성근 팀장은 차 키를 달랑달랑 흔들어 보이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 * *
신사동의 허름한 고깃집.
시뻘건 갈비 위로 다진 마늘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의성 마늘로 매운맛을 내는 이곳은 이진성 차장이 자주 다니는 맛집으로, MD 사업부 모두가 좋아하는 집이다.
테이블 8개가 전부라, 우리는 줄을 서지 않고 먹을 수 있는 오늘 같은 날을 선택받은 날이라 부르곤 했다.
“소주?”
눈썹 문신을 방금 한 것 같은 사장님이 정진택 차장의 옆으로 바짝 붙어 물었다.
그동안 자주 왔었나?
눈매가 매서운 사장님이 저렇게 다정한 표정을 짓는 것은 처음 봤다.
“선택받은 날인데, 소맥으로 가야죠. 소주 하나랑 맥주 두 병 주세요.”
“또 말아먹게? 그러다 속 버린다!”
“이미 버려서 더 버릴 것도 없습니다. 근데 눈썹 새로 하셨나?”
“왜 이상해?”
“아뇨. 아름다우십니다. 한 열 살은 젊어 보이세요. 하하하.”
정진택 차장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끓고 있는 갈비를 국자로 휘휘 젓고는 가장 큰놈을 내 앞 접시에 담아줬다.
“드세요.”
“자주 왔었나 보네요?”
“삼 일에 한 번은 왔습니다. 지금 사이트에 들어가 있는 의성 마늘 있죠?”
“소개받았어요?”
“네, 여기 사장님이 소개해 주셔서 거의 십 퍼센트나 낮게 공급받기로 했습니다.”
정진택 차장은 자신의 그릇에도 진한 국물과 갈빗대를 옮겨 담고, 김과 콩나물을 싸서 허겁지겁 입안으로 넣었다. 그리고 눈을 지그시 감고 다리를 부들부들 떨며 온몸으로 맛을 표현했다.
“그렇게 맛있어요?”
“네. 아주 맛있어서 죽겠습니다. 하하하.”
정진택 차장은 자신의 아버지가 대표이사직에서 해임된 후 점심도 잘 먹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 나는 맥주잔에 소주와 맥주를 섞어서 그에게 한잔 건넸다.
“마셔요.”
“캬아……. 부장님의 황금 비율 소맥을 오늘 먹는군요.”
정진택 차장은 한 손에는 맥주잔을 다른 한 손에는 젓가락을 들고 정신없이 먹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자, 어느 정도 배가 찬 그는 슬슬 안주가 아닌 술에 집중했다.
“그래서 제가 어떻게 한지 아십니까?”
“물류 중단시켰어요?”
“오! 정답! 전에 부장님이 하셨던 것처럼 했습니다. 벨트 딱 정지시켜 놓고 못 나간다고 막아 버렸습니다. 하하하.”
배를 잡고 크게 웃는 정진택 차장.
낙하산이라고 손가락질받던 그는 1년 새 많이 성장해 있었다.
나는 의자를 앞으로 당겨 앉으며, 그의 말에 맞장구를 쳐 줬다.
“잘하셨네.”
“그렇죠? 진짜 그러니까 김 이사 그놈, 얼굴 새파랗게 질려서 아주 그냥 싹싹 빌더라고요.”
한참을 떠들던 정진택 차장은 갈증이 났는지, 앞에 있는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크……. 술맛 좋네요. 역시 부장님표 소맥이라.”
“적당히 마셔요. 그러다 기어갑니다.”
“기분이 좋아서 그렇습니다. 기분이.”
정진택 차장은 이미 약간의 취기가 올라와 있어 보였다.
그는 셔츠의 단추를 하나 푸른 후, 목 주위를 벅벅 긁으며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아버지께서 지방으로 내려가신답니다.”
“언제요?”
“다음 주요. 평생 서울에서만 사시던 분인데……. 전원생활이 꿈이셨다네요. 좀 의외죠?”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할까.
내가 잠시 망설이는 사이, 정진택 차장은 내 잔에 맥주를 따라주며 말을 이었다.
“그냥 죄송하네요. 아버지가 그렇게 되셨는데, 아들이라는 놈은 손만 빨고 있었으니까.”
성공한 아버지에 비해 모든 것이 부족한 아들.
언제나 비교되어야 했던 아들.
그래서 그는 아버지인 정근영 대표에게 더 많은 질책을 받아왔을 것이다.
“대표님도 차장님이 얼마나 걱정했는지 잘 아실 겁니다.”
“그럴까요?”
“네.”
정진택 차장은 씩 웃고 맥주를 들이켰다.
그리고 잔을 내려놓고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부장님. 사실은……. 지방으로 내려가시기 전에 주식을 전부 양도받기로 했습니다. 다 내려놓으시려는 거 같은데……. 기분이 참 그렇더라고요.”
이거였구나.
중요하게 할 말이 있다는 것이.
나는 궁금한 마음에 마시던 술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전부 다요?”
“네.”
“얼마나 되나요?”
“대략 4% 정도 됩니다.”
정근영 대표의 지분은 총 21%.
4%가 순수 그의 자본이었다고 하면, 나머지 17%는 다른 사람의 자본이라는 말이다.
그럼, 17%가 모두 김선녀 여사의 자본이라는 말인가?
이건 예상보다 많다.
“나머지 17%는 누구 명의입니까?”
“이현아라고 했나? 처음 듣는 이름이라 기억이…….”
이현아 대표.
김선녀 여사의 손녀다.
그녀의 개인 명의로 투자했구나.
그렇다면 내 앞으로 되어 있는 10%와 정근영 대표 앞으로 되어 있던 17%, 김상만 회장에게 남아 있는 21%.
이 주식들을 모두 합치면 총 48%.
그리고 초기에 투자금을 끌어오면서 나눠 줬던 6%의 지분.
그중 절반이 김선녀 여사의 것이라고 가정하면, 그녀가 상장 후 경영권을 가져갈 수 있다는 말이다.
나는 대충의 계산을 마치고, 남은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정진택 차장은 그런 나를 보고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요? 무슨 일 있으세요?”
“후……. 아닙니다.”
나는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담배 하나 피우고 올게요.”
“아직 안 끊으셨어요?”
“네, 조만간 끊어야죠.”
나는 씩 웃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휴대전화의 전화번호를 확인하고 이현아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현아야!”
- 웬일이야? 오빠가 전화를 다 주고.
“내일 시간 괜찮아?”
- 나야 항상 바쁘지. 근데 오빠가 시간 내라면 특별히 시간을 내줄게.
“몇 시쯤 괜찮아?”
- 3시, 나 강남에 있으니까 내가 그쪽으로 갈게.
“그래. 그럼 내일 다시 통화하자.”
- 응.
전화를 끊고, 피우던 담배를 껐다.
식당 안으로 다시 들어가려는 순간, 안에 있어야 할 정진택 차장이 내 옆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아까와는 전혀 다른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 이현아……. 그 사람 아세요?”
“…….”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겁니까? 말씀해 주세요. 이제 저도 좀 알아야겠습니다.”
“아직 예상일뿐입니다. 확실해지면 말씀드릴게요.”
내가 식당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정진택 차장이 내 어깨를 잡았다.
“부장님!”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그의 눈은 꼭 들어야겠다는 말을 대신하는 것 같았다.
나는 내 어깨 위의 그의 손을 내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주주 명부에는 없지만, 이중 계약으로 커머스의 주식을 사 모으신 분이 있습니다. 주주들과 별도로 계약해서 철저하게 자신을 가리면서요.”
“이현아 그분이요?”
“아니요. 다른 분입니다. 이현아 대표의 명의를 쓴 겁니다.”
“그럼, 최근에 확보한 부장님 지분에도 그분 자금이 들어간 건가요?”
“네. 맞아요.”
“얼마나요?”
“절반, 10%가 그분의 자본입니다.”
정진택 차장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그는 고개를 좌우로 젓고, 내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담배 하나만 주세요.”
“끊었잖아요.”
“참은 거지, 끊은 거 아니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담배를 건네주고, 불을 붙여 줬다.
그러자 정진택 차장은 벽에 기대고, 뿌연 담배 연기를 허공에 내뿜었다.
“그럼 다 합치면 얼마나 될까요?”
“아직 정확히는 모릅니다.”
“대충이라도 말씀해 주세요. 그래야 대책을 세우니까.”
“48%. 잘하면 51%를 넘을지도 모릅니다.”
“그건 경영권이 넘어갈 수 있다는 말입니까?”
“네, 어쩌면요.”
“후……. 그동안 껍데기였군요. 다들 껍데기만 들고 그렇게 싸운 거였군요.”
나는 BO 커머스로 온 지 1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는 법인이 생기는 날부터 이곳에서 일해 왔다.
3년.
짧으면 짧다고 할 수 있지만, 죽을힘을 다해 노력해 온 그에게는 긴 시간이었을 것이다.
정진택 차장은 허무한 표정으로 담배를 끄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부장님은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일단, 그분의 의도 먼저 정확히 파악할 생각입니다.”
“3년간 껍데기뿐인 임원들 밑에서 놀았군요. 아버지도 그렇고…….”
말을 잇지 못하는 정진택 차장.
혼란스러운 표정의 그는 결심했는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어보였다.
“상장까지 5개월 정도 남았죠?”
“네.”
“그러면 저는 이제 뭐부터 하면 되겠습니까?”
“네?”
“돈 있는 애들 먼저 모아 볼까요? 지분 확보하려면 총알 필요하잖아요.”
정진택 차장은 내 표정을 보고, 어깨를 툭 치며 말을 이었다.
“왜? 또 부장님 혼자 짊어지려고 했어요?”
“…….”
“우리 회사잖아요. 부장님 회사가 아니라 우리 회사!”
나는 그에게 씩 웃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