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118화>
119. 이럴 때일수록 직진이 먹히는 법
10명이 넘게 앉을 수 있는 거대한 식탁.
그 위로 한정식집에서나 볼듯한 고급 요리들이 차려져 있었다.
내가 머뭇거리자, 김상만 회장은 식탁의 상석에 앉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앉지.”
왼쪽으로는 기분이 좋은 듯한 김지욱 상무와 그의 아내가, 오른쪽에는 나와 김지영 이사가 나란히 했다.
“식기 전에 들게.”
김상만 회장의 낮고 차가운 음성.
나는 그가 식사를 시작하는 것을 보고 천천히 숟가락을 들었다.
음악이라도 깔았으면 좋겠건만…….
식사 자리는 단 한 마디의 대화도 없었다.
음식을 씹는 소리와 젓가락이 사기 그릇을 스치는 소리가 전부였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속도를 맞춰 최대한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수저를 움직였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김지욱 상무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나를 바라봤다.
“원 이사.”
“네, 상무님.”
“그냥 팍팍 먹어. 회장님 속도에 맞출 필요 없어.”
내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서 그러는 것일까?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지영이가 10살 많지?”
“네.”
“우리랑은 거꾸로네. 내가 아내보다 10살이 많거든.”
김지욱 상무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아내를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 그런가요?”
“응, 근데 나 뭐 하나만 묻자. 원 이사처럼 잘생기고 능력 있는 사람이 왜 내 동생 같은 노처녀를 좋아하는 거야?”
김지욱 상무는 김지영 이사를 가리키며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김지영 이사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보통 이런 경우 장난을 맞받아쳐야 하는 것이 정상인데…….
나는 굳은 표정의 그녀를 힐끔 보고, 다시 고개를 돌려 김지욱 상무를 바라봤다.
“지영이 같은 여자를 안 좋아할 남자가 있을까요?”
“지영이?”
“네. 지영이요.”
“하하하 그래. 내가 하나 더 얘기해 줄까? 쟤. 40년 동안 집에 남자 데려온 거 원 이사가 처음이야.”
“그래요?”
“응, 요즘 애들 말로……. 모쏠. 맞아 그거야 모쏠. 하하하“
내가 알기로는 김지욱 상무와 김지영 이사는 이런 장난을 주고받는 남매가 아니다.
딱딱하고 사무적인 가족으로 아는데.
그런데 오늘 뭐가 그렇게 기분이 좋은지 자주 선을 넘는구나.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의 말에 대꾸했다.
“사실 저도 모쏠입니다.”
“그래? 의외네. 좀 생겨서 왕년에 여자 좀 울렸을 거로 생각했는데.”
“저도 의외였습니다. 지영이도 예뻐서 남자 좀 울렸을 줄 알았거든요.”
“하하하. 거참, 지영이라는 말 계속 들어도 적응 안 되네.”
크게 웃는 김지욱 상무.
옆에 놓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표정을 바꿔 다시 질문을 이었다.
“그건 그렇고, 원 이사. 이번에 커머스 주식을 많이 확보했던데, 돈은 어디서 난 거야?”
“절반은 제 돈이었고, 절반은 다른 분께 도움을 받았습니다.”
“직장 생활하면서 돈을 꽤 모았나 봐?”
“주식을 조금 했습니다.”
“그래? 하하하, 다음에 좋은 소스 있으면 나도 좀 줘. 그리고 다른 분은 김선녀 여사님인가?”
김지욱 상무도 김선녀 여사를 알고 있구나.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그분도 참 신기한 분이야.”
“네?”
“아니야. 그런 게 있어. 하하하.”
김지욱 상무는 손을 허공에 휘휘 저으며 크게 웃었다. 그리고 젓가락으로 반찬을 깨작거리다가 다시 질문을 이었다.
“회사는 좀 어때? 내가 듣기론 요새 커머스 쪽은 전쟁이라던데.”
“이 정도는 할 만합니다. 상무님은 어떠신가요? BO 푸드는 지옥이라고 하던데.”
BO 푸드는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마찰이 많다고 들었다.
그래서 김지욱 상무가 커머스에 관심을 버리고 BO 푸드의 지분 확보에만 몰두한다고 말이다.
“맞아. 푸드는 진짜 뱀 같은 놈들이 하도 많아서 아주 지옥 같은 곳이지.”
“제가 뭐 도울 거라도 있을까요?”
“그건 조만간 우리 둘이 따로 한잔하면서 말하자고.”
오늘 이상하게 호의적이다.
이전에 그를 만났을 때는 차갑고 냉정했는데…….
“밥 더 드릴까요?”
대화가 끊기자, 김지욱 상무의 아내는 거의 빈 내 밥그릇을 보며 물었다.
나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밥을 잘 먹으면 점수를 딴다는 것을 상기하며, 밥공기를 들어 그녀에게 보이도록 했다.
“네, 더 주세요.”
“입맛에는 맞으세요?”
바닥이 보이는 밥공기를 가리키며 미소를 지었다.
“보시다시피, 아주 맛있습니다.”
“다행이네요. 잠시만요.”
김지욱 상무의 아내는 자리에서 일어나 새로운 공기에 밥을 가져왔다. 그리고 내 옆에 내려놓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술은 좀 하나?”
말없이 식사만 하던 김상만 회장의 첫마디는 술이었다.
나는 입안에 있던 음식을 삼키고, 그의 질문에 환하게 웃어 보였다.
“네, 아주 잘 마십니다.”
“소주 괜찮은가?”
소주구나.
고급 위스키나 와인을 마실 줄 알았는데.
나는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소주는 빨대 꽂아서 물처럼 마실 정도입니다.”
재미없었나?
김상만 회장은 내 농담에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그래도 재미있다는 척이라도 좀 해 주지.
김지욱 상무의 아내는 눈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냉장고로 가서 소주와 준비한 소주잔을 쟁반에 담아 왔다.
식탁 위로 소주 한 병과 소주잔이 놓이고, 김상만 회장은 병뚜껑을 뜯어, 나와 김지만 상무에게 한 잔씩 따라줬다.
그리고 나에게 소주병을 내주고, 자신의 잔을 들어 올렸다.
<넉살은 좀 있는 놈이구나. 하긴, 어린놈이 치고 올라온 거 보면 뭔가 다르긴 하겠지.>
소주병에서 들려온 김상만 회장의 기억.
지극히 평범하다.
재벌 집이라 뭔가 다를 줄 알았는데.
나는 그의 잔에 소주를 따라주고, 술병을 테이블 위로 내려놨다. 그러자 김상만 회장은 곧바로 소주를 비우고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다시 숨 막히는 정적이 이어졌다.
나는 밥 한 공기를 꽉꽉 눌러준 김지욱 상무의 아내 덕분에 배가 터질 것 같았지만, 남기면 안 된다는 생각에 억지로 입안으로 욱여넣었다.
김지영 이사는 그런 나를 힐끔 보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침을 부실하게 먹었나?”
“아가씨, 밥 좀 더 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아요. 전 여기 옆에 있는 지훈 씨 밥 조금만 뺏어 먹을게요. 괜찮지?”
김지영 이사는 내 밥그릇에서 크게 한 숟가락 덜어서 자신의 그릇에 담았다.
눈치챈 것이다.
내가 억지로 먹고 있다는 것을.
나는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식사를 마친 김상만 회장이 숟가락을 내려놓고 술병을 잡았다.
“한 잔 더 하겠나?”
“네, 제가 먼저 드리겠습니다.”
나는 김상만 회장이 들고 있던 술병을 두 손으로 받아 들었다. 그리고 그의 잔에 술을 따르며 조금 전의 기억에 귀를 기울였다.
<여사님이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정확하지. 근데, 이놈은 여사님과 무슨 관계일까? 무슨 관계기에 그렇게 말한 것일까?>
여사님이라면 김선녀 여사인가?
그래서 그랬구나.
그녀의 칭찬이 있어서 나를 이렇게 대했구나.
둘은 어떤 관계일까?
도대체 어떤 관계이길래, 김상만 회장과 김지욱 상무가 이렇게 호의적으로 변한 것일까?
나는 김상만 회장이 따라주는 술을 받고, 고개를 돌려 술을 넘겼다.
그렇게 여러 차례 술병이 오갔다.
테이블에 빈 병이 쌓였고, 가장 먼저 취한 것은 김지욱 상무였다.
“내가 너 처음 봤을 때 어땠는 줄 알아? 새파란 놈이 눈깔 까고 들어오는데……. 와 저 새끼가 나 잡아먹겠구나 했지. 하하하.”
“제가 그 정도였습니까?”
“그래! 너 그때 진짜 재수 없었어. 그런 놈이 내 앞에 지영이 애인이라고 떡하니 앉아 있으니. 내가 어떻겠어? 응?”
김지욱 상무의 막말에 김상만 회장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러자 분위기를 눈치챈 김지욱 상무의 아내가 식탁에서 일어나, 그의 옆구리에 손을 넣으며 일어나라는 신호를 보냈다.
“너무 취하셨어요.”
“아, 왜? 모처럼 재미있는데?”
“내일 출근하셔야죠.”
“아……. 출근. 출근! 그놈의 지옥 같은 회사에 또……. 아버지. 그냥 내일 확 들이받아 버릴까요?”
김지욱 상무는 김상만 회장을 보며, 어리광 가득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올라가서 먼저 쉬어라.”
차갑게 깔린 김상만 회장의 목소리.
김지욱 상무는 술이 확 깨는지, 고개를 좌우로 크게 젖고, 반쯤 감긴 눈을 깜빡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내의 어깨에 팔을 감으며 허공에 손을 휘휘저으며 사라졌다.
“미안하네.”
“아닙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김지욱 상무가 자리를 뜬 이후, 나와 김상만 회장은 한 병을 더 빨리 비워 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내 걱정이 섞인 목소리에, 김상만 회장은 말없이 옆에 앉아만 있는 김지영 이사를 바라봤다.
“지영이는 내가 미안한 것이 참 많은 아이야. 잘 해 주게.”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자네……. 궁금하지 않나?”
“네?”
“내가 왜 이렇게 자네를 쉽게 받아들이는지 말이야.”
김선녀 여사가 나에 대해 좋게 말해 줬다는 것을 알기에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하지만 둘의 관계는 궁금했다.
도대체 어떤 관계기에 그녀의 칭찬을 그대로 받아들였는지 말이다.
나는 두 손으로 술병을 들고, 김상만 회장의 잔에 따라주며 입을 열었다.
“아버님이 사람을 볼 줄 아시는 거겠죠.”
“아버님?”
술잔을 들고 잠시 생각에 빠진 김상만 회장.
그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도 알겠지만, 지욱이, 지영이, 태하……. 정작 내 자식들은 날 아버지라 부르지 않네.”
“알고 있습니다.”
“넉살이 좋은 건가? 아니면 가식적인 것인가?”
“김선녀 여사님은 뭐라고 하던가요?”
내 말에 김상만 회장의 놀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주 잠깐…….
그는 술잔을 비우고 곧바로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여사님의 손녀딸도 만났었나?”
“네, 두 번 정도 만났던 것 같습니다.”
“여사님은 그 아이랑 자네가 잘 어울리겠다는 말이 전부였네.”
그게 전부라고?
그 정도의 말로 나를 초대한 것인가?
도대체 둘이 어떤 관계길래…….
그리고 김선녀 여사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길래…….
이럴 때일수록 직진이 먹히는 법.
나는 김상만 회장의 잔에 술을 따르고, 내 잔도 채웠다. 그리고 잔을 비우고 김상만 회장의 눈을 똑바로 보며 물었다.
“아버님. 커머스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될 수 있습니다. 상장을 해도 계속 가지고 계셔야 합니다.”
“……!”
내 발언에 놀란 표정을 하는 김상만 회장.
하나의 술병이 오가며, 나는 김상만 회장과 김지욱 상무의 기억을 들었다.
그래서 그들이 상장 후에 주식을 내놓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경영권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 그들의 주식이 필요하다는 말을 한 것이었다.
김상만 회장은 술잔의 술을 비우고, 다시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여사님의 눈이 역시 정확하군.”
“…….”
“자네도 알겠지만, 커머스가 상장하면 나는 가진 지분을 모두 내놓을 걸세.”
“커머스가 푸드보다 가능성이 없다고 보시는 겁니까?”
“아니. 내가 키워 온 회사를 버릴 수 없을 뿐이야.”
술잔을 비우고 고개를 끄덕이는 김상만 회장.
나는 곧바로 그에게 물었다.
“그럼 아버님이 주식을 내놓으시면, 여사님의 주식만 남게 되는 것입니까?”
“……!”
“대충은 알고 있습니다. 아버님의 투자금 중 일부가 여사님의 돈이라는 것을요.”
내게 술을 따라주던 김상만 회장이 잠시 멈췄다.
나는 재빨리 술병을 들고 그의 조금 전 기억에 귀를 기울였다.
<커머스를 내주지 않으면 지욱이가 푸드를 가져갈 수 없어.>
이 짧은 기억으로 모든 의문이 깨끗이 사라졌다.
김선녀 여사의 지분은 BO 커머스는 물론, BO 푸드에도 많이 들어가 있다.
그리고 그녀는 김지욱 상무를 지지하지 않는다.
이에 김상만 회장은 커머스를 내주기로 하고, 김지욱 상무를 회장 자리에 앉히려 하는 것이다.
그래서 김지영 이사에게 미안하다고 했구나.
오빠를 위해서 7% 지분을 들고 있는 허수아비 역할을 해야 하니까.
나는 술잔을 내려놓고 김상만 회장에게 다시 물었다.
“정근영 대표님의 지분도 여사님이 관여하신 겁니까?”
“그럴걸세.”
“그럼 여사님의 지분이 51%가 넘는 겁니까?”
“나도 잘은 모르네. 그냥 여사님은 최구열과 정근영을 통해 계속 사 모으셨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야.”
“왜 여사님이 그렇게 커머스의 지분을 사는지 모르십니까? 여사님의 눈이 정확하다면서요?”
내 목소리가 커지자, 옆에서 가만 듣고 있던 김지영 이사가 내 팔을 잡았다. 그리고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그만하라는 신호를 보내왔다.
힘들었을 것이다.
자신의 피와 땀이 들어가 있는 BO 푸드를 아들에게 주기 위해서.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커머스에는 나와 김지영 이사, 그리고 다른 직원들의 피와 땀이 서려 있다. 그리고 나 또한 이 회사를 경영권을 전혀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 싶은 마음은 없다.
나는 말없이 술잔을 꽉 움켜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