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107화>
108. 43번 만나러 갑니다
* * *
늦음 밤 분리 수거장.
한쪽에 겹겹이 쌓인 종이컵들을 확인했다.
나는 그것들을 하나씩 펼치며, 한쪽 모서리에 적힌 숫자를 확인했다.
낮에 매니저들에게 나눠 준 일회용 종이컵들이 맞았다.
최대한 오래 만지도록 큰 사이즈에 뜨거운 음료를 담았던 종이컵.
이제 버려진 것들이 소중한 기억을 말해 줄 차례다.
그것도 76명의 날고 긴다는 매니저들의 기억을.
준비한 노트와 펜을 옆에 내려놓고, 종이컵을 하나하나 오른손으로 만지기 시작했다.
<줄기 세포로 치매를 치료한다고?>
<이건 유안에서 터트리면 끝나는 거야.>
<1차 테스트 일정이 다음 달이라……. 생각보다 빠른데?>
<유안이면 무조건 믿어야지.>
매니저들 기억의 대부분은 요즘 뜨거운 제약 바이오 주였다.
하지만 지금 유안에 들어가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이렇게 많은 매니저들의 기억이 있다면, 10% 이상 수익을 내기 어렵다는 말이니까.
나는 노트에 정보를 적은 후, 다른 컵들을 오른손으로 만졌다.
<공모주 청약에 60조나 끌어당겼는데, 개장하면 바로 매입 들어가야지.>
요즘 가장 핫한 IT 회사에 대한 기억이다.
운이 좋으면 5%나 먹을까?
이것 또한 지금 들어가기엔 늦었다.
<요즘 시국에 남북 이산 가족? 이게 가능해? 아니야. 아닐 거야.>
<아니지. 꼭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지. 미국이 지원하기로 했으니까. 모든 가능성을 열고 찾아보자 일단.>
43이라는 숫자가 적힌 종이컵에서 흥미로운 기억이 들려왔다.
고급 정보는 합리적인 의심에서부터 시작한다.
이산가족 상봉이라…….
얼어 있던 남북의 관계가 좋아질 시그널이 보이면, 최고의 단타를 칠 기회가 찾아올 수도 있다.
나는 조금이라도 더 많은 기억을 듣기 위해 종이컵을 쓰다듬었다.
<통일부 기자들이 꽤 많이 들어갔는데? 또 엠바고인가?>
<이런 소식을 가릴 정도면 아직 확정은 아닌가?>
<아니지. 기자들이 달려들 정도면 어느 정도 확실한 거로 봐야지.>
<지금이다.>
<아니. 이틀만 두고 봐야겠다. 확실해질 때 들어가도 늦지 않아.>
<그러다 기사 퍼지면 끝이잖아. 지금 대북 주들은 어느 정도지?>
<뭐야, 개성 공단 관련주들이 벌써 움직이잖아?>
<늦은 건가?>
<아니야. 철도 관련주들은 아직 반응 안 했어.>
<금강산 관광주도 그대로인데?>
<방산 주들도 그대로인 거 보면, 아직 기회가 있다는 말인데…….>
<대표님과 공유해야 하나?>
<아, 맞다. 최철용 씨가 통일부 출입 기자지? 먼저 간이나 볼까?>
43번의 종이컵을 받은 매니저가 누군지 모르지만, 생각이 많다.
그만큼 신중하게 움직이려는 것이다.
나는 43번이 적힌 종이컵을 한곳에 두고, 다른 컵들을 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도 대북 주에 대해 기억을 하고 있지 않았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이제부턴 대북 주를 매수할 시간이다.
노트에 메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인터넷에 정보들을 찾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뉴스, 다음은 SNS와 커뮤니티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좋아.”
작지만 가능성 있는 하나의 시그널이 보였다.
북한에 전단을 살포하는 한 단체의 홈페이지에 일주일째 공지가 올라오지 않았다.
내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정부에서 그들과 타협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제 확률이 높은 곳에 모험을 걸어 볼 때다.
나는 마지막으로 통장의 잔액을 확인하고, 컴퓨터 전원을 내렸다.
* * *
다음 날 아침.
내 문자 메시지를 본 최문식 실장이 곧바로 반응했다.
옥상 흡연실로 허겁지겁 달려온 듯한 그는 내 앞으로 다가와 거친 숨을 헐떡였다.
“대북 주요?”
“네.”
“정말 대북 주요? 근데 요즘 시국이…….”
요즘 북한의 이슈가 좋지 못하기에 걱정할 만하다.
하지만 반대로 얘기하면, 그럴수록 정부에서 더 그럴듯한 실적을 원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일단 저는 대북 철도 관련주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매입을 하면, 3일 안에 답이 나올 겁니다.”
“단타를 치자는 겁니까?”
“네. 그것보다 짜릿한 게 있을까요?”
“단타라…….”
내 답에, 최문식 실장이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이며 천천히 물었다.
“부장님은 얼마나 넣으실 생각입니까?”
“5억이요.”
커머스의 주식을 사고, 현재 남은 돈은 5억이 전부다.
내 말을 들은 최문식 실장은 크게 헛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헛……. 5억이요?”
“네, 왜요?”
“단타에 그렇게 많이 넣으신다고요?”
“네. 뭐가 잘못됐나요?”
“아……. 아닙니다. 김수찬 매니저님이 찍어 준 겁니까?”
“아니요. 43번이요.”
“네?”
“시간이 없습니다. 일단 돈을 마련해 두시고 제가 정확한 종목을 찍어 드리면, 바로 사들이세요. 알겠죠?”
최문식 실장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같이하시죠.”
“네?”
“부장님이 투자하실 때 불러 주시면, 저도 옆에서 함께하겠습니다.”
역시 믿지 못한다.
하긴, 갑자기 대북 주라나 나라도 못 믿었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씩 웃어 보였다.
“네, 그러세요. 대신 연락하면 재깍 튀어 오세요.”
내가 등을 돌리자, 최문식 실장이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 가시는 겁니까?”
“43번 만나러 갑니다.”
나는 손을 흔들고, 옥상을 내려왔다.
* * *
43번 커피를 마셨던 이경우 매니저.
그를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에게 투자를 해 보고 싶다고 하자, 대리점의 대표인 김수찬 매니저가 곧바로 그를 소개해 줬다.
“처음에는 5억으로 시작하고, 괜찮으면 더 투자해 볼 생각입니다.”
검은 뿔테안경에 어리바리한 표정.
그는 김수찬 매니저가 별로 얻을 게 없다는 말을 할 정도로, 고작 매니저 생활한 지 1년이 채 안 되는 인물이었다.
“요즘 중국 쪽이 괜찮습니다. 그쪽 관련 종목들을 좀 찾아서 메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아니요. 대하 티아이를 보고 있습니다.”
“대북 주요?”
“네.”
잠시 머뭇거리는 이경우 매니저.
생각을 읽힌 사람들은 대부분 그와 같은 태도를 보이기에, 이는 익숙한 모습이었다.
나는 그의 눈앞에 손바닥을 흔들어 보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왜 그러세요?”
“하……. 그게. 요즘 대북 주를 말씀하신 클라이언트는 처음이라서요.”
“단타 치기에 대북 주만 한 게 없잖아요.”
“저는 별로 추천해 드리고 싶지 않은데, 혹시나 잘못되면…….”
매니저들은 지금의 나처럼 모험 수를 던지는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이는 그들의 직업 습성상 어쩔 수 없는 관례이다.
“제가 선택한 겁니다.”
“…….”
“매니저님은 대하 티아이쪽 IR, 주주 명부, 최근 뉴스 등 정보들 스크랩 좀 해 주세요.”
“그……. 그게.”
내 섣부른 선택에 드디어 할 말이 생겼나 보다.
그리고 나는 그의 이런 반응을 기다렸다.
“왜요? 대하는 아닌가요?”
“철도 주는 아무래도 좀…….”
“그럼 어떤 종목이 좋을까요?”
“…….”
“걱정하지 말고 추천해 주세요. 책임은 다 내가 지는 겁니다.”
종이컵으로는 토막의 기억을 들을 뿐, 이 사람의 생각을 전부 다 알 수는 없다.
내가 숫자를 적어 놓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혹시나 기억이 끊기면, 나머지의 생각을 바로 듣기 위해서.
이경우 매니저는 확신에 찬 나를 뚫어지게 보다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좋습니다. 해 보죠.”
결심이 섰구나.
이렇게 빠르게 결심했다는 것은 어느 정도 확실한 근거를 찾았다는 말이다.
나는 의자를 앞으로 당겨 앉으며, 그의 눈을 마주했다.
“결심했으면, 빨리 시작합시다.”
대리점에서는 종목을 추천해 주기 전, 녹취와 서류로 계약을 진행한다.
그리고 종목 추천에 대한 수익금의 2%가량을 받아 간다.
이경우 매니저는 휴대전화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천천히 입술을 뗐다.
“그럼 지금부터 하시는 말씀은 녹취됩니다. 괜찮으십니까?”
“네.”
나는 그의 질문에 대답하며, 정해진 절차대로 계약을 진행했다.
* * *
3일 후.
“부장님! 부장님!”
옥상으로 올라온 최문식 실장의 얼굴에 흥분이 가득했다.
그는 휴대전화에 실행 중인 주식 앱을 내게 보이며, 광분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떻게 아셨습니까? 이산가족이라니……. 하하하.”
“빼셨죠?”
“네. 물론이죠. 말씀하시자마자 전부 뺐습니다.”
3일 동안 수익률은 65%.
내가 번 돈은 3억이 조금 넘는다.
우리가 주식을 사자 바로 이산가족 상봉에 대한 뉴스가 터졌고, 대북 주들이 가파르게 상승했다.
특히, 이경우 매니저가 찍어 준 북한 관광 관련주들은 매일 상한가를 터트릴 정도였다.
“얼마나 넣으셨나요?”
“6천이요.”
간을 봤나 보다.
옆에서 내가 매입하는 것을 봐 놓고선…….
하긴 처음이니까 그랬겠지.
나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에이, 좀 더 쓰시지.”
“그럴 걸 그랬나 봐요. 부장님은 그럼 3억 넘게 버셨겠네요?”
“네.”
“축하드립니다. 다음에는 있는 돈 몽땅 털어 넣겠습니다. 아니 대출을 받아서라도 다 때려 박겠습니다.”
최문식 실장은 주머니에서 곱게 포장된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리고 부끄러운듯한 표정으로 내게 내밀었다.
“이게 뭔가요?”
“선물입니다. 덕분에 이렇게 많이 벌었는데, 당연히 이 정도는 해 드려야죠.”
나는 그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 귀의 옆에 대고 아래위로 흔들었다.
<난 다음에 사자. 나보다는 부장님이 사람을 더 많이 만날 테니까.>
최문식 실장의 기억.
아마 상자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은 명품 명함지갑일 것이다.
나는 선물상자를 그에게 보이며, 이 안의 것이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뜯어 봐도 되나요?”
“물론이죠.”
포장지를 뜯자, 안에는 역시 명품 명함지갑이 들어 있었다.
“필요하실 것 같아서요.”
나는 씩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명함지갑을 그의 상의 주머니 안에 넣었다.
“이건 제가 아니라 실장님이 더 필요하실 것 같은데요?”
“네?”
“전에 보니까 명함지갑이 오래된 것 같아서요. 마음만 받겠습니다.”
“그래도 받아 주세요. 그래야 제가 마음이 편해집니다.”
최문식 실장은 재빨리 주머니에서 꺼내 나에게 건넸다.
“그보다 하나 부탁드릴게 있습니다.”
“저한테요?”
“네, 실장님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게 뭔가요?”
지금 결과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그리고 앞으로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는 내가 하는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김선녀 여사님이 보유한 커머스의 총 주식을 알고 싶습니다.”
“네?”
“최구열 이사님에게 들어간 주식 말고, 다른 분에게도 섞여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
“실장님 부탁드립니다.”
일전의 대화 중에 김상만 회장이 김선녀 여사를 언급한 적 있다.
그리고 그의 기억에서도 꽤 잘 아는 사이인 것 같았다.
그때 나는 한가지의 가정을 했다.
김선녀 여사의 돈이 최구열 이사외의 다른 사람을 지원했을 수도 있다는 가정을.
만약 내 가정이 맞는다면, 이번 주 금요일에 있을 주총에서 큰 무기로 쓸 수도 있다.
최문식 실장은 예상치 못했던 내 말에 한참을 고민했다.
담배를 피우고, 또 피우며.
그리고.
“그거면 되겠습니까?”
“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알겠습니다. 한번 해 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