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억을 듣는 회사원-104화 (104/223)

<기억을 듣는 회사원 104화>

105. 동귀어진

*   *   *

월요일 오후 3시.

MD 사업부의 조직 개편은 내일부터 적용된다.

사업부에는 커다란 파티션이 하나 더 생겼고, 부서원들은 변경된 부서로 자신의 짐을 나르기 시작했다.

“괜찮아?”

김태하 팀장이 내 옆으로 다가와, 위로의 말을 건넸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몇 시지?”

“3시. 근데 너 정말 괜찮아?”

“뭐가?”

“아니다. 그냥 담배나 하나 피우러 가자.”

김태하 팀장을 따라 회사 옥상으로 올라가자, 옥상 구석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김명진 차장과 정진택 팀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들은 나와 김태하 팀장을 보고,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김태하 팀장! 일 안 해?”

정진택 팀장은 어깨에 힘을 주고,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자 김태하 팀장은 미간을 구기며,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팀장님은 벌써 어깨에 뽕이 들어간 겁니까?”

“내가 언제?”

“지금 목소리에 뽕이 가득 찼는데요?”

“그래? 많이 티 났어?”

“네, 엄청요.”

“하하하 그래. 그래도 오늘만 좀 봐줘라. 너무 좋아서 그러니까.”

“그래도 원 부장님 앞에서는 좀 조심하시죠?”

정진택 팀장은 김태하 팀장의 말을 무시하고, 내 옆으로 바짝 달라붙었다.

“부장님은 언제 짐 옮기십니까?”

뭔가 아는 듯한 표정의 정진택 팀장.

나는 차분한 표정으로 그의 질문에 답했다.

“글쎄요. 좀 걸릴지도 몰라요.”

내 답을 들은 김태하 팀장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진택 팀장에게 물었다.

“뭘 옮겨요?”

“12층. 이사 사무실로 옮기실 거잖아.”

“네?”

“몰랐어?”

“뭘요?”

“오늘 있을 이사회에서 부장님, MD 사업부 이사로 선임 될 거라는 소문 말이야.”

“이사요?”

“응, 지분도 11%나 확보하셨다고 하던데?”

역시 정근영 대표의 아들인 정진택 팀장은 남들보다 소문이 빨랐다.

김태하 팀장은 놀란 토끼 눈을 하고 내게 물었다.

“야! 원 부장님! 진짜야? 진짜냐고? 진짜 네가 11%나 산 거야? 그리고 이사 선임도 되는 거고?”

“11%는 맞는데, 이사는 좀 두고 봐야 할지도 몰라.”

“와……. MD 사업부도 드디어 이사가 생기는구나. 난 어디서 다른 인간 데려올까 봐, 조마조마했었는데.”

“그래. 말이라도 고맙다.”

“축하해. 정말 축하해. 하하하“

김태하 팀장과 정진택 팀장은 마치 자신의 일처럼 좋아했다.

그리고 내일부터 부장이 될 김명진 차장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피우던 담배를 끄고, 환하게 웃어 보였다.

“축하드립니다. 원 이사님.”

“이사는 무슨.”

“이사회 끝나면 바로 이사가 되실 텐데요. 이정우 이사님은 나오셨나요?”

“아니. 아마 다음 주 정도에 사무실 정리하러 오실 거야.”

“그렇군요. 그럼 그 방을 쓰시겠네요?”

“글쎄. 다들 너무 설레발 치는 거 아냐? 아직 이사회도 열리지 않았는데 말이야.”

“이사회는 오늘이죠?”

“응.”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오늘의 운세를 봤는데, 우리 원 이사님께 엄청난 재물이 찾아온다고 했으니까.”

*   *   *

오후 5시.

정진택 대표와 최구열, 김지영, 김재열 이사가 작은 회의실로 행했다. 그리고 11%의 지분을 소유한 나도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얼마나 기다렸던 자리인가.

이 자리에 함께하기 위해 지난 1년간 그렇게 공을 들여왔다.

내가 회의실로 들어가려는 순간, 김재열 사외이사가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조용히 속삭였다.

“지훈아. 잠깐 나 좀 보자.”

그를 따라 복도의 끝으로 걸어가자,

그는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최구열이는 반대하겠지?”

“네, 아마도요.”

“내가 일단 강력하게 밀어붙일 테니까, 넌 그냥 가만있어. 알았지?”

“그런다고 될까요?”

“이사회에서 끝내야지. 주총까지 가면 무조건 불리해.”

“너무 힘 빼지 마세요. 전 어차피 이사회에서 끝날 거라고 생각 안 하니까요.”

“그냥 보고만 있어. 내가 다 생각이 있으니까.”

김재열 사외이사는 한쪽 눈을 찡긋하고, 내 어깨를 툭 쳤다.

회의실 안.

가장 늦게 들어온 나와 김재열 사외이사가 자리에 앉자, 회의를 진행하는 김지영 이사가 준비한 안건을 읽기 시작했다.

“이번 회의 첫 번째 안건은 이정우 이사의 사임과 원지훈 부장의 이사 선임 결의 건입니다. 찬반 투표를 하기 전에, 의견이 있으신 분은 말씀해 주세요.”

그녀의 말이 끝나자, 김재열 사외이사가 바로 찬성의 뜻을 보였다.

“전 찬성입니다. 그냥 여기서 만장일치로 후딱 끝내버리죠.”

그의 말이 끝나자, 처음부터 표정이 좋지 못한 최구열 이사가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잠시만요. 저는 생각이 좀 다르네요.”

그의 반대는 이미 예상했었다.

이정우 이사의 주식을 사지 못한 것이 분했을 것이고, 내가 이 자리까지 치고 올라온 것에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는 나와 다른 이사들을 번갈아 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직 원 부장의 이름으로 등재된 주식은 11%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게 뭐 어때서요? 전 겨우 4%고, 김지영 이사님도 7%밖에 없습니다.”

김재열 사외이사가 되묻자, 최구열 이사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김 이사님은 사외이사시니까 이번 일과는 무관합니다. 또한, 김지영 이사님은 회장님의 지분이 있으니, 처음부터 조건이 다르다고 봐야 합니다.”

“그럼 7%를 들고 있던 이정우 이사는요?”

“이정우 이사는 500억의 투자금을 들고 왔기에 지금의 상황과 다릅니다.”

“하아……. 그렇게 다 다르다고만 하면 도대체 누가 적당한 겁니까?”

“그래도 주주들의 동의를 얻으려면 최소 15%는 돼야 하지 않을까요? 조만간 상장 작업이 시작될 텐데, 그때를 위해서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 무덤을 파는구나.

김선녀 여사가 내 앞으로 명의를 바꾸는 순간, 자신은 10%가 되고 나는 20%가 될 텐데.

내가 가만히 있자, 김재열 사외이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주주가 10명도 안 되는 회사에서 무슨 다른 주주들 눈치를 봅니까? 여기 분들만 찬성해도 과반이 넘습니다. 같은 식구끼리 똘똘 뭉쳐야지 자꾸 이러실 겁니까?”

이사는 이사회를 거쳐 주주총회에서 선임된다.

이사회에서 임원 선임의 결의를 하고, 주주총회에서 51% 이상의 찬성표를 얻어서 통과시키는 것이다.

마켓 프레시의 주주는 총 8명.

28%의 김상만 회장, 21%의 정근영 대표, 19%의 최구열 이사, 11%의 나, 7%의 김지영 이사, 4%의 김재열 사외이사, 3%의 김지만 상무, 1%의 이정우 이사.

나머지 6%는 초기에 투자금을 끌어오면서 나눠 준 지분들이다.

지금 이사회 참가자의 지분만 해도 62%.

사실상 이곳에서 결정이 나면 끝이라고 봐도 된다.

19%를 가진 최구열 이사가 반대하면 총 43%로, 주주회의에서 김상만 회장의 찬성을 기대해야 한다.

하지만 이는 지금의 셈일 뿐이다.

김선녀 여사의 9%가 내게로 오면, 최구열 이사의 10%를 빼고도 52%가 되기에, 충분히 과반을 넘는다.

시간은 내 편이다.

그래서 나는 이사회가 아닌 일주일 후에 열리는 주주총회를 노렸다.

“대표님 생각은 어떠신가요?”

최구열 이사의 말에, 정근영 대표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리고 내 눈을 피하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답했다.

“저도 최 이사님과 생각이 같습니다.”

생각이 같다고?

분명, 정진택 팀장의 말로는 정근영 대표가 찬성할 거라 했는데.

왜?

왜 갑자기 마음응 바꾼것인가?

이건 생각도 못했던 변수다.

그가 반대하면 모든 게 꼬이게 된다.

회의실 공기가 차갑게 느껴졌다.

김지영 이사와 김재열 사외이사 또한 당연히 찬성할 거라 봤던 정근영 대표의 반응에 많이 놀란 것처럼 보였다.

“대표님! 이건 너무 억지십니다!”

김지영 이사가 눈을 부라리며 소리치자,

정근영 대표는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응시하며 답했다.

“잘못된 선례를 만들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잘못된 선례라뇨? 그동안 대표님도 원 부장의 공로를 인정하셨잖아요.”

“이사라는 직책은 경영권이 주어지는 자리입니다. 아직 나이도 어린 원 부장에게는 버거운 자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여기서 나이 얘기가 왜 나옵니까?”

“우린 아직 상장 전입니다. 좀 더 경험이 많은 이사진이 필요합니다.”

“원 부장이 그런 사람 아닙니까?”

“그리고 새로운 주주들의 투자를 위해서는 최대한 경영권을 분산하지 않아야 합니다.”

“도대체 왜 반대를 위한 명분들만 늘어놓으시는 겁니까?”

“그런 거 아닙니다.”

“대표님!”

김지영 이사는 분을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긴, 쉽게 내주면 최구열 이사가 아니지.

도대체 무슨 미끼로 정근영 대표를 설득했을까?

나는 그녀에게 한 손을 내밀어 화를 참으라 신호를 하고, 대신 말을 이어 갔다.

“최구열 이사님.”

“네.”

“그 말 책임지실 수 있겠습니까?”

“뭐요?”

“15% 이상은 되어야 한다는 말이요.”

“물론입니다.”

아마 그의 지분이 10%로 떨어지는 순간, 그는 투자금을 끌어왔다는 명분으로 살아남으려 할 것이다.

그런데도 내가 이 수를 던져 놓는 이유는 나중에 그에게 조금의 데미지를 주기 위해 미리 던져놓는 것이다.

나는 당당한 표정의 최구열 이사를 보며 말을 이었다.

“이사님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왜 저를 이사회에 참석시킨 겁니까?”

“부장님이 직접 듣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뭐를요?”

“그래야, 지금처럼 앞뒤 안 가리고 설치는 일이 없겠죠.”

“이사님! 말이 너무 지나친 거 아닙니까?”

불 같은 성격의 김재열 사외이사가 나 대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최구열 이사의 반대는 이미 예상했던 바다.

하지만 정근영 대표의 반대는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

왜일까?

왜 갑자기 마음을 바꾼 것일까?

지금 가장 급한 것은 정근영 대표의 생각을 아는 것이다.

그래야 다음 수를 생각할 수 있으니까.

나는 최대한 침착한 표정을 지으며, 한 손을 올려 김재열 사외이사를 말렸다.

“좋습니다. 그럼 주주회의까지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주주회의까지는 앞으로 일주일.

그때까지 정근영 대표의 마음을 돌릴 방법을 찾아야 한다.

최구열 이사는 자신이 이겼다는 듯한 미소를 짓고 고개를 돌려 김지영 이사를 불렀다.

“김 이사님. 두 번째 안건은 뭡니까?”

김지영 이사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고개를 숙여 준비한 문서를 읽었다.

“두 번째 안건은 정근영 대표이사의 해임과 신임 대표이사 선임 건입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이번에는 최구열 이사가 곧바로 입을 열었다.

“전, 정근영 대표님의 해임을 반대합니다.”

이거구나. 동귀어진.

나와 김지영 이사를 한 번에 묶어 버릴 수 있는 수.

최구열 이사는 자신이 갖지 못할 바에는 같이 죽겠다는 마음을 먹은 것이다.

이 수는 정말 예상 못했다.

욕심 많은 최구열 이사가 대표이사직까지 포기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정근영 대표는 대표이사직을 유지하고 싶어 했었다.

그래서 김상만 회장의 눈치를 보면서 시간을 끄는 데만 주력했다.

그런 그에게 차기 대표이사직에 가장 가까웠던 최구열 이사가 손을 내밀었다면, 이를 절대로 거절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 정근영 대표의 마음을 얻기는 틀린 것인가?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 또 예상하지 못했던 수가 튀어나왔다.

“대표님. 그것 때문에 원 부장의 이사 선임을 반대하신 겁니까? 그렇다면 저도 정근영 대표님의 해임에 반대하겠습니다.”

김지영 이사의 발언에 모두가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이사님!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내가 다급하게 묻자, 김지영 이사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주주들에게는 대표이사가 중요할지 모르지만, 우리 마켓 프레시의 직원들에게는 원 부장님 같은 사람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저는 원 부장님에게 더 많은 권한을 줘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도 생각합니다.”

자신의 대표이사 선임을 포기하겠다는 말이다.

그것도 나를 위해서.

내가 다시 말을 하려는 순간, 김지영 이사가 나를 보고 고개를 젓고, 정근영 대표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대표님 답해 보세요. 제 말이 틀렸습니까?”

정근영 대표는 고개를 숙이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후…… 내일 다시 회의하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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