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116화>
117. 그걸 말이 되게 만드는 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소문은 역시 빨랐다.
하루, 아니 정확히 12시간이 지난 지금.
부서원들의 달라진 눈빛과 뒤에서 수군거리는 것들이 느껴졌다.
그리고 사무실 공용 집기들은 그들의 다양한 기억을 여과 없이 내게 들려줬다.
<이사님이랑 부장님? 와…… 대박. 완전 잘 어울릴 거 같은데?>
<그래서 김 이사님이 요즘 그렇게 예뻐졌구나. 역시 사람은 연애를 해야 해.>
<아무리 생각해도 원 부장이 아까운데?>
<요즘은 연상녀가 대세잖아.>
남녀의 순수한 만남으로만 보는 사람들.
<돈 보고 만나는 건가?>
<원 부장님 그렇게 안 봤는데…… 실망이야.>
<역시 돈이 있으면 다 되는구나. 원 부장님 같은 사람도 넘어가고.>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딱 그 짝이네.>
조건을 보고 하는 연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나는 그들의 기억을 훑고 자리에 앉았다.
상관없다.
언제부터 남의 눈치를 보고 살았다고…….
뭐라고 생각하던, 내 마음만 진실하면 그만이다.
그리고 그때, 외근을 다녀온 김태하 팀장이 미간을 잔뜩 구긴 채로 내게 다가왔다.
“너…….”
소문을 들었구나.
다들 뒤에서 수군거리기만 했지, 대놓고 말하는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놀랐지?”
“그걸 말이라고 하냐? 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나한테 미리 귀띔이라도 했어야지. 진짜 너…….”
다음 말을 잇지 못하는 김태하 팀장.
나는 그의 어깨를 툭 치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사람 감정이라는 게 참 신기해. 그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언제부터야?”
“한 달 좀 넘었어.”
“어쩌려고 그러는 거야?”
“뭐가?”
“도대체 무슨 생각이냐고?”
나는 김태하 팀장의 질문에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꼭 그런 것들을 생각하고 만나야 하나? 그냥 좋아서 만나면 안 되는 건가?”
김태하 팀장은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리고 알았다는 표정을 짓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참 너답다.”
“그 말 칭찬이지?”
“그래, 이 자식아. 그리고 이건 동생으로서 말하는 건데.”
동생?
그의 입에서 동생이라는 말을 듣는 것은 처음이다.
“동생?”
“착한 누나 눈에서 눈물 나게 하면 내 손에 죽는다. 알았어?”
김태하 팀장은 내 어깨를 툭 치고 등을 돌렸다.
나는 멀어지는 그의 등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래.”
* * *
딸각! 딸각!
직원 대부분이 퇴근한 사무실.
기지개를 크게 켜고, 사내 인트라넷 페이지를 열었다.
대리 이하의 직원들이 아이디어를 등록하는 게시판.
등록한 게시글이 한 건도 없는 날이 대부분이지만, 나는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 게시판을 확인해 왔다.
그 이유는 단 하나.
그들의 순진무구한 상상력을 얻기 위함이었다.
경험이 많은 사람은 오히려 생각이 굳을 수 있다.
이 기획은 이래서 안 되고, 저 기획은 저래서 안 될 것이라는 울타리를 미리 쳐두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경험이 시간을 줄여 효율을 높인다고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경험이 상상력을 막아 버리는 경우가 될 수도 있는 법이다.
물론, 경험이 적은 사람이 만든 기획서는 현실성이 떨어진다.
하지만 나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다.
현실성이 떨어져도 이를 보완할 수 있는 기획.
상상 가득한 기획서에 현실이라는 울타리를 쳐 줬을 때 시너지를 낼 수 있는 기획.
---
멤버십 회원 활용 정책과 비전
특판팀 인턴 김현희
---
멤버십이라…….
김현희가 이곳에 올린 것은 처음이다.
아직 인턴의 신분이지만, 서비스 기획에 두각을 보이던 그녀가 어떤 기획서를 썼을지 무척 궁금했다.
게시판의 내용을 확인하고 첨부 파일 PPT를 내려받았다.
그리고 파일을 열자 깔끔하게 제목을 적은 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녀가 정성껏 만들어 낸 페이지를 하나씩 넘기며 안의 내용을 확인했다.
“흠…….”
회원에게 연회비를 받고 할인쿠폰을 준다라…….
마치 혜택이 많은 신용카드처럼.
상장을 앞두고, 회원들에게 할인 쿠폰을 팔아서 영업이익을 올리자는 단순한 취지인데.
이거 말이 된다.
잘만 포장하면, 더 많은 서비스에 활용할 수 있다.
나는 문서를 출력하고, 자리에서 반쯤 일어나 멀찍이 앉아 있는 김명진 부장 쪽을 바라봤다.
자리가 깨끗한 것을 보니 퇴근을 했나 보다.
전화해 볼까?
잠시 망설이는 사이, 뒤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 부장님!”
고개를 돌려 나를 부른 사람을 확인했다.
MD 사업부의 고동수 부장과 전략기획부의 양주영 부장.
이 시간까지 남아 있던 건가?
퇴근 시간이 되면 가장 먼저 퇴근하는 인물들인데…….
“네?”
“또 야근이세요?”
양주영 부장이 배시시 웃으며 다가왔다.
불안하다.
도대체 왜 저런 미소를 짓는 것일까?
“네. 양 부장님은요?”
“아……. 최 이사님이랑 회의를 좀 하다가 늦어서요.”
“고 부장님도요?”
“네.”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답하는 고동수 부장.
그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나만 보면 피하려 하는 것 같은 태도를 보였다.
“식사는 하셨어요?”
“이것만 출력하고 먹으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럼 저희도 식사하러 가려던 참인데 같이 가시겠습니까?”
양주영 부장이 묻자, 고동수 부장은 미간을 구기며 싫은 내색을 했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최구열 이사와는 늦은 시간까지 무슨 회의를 했으며, 양주영 부장이 왜 이렇게 내게 호의적인지 말이다.
“그럴까요?”
“네. 가시죠.”
회사 인근의 돼지갈비집.
가운데가 뻥 뚫린 은색 테이블에 원형 간이 의자가 놓인 이곳은 번지르르한 고급 슈트를 입은 이들과 영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곳에 자주 왔던 모양인지 아줌마와 농담을 나누며 음식을 주문했다.
“와. 사장님 요새 잘나가시나 보네? 아주 귀티가 좔좔 흘러.”
주렁주렁 금장식을 건 50대의 여자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메뉴판을 던지듯이 내려놓았다.
“뭐 줘?”
“오늘 귀한 분 모셔 왔으니까, 목전지는 좀 빼고 줘요.”
“왜? 우리 집은 목전지도 맛있어!”
“에이, 사장님. 먹는 거 장사하는 사람끼리 거짓말 치지 맙시다. 여기 돼지갈비 4인분 같은 3인분이랑 소주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시원한 놈으로.”
완벽한 아저씨 스타일의 주문을 마친 양주영 부장은 나를 바라보며 다시 배시시 웃었다.
“여기가 요즘 젊은 사람들 말로는 돼지갈비 성지랍니다.”
“그래요?”
“네. 고기는 대충 그런데, 양념이 아주 죽입니다. 한번 드셔 보세요.”
주문한 소주와 돼지갈비가 나오자, 양주영 부장은 재빨리 소주병의 뚜껑을 따서 내 잔에 따라 줬다.
그것도 두 손으로.
나는 작은 소주잔을 두 손으로 잡아 그에게 예의를 보이고, 다시 그가 잡았던 소주병을 오른손으로 받아 들었다.
<고동수 이놈은 지금 자존심 챙길 때야? 최구열이 완전히 끈 떨어진 연이 됐는데.>
<이제는 김지영이랑 원지훈이 쪽이 훨씬 좋지.>
역시 그랬구나.
이 단편의 기억으로 모든 상황이 정리됐다.
간신배처럼 라인을 갈아타려고 한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그에게 술을 따라 주고, 고동수 부장에게도 두 손으로 정중하게 술을 따라 줬다. 그리고 쟁반에 담긴 고기를 불판 위에 올렸다.
그러자 양주영 부장이 재빨리 내 손의 집게에 손을 얹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할게요.”
“제가 모시고 왔잖아요. 그리고 여기 고기는 조금 특별한 스킬로 구워 줘야 맛이 납니다.”
“네?”
“자자! 그러지 말고 일단 주세요.”
양주영 부장은 내 손의 집게를 뺏은 후, 불판 위의 고기를 집게의 끝으로 휘휘 저었다.
그리고 내 얼굴을 보며 또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긴 불이 세서 이렇게 숯불 코팅을 입히는 것처럼 계속 저어 줘야 합니다. 자, 한잔하실까요?”
“아, 네.”
그렇게 빈 병이 쌓여 가자, 취기가 올라온 고동수 부장이 먼저 속마음을 드러냈다.
“원 부장님, 아니 이제 이사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뭐든 상관없습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네? 얘기 좀 해 보세요. 네?”
“왜 그러세요?”
“김명진이 그놈은 부장 달더니 아예 절 밑에 사람 취급합니다. 나이도 어린놈이.”
내가 아무런 답을 하지 않자, 고동수 부장은 내 눈치를 보고 재빨리 양손으로 손사래를 쳤다.
“아, 이사님 말고요. 이사님에게 한 말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무슨 일이 있었어요?”
“오늘 참 어이가 없어서. 그놈이 저한테 뭐라고 한지 아십니까? 우리 사업부 지난달 매출이 6퍼센트 떨어졌다면서 아주 무시를 하는데……. 진짜 돌아 버리겠더라고요.”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뭐.
김명진 부장의 성격을 잘 알기에, 그 장면이 머릿속에 그림처럼 그려졌다.
나는 씩 웃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고 부장님, 상장 앞두고 매출 비상인 건 아시죠?”
“당연히 알죠. 그래서 새로운 기획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기획?
궁금했다. 미국 그룹폰 때 그렇게 서비스 기획을 잘했다던 그가 어떤 기획서를 내놓을지 말이다.
“갑자기 궁금해지네요. 어떤 기획입니까?”
“들려 드릴까요?”
술기운에 얼굴이 벌게진 고동수 부장이 뜸을 들였다.
그러자 옆에 있던 양주영 부장이 고동수 부장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나를 바라봤다.
“우리 동수 부장이 얼마나 대단한 친구인지 아십니까? 원래 기회는 위기에서 나오는 겁니다.”
뭘까?
뭐길래 저렇게 설레발을 치는 걸까?
내가 가만있자, 고동수 부장은 술잔을 비우고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었다. 그리고 자신만만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지금 상장에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영업이익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입점사들도 그것이 문제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네. 그래서요?”
“자! 그럼 쉽게 말해서 지금이 유일한 기회라는 겁니다.”
“무슨 기회요?”
“수수료를 인상할 기회요.”
“……!”
“그룹폰 때도 매각 직전에 수수료를 올렸습니다. 그때 이미 매각설이 돌던 때라서, 충분히 명분이 있었죠. 지금도 그때랑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대단하다.
이게 바로 경험이라는 울타리에 갇혀 버린 사람이다.
이런 안건으로 최구열 이사와 회의를 했던 것인가?
나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고동수 부장에게 되물었다.
“그럼 입점사들에게는 무슨 특혜를 주시겠습니까?”
“특혜는 이미 받고 있는 거 아닙니까? 사입 비용 선금으로 따박따박 잘 나가고, 물류에 창고까지 다 내주잖아요!”
고동수 부장은 자신의 가슴을 탁 치며,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고 부장님, 특판팀 인턴 아세요?”
“특판팀 인턴이요?”
“김현희 씨라고 긴 생머리에 주근깨 좀 있고, 동그란 안경을 꼈는데. 기억 안 나세요?”
“글쎄요. 인턴까지 제가 잘…….”
“하여간 그 친구가 인트라넷에 새로운 기획서를 올렸더라고요.”
“그렇습니까?”
“궁금하지 않으세요?”
“뭐, 그냥 쓰잘머리 없는 것들을 가져다 놨겠죠.”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술에 취해 초점을 잃은 그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한 명은 입점사들을 대상으로 수수료를 올리려 하고, 한 명은 회원을 대상으로 멤버십 혜택을 팔려고 합니다. 참 재미있죠? 둘 다 같은 서비스를 가지고 다른 생각을 한다는 것이요.”
“멤버십이요? 그게 말이나 됩니까? 가격 비교까지 해 가면서 가장 싼 것만 찾는 회원들에게 멤버십을 판다고요?”
“물론 지금은 안 되죠. 하지만 그걸 말이 되게 만드는 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