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117화>
118. 이 프로젝트는 저희가 진행하는 거죠?
이튿날 MD 사업부의 회의실.
나와 고동수, 김명진 부장이 커다란 테이블 앞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맞은편에는 특판팀의 마성근 팀장과 김현희가 우리와 마주했다.
“팀장님, 기획서는 확인하셨죠?”
“네, 확인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는지……. 현희가 평소에는 조금 엉뚱한 것 같기는 한데, 가끔 보면 천재가 아닌가 싶더라고요.”
내 질문에, 마성근 팀장이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리고 나와 다른 부장들을 번갈아 보며 기대가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 프로젝트는 저희가 진행하는 거죠?”
진심으로 욕심을 내는 마성근 팀장.
그는 불가능하다는 선을 그어 놓고 말하던 고동수 부장과는 달랐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내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다.
“TF를 구성해 줄까요?”
“아닙니다. 특판팀 인원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리고 현희가 낸 아이디어인데 당연히 저희가 지원해야죠.”
“괜찮겠어요?”
“네, 이거 잘만하면 충성 회원을 만들 수 있는 거잖아요. 무조건 해야죠.”
커머스의 성장이 예전과 같지 않은 이유는 바로 충성 회원이 제로라는 것 때문이다.
검색 한 번으로 가격을 비교할 수 있는 지금.
소비자가 가격이 낮은 제품을 구매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다. 그래서 우리는 충성 회원이라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고, 책에만 나오는 단어라고 치부하고 있었다.
“다양한 예측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회원의 입장과 회사의 입장을 모두 고려해서 적정한 금액과 혜택을 조정해야 합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아마존 프라임의 시스템을 그대로 베껴서도 안 됩니다. 그들과 우리는 시작부터가 달라야만 합니다.”
아마존의 유료 멤버십 서비스, 프라임 멤버십.
서비스 가입자는 1억5천만 명이 넘었고, 이 서비스를 통해 그들의 분기 영업 이익은 220% 이상 성장했다.
하지만 이곳은 미국이 아닌 대한민국이다.
가입자는 그들에 비해 떨어질 것이고, 혜택을 줄인다면 아마존과 비교되어 웃음거리만 될 수도 있다.
결국, 회사와 회원을 모두 만족하게 한다는 것.
이것은 고동수 부장의 말처럼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 될 수도 있다.
“그……. 그건 전혀 다릅니다. 제가 기획한 멤버십은 음……. 처음부터 할인율을 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아랫입술을 질끈 깨무는 김현희.
그녀는 인턴의 신분으로 사업부의 가장 높은 사람들과 회의를 하고 있었기에, 꽤 긴장한 것 같았다.
나는 그녀의 긴장감을 풀어 주고자, 최대한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잘 계산해야 해요. 자칫 할인이 높아지거나, 멤버십 가입 비용이 줄어들면 장기적으로 손해를 볼 수 있으니까.”
내 말에, 긴장한 김현희를 대신해서 마성근 팀장이 재빨리 답했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영진 과장이 이런 일은 잘합니다. 단 1원도 새나가지 않도록 철저하게 계산할 겁니다.”
“그래요, 수요 예측까지는 얼마나 시간이 필요하겠습니까?”
“3일만 주십쇼.”
마성근 팀장의 답에, 고동수 부장은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불만을 표했다.
“3일? 이걸 진짜 3일 만에 끝내겠다고요?”
“네, 가능합니다.”
“그리고……. 정말 특판팀에서 할 수 있겠어요?”
“네.”
“그것도 인턴이 낸 아이템을?”
“네, 일단 저와 제 팀원들은 충분히 실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성근 팀장이 자신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답했지만,
고동수 부장은 고개를 저으며 영 미덥지 못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지금 특판팀 인원이 일곱이죠?”
“네.”
“팀장님은 BO푸드에서 창고 관리직을 주로 하셨고?”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정말 할 수 있겠어요? 이거 회사가 손해 안 보게 하시려면 철저하게 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그럴싸한데 나중에 보면 손실이 날 수도 있어요. 그렇다고 너무 빡빡하게 굴면 오히려 회원들에게 반감을 살 수도 있고.”
“압니다. 그래서 저희가 하겠다는 겁니다.”
“기획부터 시뮬레이션까지 한 치의 오차도 있으면 안 됩니다. 회원이 악용할 수 있는 거리를 만들어 주면, 금방 무너질 수 있어요!”
“그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의 마성근 팀장.
고동수 부장은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나에게 말했다.
“원 부장님. 진짜 이거 하실 겁니까? 그것도 특판팀이?”
“네, 왜요?”
“이거 처음부터 잘못하면 리스크가 커질 텐데요? 불안하지 않으세요? 특히 경험이 없는 특판팀이 맡기면…….”
“그럼, 고 부장님 생각에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정말 하고 싶다면, 차라리 전략 기획부에 맡기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양 부장은 아마존에 인맥도 있어서, 잘하면 그쪽 데이터도 받아 볼 수 있을 겁니다.”
고동수 부장은 대놓고 마성근 팀장과 특판팀을 내리깔았다.
물론 그의 말대로 특판팀은 서비스 기획의 경험이 없다.
그나마 기획력이 좋은 김경일 팀장까지 펫 카테고리로 이동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지금 MD 사업부 내에서 특판팀만 한 적임자가 없다.
그들은 커머스 안의 작은 커머스라 부를 수 있는 특판을 운영하면서 하나의 카테고리가 아닌 다수의 카테고리를 만져 봤다.
또한, 그 안에서 기획과 물류, CS까지 모두 경험하기에 회원과 회사의 입장을 모두 이해할 수 있는 파트이기도 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회의 내내 기획서만 보던 김명진 부장에게 물었다.
“명진 부장, 생각은 어때?”
“저도 이건 반반이라고 봅니다. 상장 전에 영업 이익을 높일 수 있기 프로젝트지만, 장기적으로 보기에는 너무 위험 요소들이 많아요. 그리고…….”
“그리고 뭐?”
“제일 걱정되는 것은 괜히 아마존 프라임 흉내만 내다가 욕은 욕대로 먹고, 실속도 못 차릴 것 같아서입니다. 프라임은 1억5천만 명이 넘게 가입한 서비스라 그만큼 주어지는 혜택의 퀄리티도 좋아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근데, 우리나라만 놓고 보면 100만, 아니 솔직히 10만도 힘듭니다. 거기다 연회비 3만 원씩 때린다고 해도 겨우 30억이라는 말인데……. 부장님 생각보다 규모가 작을 수 있습니다.”
김명진 부장마저도 위험성에 대해 말했다.
하지만 마성근 팀장은 전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3일만 시간을 주십시오. 부장님들이 모두 만족하실 수 있는 기획서와 수요 예측을 가져오겠습니다.”
나는 옅은 미소를 짓고, 김현희를 바라보며 물었다.
“현희 씨는 어때요?”
“자……. 자신 있습니다.”
“좋아요. 그럼 한번 해 보세요. 3일 후에 MD 사업부의 차장, 팀장님들까지 설득하려면 꼼꼼히 준비하셔야 할 겁니다.”
“다른 팀장님들까지요?”
“왜, 자신 없어요?”
“아닙니다.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씩 웃고, 옆에 앉은 김명진 부장과 고동수 부장을 번갈아 봤다.
“두 분 다 3일 후에 냉정하게 다시 판단해 주세요.”
* * *
내 책상 위 키보드 앞.
손바닥만 한 상자가 두 개가 곱게 포장된 상태로 놓여 있었다.
누구지?
나는 주변을 둘러보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상자 하나를 열어서 안의 내용을 확인했다.
검은색 명품 명함지갑.
명함 지갑을 오른손으로 잡자,
<지훈이는 블랙이 잘 어울려. 그래도 명함 지갑은 좀 포인트를 줘서 아이보리로 갈까? 아……. 흰색도 깔끔해서 좋아 보이는 데…….>
<너무 싼 거 아닌가? 다른 브랜드를 찾아볼까?>
<마음에 들어야 하는데…….>
이 명함 지갑을 고르기 위해 많이 고민했구나.
나는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명함 지갑 안을 확인했다.
여러 장의 명함들.
그리고 그 위에는 마켓 프레스의 로고와 MD 사업부 이사 원지훈이라는 글씨가 박혀 있었다.
나는 씩 웃고, 남은 상자를 열어 안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벤츠의 로고가 박혀 있는 차 키.
그리고 밑에는 작은 메시지 카드가 함께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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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훈아. 축하해.
네가 있어서 정말 든든해.
그리고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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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영 이사의 글씨체.
회사의 이사에게는 리스한 자동차가 나온다.
아직 정식 발령까지는 일주일 정도 남았는데, 김지영 이사가 미리 손을 썼나 보다.
나는 명함과 차 키를 책상 서랍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지영 이사의 사무실 앞.
자리에 앉아 있던 황도만 실장이 심각한 표정을 짓고 고개를 좌우로 틀었다. 마치 이곳에 절대 오지 말라는 신호처럼 말이다.
내가 멈칫하는 사이, 사무실의 문이 열리고 표정이 좋지 못한 김상만 회장이 밖으로 나왔다.
그는 가만 멈춰 있는 나를 보자마자, 미간을 찌푸리며 마치 외나무다리에서 원수를 만난 것 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잠깐 나 좀 볼 수 있겠나?”
벌써 회장님의 귀에까지 들어갔구나.
언젠간 부딪쳐야 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나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네.”
그의 뒤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올라가는 사이,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굳게 닫힌 문만 바라봤다.
숨 막히는 정적.
형언할 수 없는 압박감에 먼저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의 뒤를 따라 사무실로 들어갔다.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지?”
김상만 회장은 나에게 앉으라는 말도 하지 않고 소파의 상석에 앉으며 물었다. 나는 그의 옆에 그대로 선 채로 고개를 숙이며 질문에 답했다.
“서른입니다.”
“서른이라……. 지영이랑은 일곱 살 차이군.”
딸의 나이도 모르는 건가?
나는 고개를 숙인 채로 그가 틀렸다는 것을 말했다.
“아닙니다. 열 살 차이입니다.”
“열 살?”
“네.”
“근데 왜지?”
“네?”
“왜 지영이냐고 물은 것이네.”
“이유는 없습니다. 지영이가 그냥 좋습니다.”
정면을 보고 있던 김상만 회장은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보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지영이?”
“네. 저는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후……. 앉지.”
김상만 회장은 그제야 나에게 앉으라는 말을 했다.
내가 자리에 앉자, 그는 곧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
“목표를 가진 사람은 무섭지. 자신의 목표를 위해 뭐든 하니까.”
내가 그녀를 만나는 이유가 돈이나 성공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구나.
하긴 그럴 수도 있다.
김상만 회장은 나에 대해 잘 모르니까.
나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단호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닙니다.”
“자네도 알겠지만, 난 조그만 만둣집에부터 시작했네. 만두소 안을 좋은 재료로 채우기 위해서 새벽부터 마장동까지 직접 갔고, 각종 채소는 직접 발품을 팔아가면서 하나하나 다 준비했네. 남들은 그런 날 미친놈이라고 불렀지.”
저 말은 김상만 회장의 자서전에서 본 내용이다.
“알고 있습니다.”
“노력하면 사람들이 언젠가는 알아줄 거로 생각했어. 근데 아니더군……. 살다 보니까 노력을 대신할 수 있는 지름길은 꽤 많더군.”
고개를 푹 숙인 김상만 회장.
그는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눈빛을 하며 말을 이었다.
“난 자네 같은 사람을 잘 알아. 목표가 있으면 그를 위해서 뭐든 해내는 사람. 내가 그랬으니까.”
“…….”
“다시 생각해 보게. 자네가 이루고 싶은 목표 때문에 내 딸이 불행해지는 것은 내가 용납할 수 없네.”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제가 지름길을 찾으려 했다면, 지영이를 선택하지 않았을 겁니다. 저는 그녀를 사랑했기에 돌아가는 길임을 알면서도 선택한 것입니다.”
“돌아가는 길이라…….”
“네. 저에게는 정근영 대표나 최구열 이사가 지름길이었죠.”
“그럼 내 딸 때문에 그들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것도 아닙니다. 그들이 틀렸기에 선택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김상만 회장은 아무런 답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창문 밖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 밖을 바라보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 집으로 오게. 식사나 함께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