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103화>
104. 돈이 아닌 사람을 보기로 했어
* * *
오늘은 하루가 참 길었다.
오후 9시.
고급 바의 테이블 위에는 무알코올 칵테일 두잔 놓여 있었다.
그리고 내 앞에서 조잘대고 있는 이현아 대표를 상대하는 나는 마지막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그 꼰대 아저씨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아?”
이현아 대표는 반말이 자연스러웠다.
지금껏 존댓말을 했던 대상이 없는 사람처럼 말이다.
그런 그녀에게 나 혼자 말을 높이는 것은 불공평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곳에 들어온 이후로부터 나도 존대를 하지 않기로 했다.
“몰라.”
“아저씨, 돈 필요하면 이제 할머니가 아니라 나한테 부탁을 하세요. 내가 이제 이곳의 주인이니까. 어때? 멋있지?”
“그래. 참 멋있다.”
“푸하하하, 내가 좀 그래.”
자신의 무용담을 자랑스럽게 말하는 이현아 대표.
나는 하나도 흥미롭지 않았다.
20분 동안 듣고 싶지 않은 얘기를 들었으니, 이제 내가 질문을 해야겠다.
“근데 현아 대표.”
“대표는 무슨. 그냥 현아라고 불러.”
“그래, 현아야.”
“응?”
“할머니랑 최구열 이사랑은 어떤 관계야?”
“오빠네 회사 이사라는 사람?”
“응.”
“그냥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였지. 처음에 돈 빌려 갈 때는 이자도 꽤 높게 가져갔어. 근데 그 꼰대가 7년 동안 원금이랑 이자를 한 번도 밀리지 않고 갚았대.”
“그래?”
맞다. 최구열 이사는 충분히 그런 사람이다.
내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짓자, 이현아 대표는 신이 나서 더 떠들기 시작했다.
“응, 할머니가 그때부터 다르게 보기 시작한 거지. 보통 사업한다는 놈들은 다 오르락내리락하는데, 그 꼰대는 굴곡이 없이 꾸준했대.”
“흠……. 그랬구나. 그래서 마켓 프레시에도 관심이 생긴 거구나.”
“맞아. 원래는 부동산만 하던 할머니가 온라인 사업이 이렇게 돈이 되나 하고 들여다보기 시작한 거야.”
사람을 상대하는 경험이 적어서 그런지,
그녀는 내 질문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술술 답했다.
“근데, 왜 지금은 최구열 이사를 버리려는 거야?”
“그 꼰대는 주변에 사람이 없잖아.”
“응?”
“그 꼰대 주변에 순 날파리들만 가득하고 믿을 만한 사람이 없어. 난 잘 모르는데 할머니가 그랬어.”
“그럼 여사님이 완전 손 떼는 건가?”
“응, 아마도. 우리 할머니 완전 무서워. 한번 돌아서면 절대 뒤돌아보지도 않는 사람이야.”
김선녀 여사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최구열 이사에게서 손을 뗀 이유는 조금 부족해 보였다.
뭔가 더 있을 것 같은데…….
나는 칵테일을 한 모금 마시고 질문을 이었다.
“최구열 이사는 여사님 말고 다른 돈줄이 있을까?”
“아니. 없을걸? 다 끊어져서 할머니한테 다시 온 거로 들었거든. 글구, 할머니가 왜 오빠한테 접근했는지 알아?”
“몰라.”
“그 꼰대가 가장 경계하는 사람이니까. 그래서 파 봤더니, 쿠폰 했던 명진이 아저씨도 그렇고, 주변에 쓸 만한 사람들이 많았대.”
“명진 차장도 여사님 돈을 쓴 거야?”
“응“
김명진 차장이 김선녀 여사의 돈을 써서 알고 있었구나.
그리고 그는 아저씨고 나는 오빠라…….
호칭 때문인지, 아니면 궁금했던 점들을 들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일단 기분은 좋았다.
나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고, 남은 칵테일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가자. 시간 다 됐다.”
“벌써?”
“응, 미성년자께서는 10시 전에 들어가야지.”
“아니거든! 나 이제 완전 성인이거든!”
나는 피식 웃고,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피곤하고, 너 기다리는 기사님도 피곤할 거야. 가자 그냥.”
“치……. 그럼 다음에는 한 시간이다.”
“너 하는 거 봐서.”
오늘은 생각보다 큰 수확이 있었다.
이현아 대표를 통해 김선녀 여사와 최구열 대표에 대해 들었고,
최문식이라는 김선녀 대표의 사람에게 호감을 얻었다.
나는 칵테일 값을 계산하고, 밖으로 나와 이현아 대표를 차에 태웠다.
마지막으로 손을 흔들자, 그녀는 손가락에 입술을 맞춘 후, 내게 후 불어 주는 시늉을 했다.
* * *
토요일 밤 오후 11시.
최구열 이사가 약속한 시간이 이제 한 시간 남았다.
지금쯤 최구열 이사는 똥줄이 타고 있을 것이다.
김선녀 여사가 돌아선 것을 알았을 것이고, 다른 곳들에서 돈을 구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나는 울리지 않는 휴대전화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지이잉! 지이잉!
입금 알림 문자가 아닌, 전화가 걸려 왔다.
- 원 부장. 미안 내가 좀 늦었지?
“아닙니다.”
- 그나저나 조금 미룰 수 있을까?
미룬다라…….
역시, 김선녀 여사가 완전 손을 털었구나.
나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어지간히 급하긴 급했나 보다.
“죄송합니다. 이정우 이사님이 신신당부하고 가셔서요.”
- 아……. 그래.
“역시 하루 만에 그 돈은 힘들겠죠?”
- 아……. 아니야. 내일 이정우 이사가 몇 시에 들어오지?
“오후 3시에 들어오는 거로 압니다.”
- 흠……. 그래. 알았네. 내가 그때까지는 반드시 준비해 보겠네.
“네, 뭐 그러세요.”
- 그래. 고맙네.
무슨 생각인지.
그는 아직 김선녀 여사의 9%가 내게 옮겨 올 것조차도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김지영 이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도착했어?”
- 이제 막 집에 들어왔어. 넌?
주말에도 본가에 들려서 아버지를 설득하는 김지영 이사였다.
내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녀의 의지는 그 어느 때보다 강했다.
“난 소파와 합체하고 있었지. 좀 늦었지만, 영화나 한 편 볼까?”
- 그래. 나 씻고 바로 나갈게.
“오케이. 그럼 모시러 갈 테니까 천천히 준비하고 나와.”
- 빨리 보고 싶다.
“나도.”
내 입에서 이런 달달한 멘트가 나가다니.
나는 피식 웃고, 테이블 위에 있는 차 키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 * *
일요일 오후 2시 30분 인천공항.
최구열 이사에게는 소식이 없었다.
충격이 컸을 것이다. 믿었던 김선녀 여사가 돌아선 것이.
나는 입국장 근처 의자에 앉은 채로 이정우 이사를 기다렸다.
그렇게 3시가 조금 넘자, 이정우 이사가 멋들어진 선글라스에 꽃무늬 셔츠를 입고 입국장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나를 보고 양팔을 벌리며, 마치 오랜만에 한국에 오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요! 브라더!”
“오늘 컨셉은 신세계입니까?”
“내가 우리 브라더 주려고, 워치를 하나 샀지.”
이 장단에 놀아줘야 하는 건가?
나는 고개를 좌우로 젓고, 손을 내밀었다.
“줘 봐요. 미키마우스 그려져 있고 그럼 가만 안 둡니다.”
“헛!”
이정우 이사는 주머니에서 꺼내던 시계를 다시 넣고, 내 어깨를 감쌌다.
“빨리 나가자. 한국의 냄새를 맡으니 아주 흥분돼 죽겠어.”
“어디로 갈까요?”
“거기 김치찌개 맛집 있지?”
“삼성동이요?”
“응, 거기로 가자.”
나는 이정우 이사의 여행용 가방을 받아 들고, 차를 세워둔 주차장으로 갔다.
그는 주차장에 세워진 내 차를 보자 갑자기 미간을 구기며 어이없다는 말투로 말했다.
“뭐야? 겨우 이거야?”
“왜요?”
“마켓 프레시의 이사님이 겨우 쏘나타나 타는 거야? 내가 신경을 썼어야 하는데.”
“이사요?”
“내 지분 6% 가져가면 11%니까 이제 곧 이사가 되겠지. 다 알면서 뭘 모른 척을 해?”
이정우 이사는 내 옆구리를 찌르며 장난을 쳤다.
마치 아주 친한 사이인 것처럼.
나는 그의 장난을 대충 받아주며, 운전석에 앉았다.
“그나저나 이사님, 혹시 최구열 이사님한테 연락 온 거 있나요?”
“아니. 그 인간이 왜?”
역시 이정우 이사에게 연락하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나 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아닙니다.”
“싱겁기는. 그리고 이사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그냥 형이라고 불러. 이제 곧 때려치울 건데 뭐.”
“네, 천천히 그럴게요.”
그렇게 2시간을 달려, 삼성동의 허름한 김치찌갯집에 도착했다.
이정우 이사는 자리에 앉자마자, 차에서 떠들었던 얘기를 이어서 했다.
“요즘 미국에서도 먹방이 대세거든. 그래서 한국 콘텐츠 따라 하는 미국 BJ들도 만나 봤는데, 한국 애들과 비교하면 한참 떨어져.”
“그 얘기는 아까도 하셨어요.”
“응, 그랬나?”
“네. 이사님은 잘하실 겁니다.”
“그래. 고맙다. 브라더!”
이정우 이사는 크게 웃고,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지훈아.”
“네?”
“내가 너 진짜 좋아하는 거 알지? 그래서 지분도 그렇게 헐값에 넘기는 거고.”
“저도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나 좀 도와줄 수 있어?”
내가 이럴 줄 알았다.
시세보다 싸게 내놓은 것은 뭔가 목적이 있었기 때문일 줄 알았다.
“뭔데요?”
“내가 방송은 잘 아는데, 식품 쪽은 잘 몰라서 말이야. 아무래도 세계적인 콘텐츠들이 될 거니까 광고 효과도 꽤 괜찮을 거야.”
이 정도는 나에게 쉬운 일이다.
그리고 그의 말처럼 유튜브 방송을 제대로 만나면 판매도 늘어날 수 있기에 나에게도 좋다.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
이정우 이사는 분명 미국의 투자자를 만난다고 했다.
제품 공급은 투자자가 있으면 아무것도 아닌데…….
설마.
“이사님. 투자는 어떻게 되셨어요?”
“아……. 역시 눈치가 빠르네.”
“미끄러졌어요?”
“응.”
“그래서 직접 투자해서 하시려는 거고요?”
“맞아. 언제까지 남의 돈 받아서 사업해? 이제는 내가 다 박아 보려고.”
스튜디오에 각종 촬영 장비까지.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들어갈 것 같은데…….
“이사님이 그렇게 돈이 많았어요?”
“아니, 일단 방송 장비는 다 렌트로 쓸 거고, 스튜디오는 아는 형님 것 쓰기로 했어. 근데 BJ들이 엄청나게 먹는 거 알지? 생각보다 예산이 많이 필요하더라고.”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정우 이사와 같은 사람이 순순히 자신의 돈만으로 사업한다는 것이 말이다.
“왜 그렇게까지 하시는 거예요?”
“성공에 대한 확신이 있으니까.”
“확신이요?”
“응, 너도 그런 거 아니야? 확신이 있어서, 가진 돈 털어서 마켓 프레시 지분을 인수하는 거 아니야?”
“그야 그렇지만.”
“난 커머스에 확신이 없어.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이 일에는 확신이 있어.”
“…….”
“내가 널 왜 좋아하는 줄 알아?”
“글쎄요.”
“넌 참 이상한 놈이야. 별짓을 하지 않는데도 사람을 끌어모으는 이상한 놈. 그래서 몇 달 동안 가만 생각해 봤지. 네 주위에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난 왜 정작 필요할 때 사람이 없어질까 하고 말이야.”
“그래서 답은 찾으셨어요?”
“약간은. 그래서 이번에는 돈이 아닌, 사람으로 해 보려는 거야.”
이정우 이사는 한쪽 눈을 찡긋하고, 끓고 있는 김치찌개를 국자로 휘휘 저었다.
그리고 물을 한 모금 마신 후에, 말을 이었다.
“가만 생각해 보면, 나는 돈에만 끌려다녔거든.”
“잘 생각하셨네요. 근데 돈이 필요하셨으면…….”
내가 말끝을 흐리자, 이정우 이사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왜 그렇게 싸게 파냐고?”
“네.”
“그냥 빛만 치우고 싶었을 뿐이야. 그리고 너한테 보험은 하나 들어 놨잖아.”
“고맙습니다.”
“그래. 고마워해야지. 당연히 죽을 때까지 고마워해야지.”
나는 이미 쫄아 버린 김치찌개를 떠서, 그의 그릇에 담아 줬다.
“드세요.”
“상품 협찬은 해 줄 거지?”
“네, 저도 보험 하나 걸어 놓겠습니다.”
“오케이!”
이정우 이사가 차액을 노리고 팔았다면, 아마 더 비싸게 팔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가끔 돈보다 중요한 것이 생긴다.
지금 그가 그랬다. 미래에 대한 확신이 생겼고, 그 확신을 실현하기 위해 돈이 아닌 사람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의 나처럼.
나는 김치찌개를 미친 듯이 흡입하는 그를 바라보며,
물을 따라 그의 옆으로 밀어 줬다.
내 자그마한 응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