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111화>
112. 할 수 있다면, 하는 겁니다.
* * *
티앤스 사무실.
데스크의 여직원이 금방 담당자를 불러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10분이 지나도 담당자라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황영익은 내 눈치를 본 후, 초조한 표정으로 굳게 닫힌 회의실 문을 바라봤다.
“이렇게 늦으실 분이 아닌데……. 방송 효과가 좋긴 좋은가 보네요.”
“금방 오겠지.”
“그래도 부장님까지 오셨는데, 나가서 한번 물어보고 오겠습니다.”
황영익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회의실의 문이 열리고 하얀 와이셔츠를 입은 남자가 들어왔다.
심한 곱슬머리에 두툼한 몸매.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는 벽에 걸린 시계를 힐끔 보며 어렵게 시간을 냈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오래 기다리셨죠? 요새 커머스들이 하도 많이 찾아와서 시간 내기가 좀 어려웠습니다.”
약속한 시간보다 10분이나 늦어 놓고선 당당하다.
마치 영세한 커머스에 자신의 제품을 내주는 사람처럼.
“원지훈입니다.”
“아……. 원지훈 부장님이시군요. 이태성이라고 합니다.”
나는 그와 명함을 나누고, 황영익이 명함을 나눌 수 있도록 기다렸다.
하지만 이태성 과장이라는 남자는 황영익을 무시하고 그대로 자리에 앉아 버렸다.
“영익 씨는 내 명함 있지? 요새 얼마나 미팅을 하는지, 명함이 부족해서.”
황영익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 예 예.”
“그래. 앉지.”
시건방진 태도와 말투, 사람을 무시하는 행동까지.
그는 말끝마다 황영익을 자신의 아랫사람인 것처럼 대했다.
“요새 좋으신가 봅니다.”
내 질문에, 그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뭐. 그냥 그렇죠. 아, 맞다. 고동수 부장님이었나? 얼마 전에 그분도 다녀가셨습니다.”
고동수 부장.
그는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한없이 약해지는 사람이다.
그래서 저렇게 자신만만하구나.
마켓 프레시의 사람들이 모두 고동수 부장과 같을 줄 알고.
어떤 일이 있었을지 대충 감이 왔다.
“그렇군요.”
“소문대로 꽤 미남이시네요. 하하하“
“고맙습니다.”
“오시는 길은 괜찮았죠?”
“길이 막히지 않아서 일찍 도착했습니다.”
무슨 소문을 들었는지.
그는 나에게만은 굉장히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 사이 황영익은 준비해 온 제안서를 꺼내, 이태성 과장에게 내밀었다.
“과장님 저희가 준비한 프로모션 기획서입니다. 이번엔 특판이랑 동시에 들어가기 때문에, 제품을 좀 더 확보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일단 이번 특판 일정에 맞춰서 계약 수량 전부 다 넣어 주시고, 다음 계약은 일정보다 한 달 먼저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태성 과장은 대충 제안서를 넘겨보다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힘든데 이거.”
“네?”
“마프만 밀어 주면, 다른 커머스들에서 난리나.”
“티앤스는 저희랑 쭉 해 왔잖아요. 그리고 저번에 힘들다고 하셔서 저희가 이벤트랑 배너랑 엄청나게 밀어드렸고요.”
“알지. 근데 정으로만 사업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이태성 과장은 미간을 구기며, 싫은 내색을 팍팍 보였다.
“과장님. 이번엔 저를 좀 봐서 물량 좀 채워 주세요.”
“내가 영익 씨 일 잘하는 거 알지. 그래서 도와주려고 하는데, 이번엔 정말 힘들어.”
“저희 부장님도 오셨는데, 제 체면 좀 세워 주시죠. 네?”
“그럼…….”
이태성은 과장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잠시 생각을 하다가, 무릎을 치며 선심을 쓰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소보루랑 크림빵 가져가는 건 어때? 이건 진짜 화끈하게 밀어 줄게.”
“과장님 그건 좀…….”
“왜? 이거도 티앤스 로고 박아서 파는 거야.”
“마프에서 소보루랑 크림빵은 판매한 적도 없었잖아요.”
“아냐. 요즘 아줌마들 티앤스라고 하면 무조건 먹혀. 가져가 봐. 추억 팔이 좋잖아. SNS 타면 이것도 금방 빵 뜰 거야.”
인기 없는 제품을 대충 떠넘기려 하는구나.
화를 내 볼까?
아니다. 일단 황영익이 어떻게 대처하는지 보자.
나는 팔짱을 끼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래도 그건 저희랑은 타깃이 맞지 않아요. 차라리 소보루랑 크림빵을 오픈마켓 쪽에 판매해 보시는 게 어떨까요?”
황영익의 말이 맞다.
소보루와 크림빵은 우리 회원들의 성향과는 맞지 않는 제품이다.
또한, 우리가 계약한 제품은 타르트지, 소보루와 크림빵이 아니다.
내가 가만히 있자, 이태성 과장은 한 손을 휘휘 저으며 자신의 의견을 재차 주장했다.
“아, 몰라. 타르트는 공장을 24시간 풀로 돌리는데도 모자라. 그리고 영익 씨.”
“네?”
“아니다. 이건 영익 씨가 아니라 부장님한테 말해야겠다. 저, 부장님.”
황영익과 대화를 하던 이태성 과장이 고개를 틀어 나를 바라봤다.
“네.”
“수수료를 좀 조정해야 할 것 같은데요?”
“지금 23% 아닙니까?”
“네, 맞아요. 근데 23%가 말이나 됩니까? 에이마켓은 12%밖에 안 나가요. 마프의 실세이신 원 부장님이 힘 좀 써 주세요.”
이제는 아예 나와 자신을 동급으로 놓고 보는구나.
그리고 23%의 수수료면, 마켓 프레시에서 꽤 낮은 수준이다.
에이마켓은 판매된 것만큼의 수수료만 내는 오픈마켓의 형태고, 우린 계약된 수량을 전량 사입하는 형태다.
또한, 에이마켓에서 판매를 하기 위해서 대략 제품가의 20% 정도를 광고비로 사용해야 하기에, 계산해 보면 오히려 우리의 수수료가 낮은 편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답했다.
“23%라……. 아무래도 이번 계약에서는 조정을 좀 해야겠네요.”
“그렇죠? 부장님 생각에도 수수료가 높죠? 20%로 맞춰 주세요. 안 그러면 저희 물량 에이마켓에 전부 다 풀어 버립니다!”
히죽거리며 말을 하는 이태성 과장.
그는 기고만장한 표정으로 농담 반 진담 반의 말을 건넸다.
고동수 부장에게 이런 방법이 잘 먹혔을지도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먹히지 않을 것이다.
“아니요. 베이커리 기본은 26%인데, 누가 23%로 낮춘 겁니까?”
“네?”
“이번 계약이 끝나면 다음은 26%로 계약서를 새로 써야겠네요.”
“에이, 왜 그러세요? 고동수 부장님은 20%까지 해 주신다고 그러셨어요.”
뭐를 먹었길래, 이렇게 버릇이 없는 것인지…….
회사를 등에 업은 이태성 과장의 행동은 갈수록 가관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사람은 수도 없이 만나고 상대해 왔다.
그래서 지금 그를 상대하기 위해서 어떤 카드를 꺼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것인지 잘 알고 있다.
“하아……. 이거 길게 얘기할 필요가 없겠네요. 영익 씨 그냥 갑시다.”
“네?”
“우리 쪽은 내가 책임질 테니까, 티앤스 쪽은 저기 이태성 과장님이 책임지시라고 하고.”
이것이 가장 쉽게 이태성 과장을 굴복시킬 카드다.
티앤스로 들어가는 1년치 사입비용은 32억.
이들의 회사 규모를 봤을 때,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다.
나는 이번 계약이 틀어져도 충분히 책임질 수 있는 위치에 있지만 겨우 과장의 직급을 달고 있는 그는 계약이 틀어지면서 문책을 당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황영익 또한 내가 이런 자세를 취할 것을 예상했기에, 고동수 부장이 아닌 나에게 도와달라고 한 것이다.
“갑자기 왜들 이러십니까? 하핫“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손사래를 치는 이태성 과장.
그는 드디어 자신의 분수와 주제를 파악한 것 같았다.
그리고 상황이 변한 것을 눈치챈 황영익은 이태성 과장을 더 강하게 몰아 세웠다.
“그냥 없던 거로 하죠. 이번 특판은 티앤스 말고 다른 제품으로 가겠습니다.”
“영익 씨까지 왜 그래?”
“마프에는 남은 계약 물량만 일정 맞춰서 넣어 주세요. 그냥 남은 물량만 판매하고, 티앤스랑은 추가 계약하지 않겠습니다.”
“야! 황영익. 우리 사이에 왜 그래?”
나는 다시 의자에 등을 기대고, 내 말 한마디에 180도 변해 버린 상황을 즐겼다.
“과장님. 우리가 왜 손해까지 보면서 티앤스랑 계약해야 합니까?”
“20%가 뭐가 손해야? 대신 수량을 늘려서 서로 윈윈하면 좋잖아.”
“그냥 12%짜리 오픈마켓에 수량 늘려서 파세요. 그게 서로에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알았어. 알았다고. 일단 이번 특판 물량은 어떻게든 맞춰 볼게. 응? 그럼 됐지?”
“다음 계약은요?”
“영익 씨 보기보다 성질 급하네. 아직 일정도 남았는데, 천천히 하지?”
이태성 과장은 바로 꼬리를 내렸다.
그리고 황영익은 지금의 기회를 최대한 여유롭게 활용했다.
“오늘 바쁘신 저희 부장님도 오셨으니까, 아예 수수료 얘기까지 마무리 짓고 가죠. 김 부장님 안 계세요?”
“응?”
“이런 건 과장님이 하실 얘기가 아닌 거 같은데요? 그래서 저희도 원 부장님이 직접 오셨고요.”
“아……. 그래. 나도 금방 우리 부장님 모셔 올게. 잠시만.”
갑자기 당당해진 황영익.
나는 그가 메모하던 노트를 오른손으로 살짝 잡았다.
<역시 원 부장님은 고 부장이랑 다르네. 이태성이 자식 꼴좋다.>
<이번에 최소 25%까지는 맞춰서 가자. 그리고 물량도 좀 넉넉히 계약하고.>
이제 그냥 지켜만 봐도 잘하겠구나.
그의 기억을 들은 내 입가에 미소가 새어 나왔다.
잠시 후.
밖으로 나간 이태성 과장이 40대의 남자를 데려왔다.
그는 나와 황영익에게 차례로 명함을 건네며, 최대한 정중한 태도를 보였다.
“온라인을 총괄하고 있는 김준성이라고 합니다.”
“네, 원지훈입니다.”
“소문 들었습니다. 이번에 이사로 선임되셨다고요?”
역시 소문이 빠르다.
겨우 3일이 지났는데, 김준성 부장이라는 사람은 나에 대해서 제법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네.”
“축하드립니다. 이렇게 젊고 유능하신 분이 있으니, 마프가 잘 나가는 겁니다.”
김준성 부장은 이태성 과장에게 상황을 듣고 왔는지, 최대한 정중한 태도를 보였다. 확실히 지금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처럼.
“계약 얘기는 제가 아니라 여기 황영익 씨랑 마무리하시죠.”
“아……. 네 그래야죠.”
김준성 부장의 답이 끝나자, 황영익은 재빨리 자신의 의견을 밀어붙였다.
“계약서는 메일로 보내드린 것처럼 25%의 수수료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 영익 씨, 그건 좀 많지 않을까요? 이전보다 수수료가 올라가면 우리도 상당히 곤란해지고…….”
“죄송합니다. 저희도 회사의 규정이 있어서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그럼, 이번 연도 물량을 조금 올려서, 사입 금액을 높여드리는 것은 어떨까요?”
제법 준비를 했구나.
물량을 늘리면 우리도 이득이고, 더 큰 금액을 한 번에 받을 수 있는 티앤스 또한 이득이다.
나는 황영익이 준비한 카드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만족감을 표했다.
“아……. 그게.”
“올해는 50%를 추가로 사입하겠습니다. 그럼 사입 비용은 32억이 아닌, 48억이 되는 겁니다.”
“그게…….”
김준성 부장은 말끝을 흐리며 나에게 어떻게든 조정을 해 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황영익을 불렀다.
“영익 씨.”
“네.”
“티앤스 제품을 50%나 더 받아 낼 자신 있어?”
“네, 100%까지 저 혼자서도 쳐낼 수 있습니다.”
황영익은 자신이 있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씩 웃고, 고개를 돌려 김준성 부장과 이태성 과장을 번갈아 봤다.
“그럼 이렇게 하죠. 우리 영익 씨가 자신이 있다니까.”
“네?”
“100%를 추가로 받겠습니다. 총 64억의 계약이고, 대금은 계약 후 일주일 내로 지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정도면 티앤스 측에서도 마다할 계약 조건은 아닌 거 같은데요?”
“…….”
이태성 과장은 할 말을 잃은 표정이었다.
그리고 김준성 부장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물었다.
“영익 씨는 아직 연차가 적은 MD로 아는데……. 영익 씨가 자신이 있다고 무조건 지르시는 건 좀…….”
“지금까지 황영익 씨랑 일하면서, 이 친구가 틀린 적이 있었습니까? 일할 사람은 제가 아니라 황영익 씨입니다. 영익 씨가 할 수 있다면, 하는 겁니다.”
“……!”
내 확고한 표정과 말투에,
이태성 과장은 꽤 놀란 것 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김준성 부장은 내 생각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