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112화>
113. 내가 싹 엎어 버릴 테니까
“민 대리! 수량 체크했지?”
“승아 씨! 인보이스 작성했어? 그래서 내가 빨리빨리 움직이라고 했잖아!”
“동현 씨! 품목표 출력하고, 선아 대리는 회의자료 준비해!”
설 선물세트를 준비하는 부서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추석 때는 신선식품들의 매출이 높았다면,
설은 가공식품과 건강식품이 주를 이룬다.
특히, 최고의 대목을 맞아 분주해진 건강식품 팀의 최충연 팀장은 눈썹을 휘날리며 여기저기 달려 다녔다.
“마 팀장님! 이번에 장뇌삼 특판 들어간 거 취소 좀 합시다.”
“왜요?”
“설 선물 세트 구성이 너무 딸려서요.”
“인제 와서 이러면 어떡합니까?”
“내가 이럴 줄 알았습니까? 진삼에서 또 수량 못 맞춘다고 징징대니까, 장뇌삼이라도 예비로 두려고 합니다.”
“진삼, 그 양아치 놈들이 또 그래요?”
진삼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 업체로 유명한 곳이다.
우리는 그들의 브랜드 인지도가 높아서 계약했지만, 지금까지 해 온 짓들을 보면 계약을 취소하는 것이 당연할 정도였다.
나는 최충연 팀장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진삼 애들이 또 진상쳐요?”
“네. 부장님. 이 새끼들 분기마다 이러니까, 아주 돌아 버리겠습니다.”
“계약 만료가 언제죠?”
“4개월 정도 남았습니다.”
“계약 수량은요?”
“50퍼센트 가까이 덜 들어왔습니다.”
계약할 때는 매월 납품해야 하는 목표 수량을 정한다.
그리고 우린 계약한 수량만큼의 대금을 미리 선지급한다.
대부분은 3개월 치의 대금을 선지급하지만, 우린 진삼의 브랜드만 보고 1년 치를 덥석 내주고 말았다.
“가산금 조항은 들어가 있죠?”
우리는 1년 치를 선지급해 주는 대신, 목표치를 맞추지 못하면 30퍼센트 이상의 가산금이 붙는 조항을 계약서에 추가한다.
“네. 근데…….”
“왜요?”
“얘네 이번 설 두 달 전부터 공장 가동률 100퍼센트로 올렸어요. 물량 충분하면서, 잔머리 굴리는 겁니다.”
“오픈마켓 들어가려나 보죠?”
“네, 그러겠죠. 그리고 구정 끝나면 우리 쪽에 재고 물량 쏟아 낼 겁니다.”
오픈마켓의 수수료는 8~12퍼센트.
우린 30퍼센트에 가까운 수수료를 받는다.
따라서 제조사는 설과 같은 대목에 수수료가 낮은 오픈마켓에 돌리는 것이 이득이다. 하지만 이는 상도에 어긋난 것으로, 특히 1년 치 선금을 준 우리에게는 더더욱 해서는 안 되는 짓이다.
“흠……. 다음 계약에 쓸 계약서 먼저 수정해야겠네요.”
이런 문제가 발생한 것은 전략 기획부에서 만든 허술한 계약서 때문이다.
표준 계약서가 수정되어야 한다고 진작부터 말은 했는데…….
내 말을 이해한 최충연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진삼은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글쎄요. 지금 나오는 꼴을 봐서는 영 쉽지 않을 것 같아요.”
“명진 부장은 뭐래요?”
이번 조직개편으로 건강식품 팀은 로하스 사업부의 김명진 부장의 소속이 됐다.
“진삼이랑 두어 번 미팅했는데, 딱히 답이 없었나 봅니다.”
생각보다 강적인가 보구나.
상황대처가 빠른 김명진 부장까지 두 손을 들 정도면.
“알겠습니다. 일단 명진 부장을 만나볼게요.”
“예.”
내가 등을 돌리자, 최충연 팀장이 나를 불렀다.
“저 부장님!”
“네?”
“고맙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요.”
나는 씩 웃고, 김명진 부장의 자리로 향했다.
* * *
“진삼, 이 양아치 놈들은 설에 물량 줄이는 것을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던데요?”
김명진 부장이 열을 토해 냈다.
그는 진삼의 담당자인 김한솔 대리와 함께 두 번이나 방문했지만, 그들의 비양심적인 대처에 말다툼만 심하게 하고 나왔다고 했다.
내가 가만 듣고 있자, 김명진 부장은 더 열을 내며 말했다.
“이게 다 계약서 때문입니다. 도대체 누가 이따위 계약서를 만든 겁니까?”
“일단 명진 부장은 계약서 먼저 수정해 줘.”
“설마 직접 가 보시려고요?”
“응. 일단 내가 만나 볼게.”
내 말에 김명진 부장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왜 그런 업체한테 공을 들입니까? 그러지 마세요. 그냥 내용증명 보내고 한판 크게 해 버리죠?”
“일단 이번 설은 넘겨야 하잖아.”
“그야 그렇지만……. 무슨 방법이라도 있으세요?”
“글쎄. 이제 찾아 봐야지.”
“죄송합니다.”
내 말에, 김명진 부장이 고개를 숙였다.
“응?”
“제가 해결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미안하면, 계약서나 꼼꼼하게 수정해 놔.”
“알겠습니다.”
나는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회의실로 김한솔 대리를 불렀다.
그는 준비한 진삼의 데이터들을 들고 와 내게 건네며 입을 열었다.
“데이터 보시면 아시겠지만, 진삼은 추석 때도 물량 빼고 추석 지나고 추가로 30퍼센트 정도 물량을 넣었습니다.”
나는 그가 가리키는 데이터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솔 대리. 추석 때는 어떻게 대처했어?”
“그때는 서흥에서 추가 제품이 들어와서 메웠습니다.”
“서흥이면 배양근이 주력인 업체지?”
“네.”
“이번에도 서흥 쪽 물량을 더 가져올 수는 없나?”
“네……. 이번엔 좀 어렵다고 들었습니다.”
“그럼, 진삼에서 가져오는 수밖에 없는 건가?”
“팀원들 모두가 알아보고는 있는데요……. 이번엔 좀 힘들어 보입니다.”
일찍 준비했어야 했는데…….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
“일단 진삼에 넘어가 보자.”
“부장님이 직접이요?”
“왜?”
“강화까지 가셔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김한솔 대리는 잔뜩 미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씩 웃고, 그가 건넨 서류들을 정리해 주며 답했다.
“이제 금방 설인데, 풍기라도 가야지. 일단 한솔 대리는 약속 잡히면 말해 줘.”
“네. 알겠습니다.”
* * *
늦은 오후.
오늘이 아니면 힘들다는 진삼 쪽의 말에 나와 김한솔 대리가 직접 강화로 향했다.
그리고 뒷좌석에는 오늘의 히든카드.
미친개로 불리는 박대영 차장이 함께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똑바로 못해서 부장님까지 움직이시게 했네요.”
“어차피 한 번은 부딪쳐야 하는 업체였어.”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박대영 차장은 고개를 가운데로 불쑥 내밀며, 섬뜩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솔 대리. 그래서 내가 가는 거잖아.”
“아……. 네네.”
“내가 싹 엎어 버릴 테니까 한솔 대리는 그냥 지켜나 봐.”
“……알겠습니다.”
박대영 차장은 자신감에 찬 표정으로 시트에 등을 기댔다.
우린 그렇게 2시간을 달려 진삼의 공장에 도착했다.
박대영 차장은 저무는 해를 보고 몸을 좌우로 틀며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마치 큰 경기를 앞둔 운동선수처럼.
“자 이제 가 볼까?”
박대영 차장은 입가의 미소를 지우고, 미간의 주름을 소환했다.
“제가 선을 넘으면 부장님이 끊어 주실 거죠?”
“네. 그래야죠.”
“그럼 한번 시작해 보죠.”
박대영 차장이 앞장서서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2층 사무실의 문을 열고, 당당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어디서 오셨죠?”
사무실에 앉아 있던 비교적 어린 직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박대영 차장은 그의 아래위를 훑어보며, 슬슬 발동을 걸기 시작했다.
“마켓 프레시에서 왔습니다. 차동연 부장님 계신가요?”
“아……. 창고 나갔다가 조금 늦으신다고 했습니다. 회의실로 먼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나오겠다는 건가?
그래서 오늘은 히든카드를 데리고 왔다.
내가 씩 웃자, 박대영 차장이 자신이 나설 차례를 알고 한발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젊은 남자를 쏘아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요? 우린 시간이 남아돌아서 강화까지 내려온 줄 아십니까?”
사무실의 사람들이 일제히 우릴 바라봤다.
진삼의 남자 직원은 처음 겪어 보는 것 같은 상황에 크게 당황한 것 같았다.
“…….”
“사람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당장 들어오라고 하세요.”
“아……. 네네”
“빨리 안 가고 뭐 합니까?”
남자가 정신을 못 차리고 어리바리하자, 그는 더 크게 소리쳤다.
나는 사람의 기억을 기초로 나름 논리적인 약점을 잡지만, 박대영 차장은 억지로 상대방의 약점을 찾아내려는 사람이다.
그리고 조금의 흠이라도 그에게 걸리면 사정없이 물어뜯는다.
지금처럼.
“뭘 봐요? 다들 한가한가 보죠?”
“…….”
“이렇게 한가하게 일하니까 계약 수량을 못 맞추는 거 아닙니까?”
그는 사무실에 앉아 있는 30여 명의 직원을 상대로도 당당했다.
우리가 잘못한 것이 없기에 이는 당연했지만, 가끔은 도를 넘는 말이 실수가 될 수도 있으니, 이쯤에서 말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그의 팔을 잡고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일단 조금만 기다려 보죠.”
“후……. 알겠습니다.”
박대영 차장은 씩씩대며 나를 따라 회의실로 들어갔다.
나는 자리에 앉아 회의실에 있는 물건들을 만지기 시작했다. 최대한 모든 기억을 듣기 위해, 책꽂이의 책과 먼지가 가득한 소품들까지 일일이 손으로 만졌다.
<내일 연차 써야지.>
<사장님은 오늘도 출근 안 하시나?>
언제인지 모르는 잡다한 기억들.
지금의 상황에서 도움이 되는 단서가 없다.
그때,
“부장님. 뭐 하세요?”
김한솔 대리가 물었고,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냥 기다리기 심심하잖아.”
“아……. 네.”
잠시 후.
진삼의 차동연 부장이라는 사람이 헐레벌떡 회의실로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창고에 물류가 밀려서 좀 늦었습니다.”
“물류가 밀려요? 우리한테는 물량이 부족하다면서요?”
박대영 차장이 말꼬투리를 잡자, 차동연 부장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크게 소리쳤다.
“그럼 우린 대목에 마켓 프레시만 믿고 손 빨라는 말입니까?”
“뭐요?”
이렇게 나올 줄 몰랐던 박대영 차장이 크게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주도권을 잡기 위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래서 우리가 선금 주고 계약했잖아요!”
“우린 1년에 두 번 오는 기회를 놓치면 휘청하는 회사입니다! 마켓 프레시만 보고 가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말입니다!”
“누가 그걸 몰라요? 그래서 우리가 선금 주는 거 아닙니까? 회사 안정적으로 운영하라고 1년 치 그냥 한 방에 넣어드렸잖아요! 부장님. 그냥 우리 시원하게 툭 까놓고 말해 봅시다. 물류가 있으면서 왜 우리한테는 못 주겠다는 겁니까? 법무팀에서 사람 보낸다는 거 우리 원 부장님이 얼마나 뜯어말렸는지 아십니까? 자꾸 이러시면 우리도 더는 커버 쳐줄 수 없어요!”
눈을 좌우로 돌리는 차동연 부장.
이대로 박대영 차장의 공격에 승패가 결정 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진삼의 차동연 부장, 그는 쉽게 물어뜯길 위인이 아니었다.
“오라고 하세요.”
“네?”
“법무팀 당장 오라고 하라고요. 우린 계약서대로 납품했습니다.”
역시 계약서가 우리의 발목을 잡았다.
완벽한 KO패를 당한 박대영 차장은 지금의 패배를 인정하기 싫었나 보다.
그는 갑자기 차분하고 냉정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이 바닥에도 상도라는 게 있는 겁니다. 아무리 계약서가 그래도 그렇지, 정작 성수기 때는 수수료 낮은 곳에 가져다 팔고, 선금은 선금대로 다 받아 처먹고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뭐요? 보자 보자 하니까, 말씀이 심하시네요.”
“제가 뭐 틀렸습니까?”
이번엔 박대영 차장이 말꼬리를 잡혔다.
생각보다 쉽지 않겠구나.
이제 패배를 인정하고 내가 나서야 할 차례다.
물건들에서는 별다른 단서를 얻지 못했는데…….
나는 흥분한 박대영 차장을 자리에 앉도록 하고, 차동연 부장을 바라봤다.
“차 부장님. 저 기억나세요?”
“네. 원 부장님. 일전에 마프 들어갔을 때 인사 주셨죠?”
“네. 맞아요. 물 한 잔만 주시겠습니까? 오래 기다렸더니 힘드네요.”
“저희 직원이 차도 안 드렸나요?”
“기다리다가 벌써 다 마셨습니다.”
나는 빈 종이컵을 보이며, 씩 웃었다.
그러자 차동연 부장이 밖으로 나가, 생수 세 병을 가져와 우리에게 나눠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