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억을 듣는 회사원-115화 (115/223)

<기억을 듣는 회사원 115화>

116. 그 골키퍼가 나야

*   *   *

“지금까지 마켓 프레시의 김지영 이사님과 함께했습니다.”

유튜브 인터뷰와 라디오 생방송까지 끝났다.

다소 지친 듯한 표정의 김지영 이사는 커다란 헤드셋을 벗고, 라디오 진행자와 인사를 나눴다.

“수고하셨습니다.”

예쁘다.

아무리 봐도 저 눈웃음은 너무도 매력적이다.

라디오 부스 밖에서 지켜보던 나는 생수병 뚜껑을 열고 긴 빨대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녀가 부스 밖으로 나오자마자 생수병을 건넸다.

“수고하셨습니다.”

“밖에서 계속 본 거야?”

“당연히 그래야죠.”

생긋 웃는 김지영 이사.

당장 그녀를 끌어안고 귓가에 잘했다는 말을 해 주고 싶었지만, 우리를 보고 있는 스태프들 때문에 환한 미소로 마음을 표현했다.

그때.

“이사님! 수고하셨습니다.”

남자 PD가 야릇한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김지영 이사는 또 매력적인 눈웃음을 지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고맙습니다.”

“다음에 시간 되실 때, 또 출연해 주실 수 있을까요?”

“네?”

“오늘 청취자 문자 반응이 장난 아니었습니다.”

“다행이네요.”

“무엇보다 보이는 라디오 반응이 아주 핫했습니다. 하핫“

“그래요?”

“네, 접속자 어마어마했어요. 제가 PD 생활하면서 그런 접속자는 처음 봤습니다. 실검은 보셨죠?”

PD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태블릿 PC를 내 보였다.

마켓 프레시 김지영이 벌써 실시간 검색어 3위까지 올라 있었다.

“아……. 몰랐네요.”

“하하하 덕분에 저희 프로도 실검 5위까지 올랐습니다. 잠깐 시간 괜찮으세요?”

“네?”

“감사의 의미로 차라도 한 잔 사 드리고 싶어서요.”

나는 둘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PD의 기억을 듣기 위해, 조금 전까지 그가 귀에 끼고 있던 헤드셋을 훑었다.

<저 나이에 어떻게 저런 몸매를? 하여간 돈 많으면 안 되는 게 없는 세상이야.>

<웃는 게 해맑네. 부잣집 딸로 자라서 세상 물정을 모르나?>

이놈도 김지영 이사의 조건과 외모에 관심을 보이는구나.

돈이 많고, 지위가 높으며, 외모까지 훌륭한 김지영 이사는 로또와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친해지면 도움을 받을 수 있고, 더 좋은 관계로 발전하면 인생이 바뀌는.

하지만 나는 하늘에 맹세코 그녀의 조건을 보고 시작하지 않았다.

만약 내가 그녀의 조건들을 사랑했다면, 그녀의 마음을 알았을 때 바로 접근했을 것이다.

“죄송합니다. 다음 스케줄이 있습니다.”

내가 둘 사이에 끼어들자, PD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 그렇군요. 비서님이신가?”

“아닙니다. 직원입니다.”

“그러시군요.”

그는 내게 인위적인 답을 하고, 곧바로 고개를 틀어 김지영 이사를 바라봤다.

“이사님. 연락처 좀 받을 수 있을까요?”

“네?”

“다음에 섭외할 때 직접 연락드리려 합니다. 하핫.”

“그냥 회사로 연락 주세요.”

“그게 아니라…….”

잠시 멈칫하는 PD.

그는 먼 곳을 바라보며, 어렵게 말을 이었다.

“사실은 제가 이사님께 관심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김지영 이사가 머뭇거리자, PD는 더 저돌적으로 대시를 했다.

“저 생각보다 괜찮은 놈입니다. 안 그래 이 작가?”

옆에서 가만 보고 있던 작가에게도 도움을 요청하면서.

괜찮은 놈이라고?

그런 놈이 조건과 외모를 따져?

나는 PD의 가식적인 표정과 말투가 역겹게 느껴졌다.

“우리 이사님 아주 행복하시겠네. 오늘 벌써 두 번째 대시를 받고.”

“지훈아!”

내 비꼬는 말투에 김지영 이사가 나를 말리려 했다.

하지만 나는 PD의 얼굴에 대고 냉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이분 남친이 어떤 분인지 알아요?”

“사귀는 분이 있으셨어요?”

잠시 당황한 표정의 PD는 금세 표정을 바꾸고 말을 이었다.

“골키퍼 있다고 골이 안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기다리겠습니다.”

하아…….

미쳤구나. 아주 단단히 돌았구나.

나는 허리를 숙여, 나보다 10cm는 낮은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 골키퍼가 나야. 그러니까 그만 좀 하지?”

화들짝 놀라는 PD.

나는 그의 어깨를 툭 치고 김지영 이사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빠르게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아무도 없는 엘리베이터 안.

김지영 이사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물었다.

“아까 그 PD님한테 뭐라고 한 거야?”

“PD님은 무슨. 그냥 방송국 물 좀 먹은 얍삽한 새끼지.”

“화났어? 내가 남친 있다고 말할 걸 그랬나?”

“아니야.”

“우리 지훈이가 무슨 말을 했길게 그렇게 사색이 됐을까?”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갸우뚱하는 김지영 이사.

나는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투명한 엘리베이터 밖을 보며 답했다.

“아……. 몰라.”

“그 PD도 참 재미있는 사람인 거 같더라. 이렇게 멋있는 골키퍼 앞에서 골을 넣겠다고 하고.”

김지영 이사가 눈을 반달처럼 그리며 싱긋 웃어 보였다.

짙은 메이크업과 세련된 헤어, 고급 액세서리와 의상.

오늘 유난히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에 남자들이 관심을 보이는 것이 이해가 간다.

뛰어난 외모에 재력과 배경까지 좋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녀를 잃지 않을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든 그녀를 내 곁에 계속 둘 것이다.

*   *   *

마지막 TV 방송 스케줄.

시청률이 잘 나오는 방송이라 그런지, 회사에서 몇몇 임원들이 지원을 나왔다.

BO 푸드 홍보팀의 이정연 팀장.

이정우 이사가 나가고 마케팅 사업부의 실세가 된 김태석 부장.

라인을 갈아타려고 발버둥치는 전략 기획부의 양주영 부장.

MD 사업부의 새로운 김명진 부장까지.

그들은 나와 함께 벽에 등을 기대고 촬영 현장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오늘 이사님 진짜 예쁘시네.”

김명진 부장의 말에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라디오 방송 때가 정점이었지.”

“아까 오후에 했던 거요?”

“응.”

“그럼 부장님은 오늘 연차 내시고 종일 촬영 따라다니신 거예요?”

눈을 깜박이며 묻는 김명진 부장.

실수다.

말이 뇌를 거치지 않고 바로 튀어나와 버렸다.

어떻게 만회해야 할까?

나는 등에 흐르는 뜨거운 땀줄기를 느끼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중요한 일이잖아. 대표 이사의 이미지를 만들 수 있는.”

“그게 왜 부장님한테 중요해요?”

대화를 듣고 있던 김태성 부장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조만간 회사 상장하니까요.”

대충 좀 떨어지면 좋으련만.

김태성 부장은 더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그런 건 우리 마케팅이나 홍보팀이 준비해야죠. MD 사업부가 왜…….”

“이 제품이 좋다고 백날 설명해서 뭐합니까? 커머스의 이미지가 좋아지면 제품도 자연스럽게 반은 먹고 들어가는 겁니다.”

김태성 부장은 그제야 내 말에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다.

대충 둘러 댄 건데…….

나는 고개를 돌려 촬영 현장을 바라봤다.

“하하하하.”

“호호호호.”

별로 웃기지도 않은데 배를 움켜쥐고 웃는 패널들.

이번엔 패널 중 한 명인 30대의 퇴물 아이돌이 거슬린다.

아이돌 때는 인기도 별로였는데, 나쁜 남자 캐릭터 때문에 예능에서 제법 두각을 보이는 놈이다.

더군다나 김지영 이사는 이놈의 팬이라는 말까지 했다.

“역시 이사님이십니다!”

놈이 김지영 이사의 옆에 바짝 달라붙어 맞장구를 치는 꼴이 영 보기 싫었다.

내가 미간을 구기자, 촬영장을 물끄러미 보던 김명진 부장이 내 속도 모르고 떠들었다.

“문상준이가 우리 이사님한테 관심 있나 본데요?”

“관심은 무슨. 그냥 방송이니까 저러는 거지.”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거 같아요.”

“뭐가?”

“원래 저 사람 까칠한 캐릭터잖아요.”

“근데?”

“제가 이 프로 자주 보는데, 문상준이 저렇게 사람 대우해 주는 거 처음 봤어요.”

“대본에 있었겠지.”

내 말이 끝나자, 옆에서 가만 듣고 있던 이정연 홍보팀장이 씩 웃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니에요. 제가 대본은 미리 받아봤는데, 원래는 저런 내용 없었어요.”

“네?”

“이 프로 문상준 씨 때문에 걱정했었는데, 끝나고 밥이라도 사야겠네요.”

“밥은 또 왜요?”

“저렇게 우리 이사님 이미지 띄워 주잖아요. 젊은 커리어 우먼, 뭐든 척척 맞추는 여신 같은 이미지로요. 이 방송 나가면, 바로 실검 1위 가겠는데요?”

이정연 팀장의 말이 맞다.

리액션을 크게 해 주는 문상준 덕분에 김지영 이사가 돋보이긴 한다.

하지만 내 기분은 좋지 못했다.

나도 사람이고 남자인지라 이는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촬영이 잠시 끊어진 사이.

출연진의 메이크업을 수정하려는 스태프들이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갔다. 나와 다른 임원들도 그들의 뒤를 따라 자연스럽게 김지영 이사의 옆으로 갔다.

그리고 그때, 문상준은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선풍기를 김지영 이사에게 건네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조명 때문에 덥죠?”

“괜찮아요.”

“받아요. 전 매니저에게 새로 가져오라고 하면 되니까. 우리 같은 사람은 이런 거 필수품입니다.”

나는 오른손으로 그가 건네는 선풍기를 움켜잡았다.

<한번 올인해 볼까? 크크>

<창연이 그 새끼도 작업 쳐서 팔자 고쳤잖아.>

오늘 하나같이 왜들 그럴까?

왜 내 여자의 조건과 외모에 이렇게 관심들을 보일까?

나는 선풍기를 그에게 돌려주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괜찮습니다. 저희 이사님 추위를 많이 타십니다.”

“그래요? 그럼 따뜻한 커피라도 가져오라고 해야겠네요. 어이 태호 형! 형!”

메이크업을 수정하며 매니저를 찾는 문상준.

나는 그의 매니저가 오기 전에 황도만 비서에게 말했다.

“실장님. 커피 가져오셨죠?”

“네.”

황도만 실장은 손에 들고 있던 따뜻한 커피를 김지영 이사에게 건넸다.

잠시 후, 방송이 재개되고 우린 다시 스튜디오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아까부터 마음에 들지 않던 김명진 부장이 나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옆에 있던 다른 임원들도 다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아까 보셨죠? 선풍기 주면서 눈웃음치는 거?”

“아니.”

“문상진은 캐릭터가 아니라 진짜 나쁜 놈이라고 하던데. 요즘 여자들 나쁜 남자에게 좋아하고 그러잖아요. 하핫“

난 고개를 돌려 김명진 부장의 얼굴을 힐끔 보고, 미간을 구겼다.

“나쁜 남자는 무슨. 조용히 하고 녹화나 봐.”

길었던 촬영이 끝이 나고,

나는 재빨리 김지영 이사의 옆으로 다가갔다.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빨리 그녀를 데리고 나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그때.

“이사님. 맥주나 한잔할래요?”

문상진이 놈이 치근대기 시작했다.

벌써 오늘만 세 번째다.

나는 길게 끌고 싶지 않은 마음에 김지영 이사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잠깐만요!”

문상진이 놈이 김지영 이사의 반대쪽 손목을 잡아당겼다.

“……!”

“아 거참. 맥주 한잔하자는데 뭐가 그렇게 어려워요?”

“저 만나는 사람 있어요.”

그렇지!

아마도 난, 그녀가 이 말을 해 주길 기다렸나 보다.

내 입가에서 끊임없이 미소가 새어 나왔다.

하지만 문상진, 이놈은 방송에서 보였던 이미지와 같은 망나니였다.

“재벌 집 딸이라 그런가?”

“네?”

“나도 돈 많아요.”

당황해서 뭐라고 답도 하지 못하는 김지영 이사.

그녀는 나에게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내왔다.

"내가 방송에서 그만큼 해줬으면 고맙다고 술이라도 사는 게 사람이지. 안 그래요?"

"그만 하세요!"

김지영 이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곧바로 내게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내왔다.

이제는 못 참겠다.

이 버릇없는 망나니 놈의 말.

껄떡대는 다른 놈들의 행동과 더러운 기억들.

내일이면 한 달이 된다는 김지영 이사의 말까지.

나는 김지영 이사의 손목을 잡은 문상준을 손을 꽉 움켜잡았다.

"그만하시죠."

"넌 또 뭐야?"

"나? 골키퍼. 아주 더럽게 멋있는 골키퍼.“

더는 비밀연애 따위를 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도 이걸 원했을 것이다.

지금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당당해지는 것을.

나는 김지영 이사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나를 보도록 했다.

그리고 씩 웃으며,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포갰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짧은 입맞춤을 끝내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한 환한 미소와 함께 내게 답했다.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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