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106화>
107. 내가 자네를 지지할 수 없다면?
* * *
월요일 오전.
검은 슈트를 입은 50대의 남자가 사무실 안을 두리번거렸다.
무테안경 뒤로 보이는 뱀처럼 가느다란 눈.
툭 튀어나온 광대와 유난히 얇은 입술이 인상적인 그는 김상만 회장의 그림자라 불리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커머스에는 무슨 일로 왔을까?
내가 물끄러미 보는 사이,
남자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목표물을 향해 걸었다.
“회장님이 찾으십니다.”
남자는 그 흔한 통성명도 하지 않았다.
그냥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만 간결하게 내뱉었다.
“네?”
내가 되물었지만, 그는 아무런 말없이 내가 준비하기만을 기다렸다.
장승처럼 가만 서서.
김상만 회장이 나를 단독으로 찾은 것은 처음이다.
임원들이 모두 모인 회의실에서도 몇 마디 섞어 본 기억이 전부다.
나는 최근에 지분이 늘어서 불렀을 것이라 예상을 하고, 노트와 볼펜을 챙겨 남자의 뒤를 따라갔다.
24층 김상만 회장의 사무실.
똑같은 크기의 사무실에서 MD 사업부 부서원들 100명이 상주한다. 24층 구석의 비서실에는 7명의 비서가 근무하지만, 그들은 그리 큰 공간을 쓰지도 않는다.
똑똑.
앞장서서 걷던 남자가 굳게 닫힌 노크를 하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책상에 앉아 있던 김상만 회장.
근엄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 중앙에 있는 소파의 상석에 앉으면 내게 손짓을 했다.
“앉지.”
그가 가리키는 소파에 앉자, 함께 왔던 남자가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김상만 회장은 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하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영이가 커머스의 대표직에 어울린다고 생각하나?”
첫 질문부터 상당히 직설적이다.
나는 김상만 회장의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왜지?”
“마켓 프레시는 식품 판매량이 90% 이상인 커머스입니다. 여성 회원들의 비중이 80% 이상으로 그들을 대변할 수 있는 인물이 나서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김지영 이사님의 이미지는 이미 매거진과 TV 방송으로 만들어 둔 상태입니다.”
“그것도 좋겠지. 하지만 주주들은 성공의 경험이 있는 최구열 이사를 원하고 있네.”
김상만 회장은 커머스의 대표로 자신의 딸이 아닌, 최구열 이사를 지지했다.
가족보다 회사가 우선인 사람.
딸과 아들에게 아버지가 아닌, 회장님이라고 부르도록 하는 사람.
내가 들어 온 그는 그런 사람이다.
“주주들을 움직일 힘은 과거의 답습이 아닌, 미래에 대한 기대감입니다.”
“틀렸네. 성공의 경험은 주주들의 판단을 쉽게 해 줄 것이네.”
“성공의 경험은 누가 판단하는 겁니까?”
“무슨 뜻인지?”
“성공한 커머스를 왜 매각하고 나왔을까요? 설마, 회장님께서도 비싼 값에 커머스를 매각한 것이 성공이라고 보시는 겁니까?”
얼마 전 그룹폰은 한국에서의 실패를 인정하고 국내 사업부를 접었다.
그렇다고 미국에서 꾸준한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현 커머스의 빠른 변화를 따르지 못했다.
“그래. 사람의 시선에 따라 자네처럼 보는 사람도 있겠지.”
“회장님은 지금 마켓 프레시를 그룹폰과 같이 만드실 생각이십니까? 매출이 상승하면, 최구열 이사처럼 팔아넘기실 생각이신지 묻는 겁니다.”
“흠…….”
김상만 회장은 한 손으로 턱을 만지작거렸다.
지금이다.
조금이라도 생각의 변화가 있는 것 같으면, 바로 밀어붙여야 한다.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다시 말을 이었다.
“마켓 프레시는 온라인 카테고리 중 낮은 비중의 식품군을 타깃으로 했습니다. 그 결과 엄청난 성과가 있었고, 이는 아무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자네는 마켓 프레시의 가능성을 어느 정도라고 보는가?”
“상장 전까지 지금 매출의 2배를 예상합니다.”
“6개월이 남았네. 그게 가능한 일인가?”
“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나는 확신했다.
지금 PB 상품군의 확장과 신규 카테고리의 개발로 매출이 크게 뛸 것을.
김상만 회장은 내 눈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지어졌고 날카로운 눈빛은 더욱 차가워졌다.
“커머스의 이사가 되려 한다고?”
“네.”
“태하와 동창이니, 자네도 나와 태하의 관계를 알겠군.”
“네.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럼 돌려서 말하지 않겠네. 난 자네를 지지할 거야. 처음에는 태하의 부탁을 들어 주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이제는 자네의 자신감에 내 마음이 움직인 것 같군.”
김상만 회장은 말을 마치고,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이렇게 쉽게 끝이라고?
뭔가 불안한 기분이 스멀스멀 들기 시작했다.
나는 궁금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오른손으로 테이블과 위에 있는 메모지들을 훑었다.
하지만 기억이 없다.
마치, 단 한 번도 이 물건들을 만지지 않은 것처럼.
김상만 회장은 찻잔을 입술에 살짝 대고,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저 말이 왜 안 나오나 했다.
지금까지 내가 상대한 돈이 많거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자신이 내주는 만큼 무언가를 받아가길 원했다.
그리고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태하를 사업부 부장으로 올릴 수 있도록 자네가 힘을 써 주게.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그 아이에게 해 준 것이 없어서 말이야.”
김상만 회장은 커머스의 인사권이 없다.
그가 인사권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김지영 이사나 나를 통해야만 한다.
“죄송합니다.”
“거절하는 건가?”
“김태하 팀장은 능력 있는 친구입니다. 하지만 박대영, 장선영 차장도 능력과 경험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자네를 지지할 수 없다면?”
“그래도 답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내 말에, 김상만 회장은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었다.
마치, 내 답을 예상했던 사람처럼.
“끝으로 하나만 더 묻지.”
“네.”
“김선녀 여사님은 어떻게 알게 됐나?”
예상도 하지 못한 질문이다.
김상만 회장도 김선녀 여사를 아는 것인가?
그리고 김선녀 여사와 나의 관계를 안 것일까?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솔직히 답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사님이 먼저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래. 알았네.”
김상만 회장은 짧은 답을 하고, 더는 묻지 않았다.
그리고 눈을 지그시 감은 채로 입가에 찻잔을 가져갔다.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찻잔을 내려놓으려는 순간.
투툭!
받침의 움푹 팬 곳과 찻잔의 끝이 어긋났다.
그리고 그 안에 있던 남은 차가 테이블 위로 쏟아져 버렸다.
나는 재빨리 테이블 위의 티슈를 뽑아, 왼손으로 젖은 테이블 위를 닦으며 오른손으로는 기울어진 찻잔을 움켜잡았다.
<실패의 답습? 그래. 그렇게 생각하는 주주도 있을 수 있겠지.>
<여사님이 왜 이놈을 선택했는지 알겠군.>
내 주장이 조금은 먹혔나 보다.
김상만 회장에게 많은 것을 묻고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그는 인터폰 버튼을 누르고, 밖에서 대기하는 비서실장을 불렀다.
그리고.
“기대하겠네.”
짧은 단어로 나와의 대화에 만족했음을 표했다.
* * *
나는 회장실을 내려 와, 최구열 이사의 사무실로 향했다.
그리고 내가 이곳으로 온 이유는 최구열 이사가 아닌 최문식 실장을 보기 위함이었다.
내가 이사실로 들어서자, 최문식 실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사님을 보러 오셨나요?”
“아닙니다. 실장님을 뵈러 왔습니다.”
내 말이 끝나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를 데리고 사무실 밖의 복도로 향했다.
“점심시간에 잠깐 시간 좀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내 갑작스러운 말에, 최문식 실장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돈 안 버실 겁니까?”
“아……. 네. 네.”
“1시간이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점심시간.
나는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약속한 1층 로비로 향했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던 최문식 실장을 데리고 길 건너편의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여긴 왜?”
최문식 실장의 질문에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고 메뉴판을 둘러봤다.
그리고 가장 비싼 커피를 찾은 후, 입을 열었다.
“콜드 폼 카푸치노 가장 큰 사이즈로 76잔 부탁합니다. 아참, 따뜻하게요.”
“네?”
“콜드 폼 카푸치노 가장 큰 사이즈로 76잔이요.”
“76잔……. 가져가실 건가요?”
이런 주문을 처음 경험해 본 점원이 놀랐나 보다.
나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며 시간이 없다는 말투로 말했다.
“네. 가능하면 빨리 부탁드립니다.”
카페의 점원들이 바빠졌다.
그들은 커피를 내리고, 모양을 내며 주문한 제품을 포장했다.
최문식 실장은 데스크 옆에 기대서서,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뭘 이렇게 많이 사세요?”
“실장님은 커피가 나오면 그곳에 다 숫자를 써 주세요.”
“숫자요?”
“네. 1번부터 76번까지요.”
“아……. 네.”
최문식 실장은 마카펜을 빌려, 음료를 받아가는 곳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캐리어에 담긴 음료에 하나씩 숫자를 적었다.
그렇게 20여 분이 지나자, 카페 안으로 말끔한 슈트를 입은 두 명의 남자가 달려들어왔다.
“아이고 부장님. 그냥 오셔도 저흰 언제든지 환영인데.”
김수찬 FP와 그의 부사수.
내가 부른 사람들이다.
“고마워서요.”
“저희가 고맙죠. 저거 들고 가면 되나요?”
“네. 커피 용기에 번호를 적어 놨습니다. 가시면…….”
“네네. 알아요. 알아.”
손을 휘휘 젓고 미소를 짓는 김수찬 매니저.
번호를 보고 자리에 앉은 순서대로 나눠 달라는 말이다.
이전에도 여러 번 이랬기에, 김수찬 매니저는 이미 알고 있다고 답한 것이었다.
그렇게 76잔의 커피가 모두 배달되고.
나와 최문식 실장은 건물 7층의 FP의 사무실로 들어섰다.
접견실로 들어가자, 김수찬 매니저는 직접 의자를 꺼내 주며 나와 최문식 실장에게 손짓했다.
“앉으시죠.”
“네.
우리가 자리에 앉자, 김수찬 매니저는 브로슈어를 내밀며 한참 동안 설명했다.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거나, 맞장구를 쳐주며 30여 분 동안 대화를 나눴다.
한편, 최문식 실장은 김수찬 매니저의 언변에 금방 속아 버렸다.
“정말요?”
“네, 작년에 차이나 A 레버리지는 수익률 75%나 났습니다.”
“대박이네요.”
“요즘 중국 쪽이 핫하거든요.”
“얼마나 투자를 하면 그렇게 수익이 날까요?”
“한 6개월 정도 저희를 믿고 투자하시면 결론이 날 겁니다.”
“아……. 그럼.”
김수찬 매니저는 강남 지역에서 제법 유명한 사람이다.
그가 관리하는 자산만 2천억이 넘으며, 이곳 매니지먼트의 대표이기도 하다.
나는 손목의 시계를 보고 최문식 실장의 관심을 끊어 냈다.
“일단 생각해 보고 오겠습니다.”
“네. 그러셔야죠. 그럼 언제쯤 다음 약속 잡을까요?”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아쉬운 표정의 최문식 실장이 따라서 일어났다.
김수찬 매니저가 건넨 명함을 주머니에 곱게 넣으며.
밖으로 나온 최문식 실장은 흥분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저 사람이죠?”
“네?”
“김수찬이라는 저 사람이 부장님 돈을 그렇게 불려 준 사람이냐고요.”
“아……. 뭐 비슷하긴 하죠.”
“그럼 부장님도 중국 레버리지 들어가실 건가요?”
“아니요.”
최문식 실장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왜?”
“얼마까지 투자 가능하세요?”
“2천?”
“장난하지 말고요.”
“글쎄요. 얼마나 믿을 수 있을지에 따라…….”
“그래요. 그건 내일 다시 얘기하죠.”
나는 씩 웃고,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최문식 실장은 내 뒤로 따라붙으며, 다소 조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4천은 가능할 거 같습니다.”
“…….”
“6천?”
“그건 일단 내일 결정하시죠.”
“아……. 네. 네.”
사람의 신뢰를 얻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리고 같은 일을 하지 않는 그의 신뢰를 얻는 가장 쉬운 방법은 바로 돈이다.
나는 그를 내 사람으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김선녀 여사와 최구열 이사에 대한 정보를 얻을 것이다.
그래야 내 목표에 다가설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