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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듣는 회사원-101화 (101/223)

<기억을 듣는 회사원 101화>

102. 이미 선택하신 것 아닌가요?

내가 등을 돌리자, 침대에 앉아 있던 김선녀 여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쉽게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

“지금 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정우의 주식을 확보할 수 없을 텐데요?”

그녀의 말이 맞다.

이틀 안에 50억을 모으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상장하고 나면 지금처럼 싼값으로 대량의 주식을 인수할 기회는 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에게 주도권을 내줄 수 없다.

첫 거래에서 주도권을 내주면 계속 끌려 갈 수밖에 없으니까.

“천천히 모아 보죠.”

“천천히라……. 당신과 어울리지 않는 말을 하는군요.”

김선녀 여사가 미간을 구겼다.

아마도 그녀는 내가 쉽지 않은 상대라고 생각할 것이다.

“제 뒷조사를 하셨다면 아실 텐데요. 시간이 걸려서 그렇지, 50억쯤은 저 혼자도 모을 수 있는 금액입니다.”

“인정합니다. 투자를 잘하시는 분이니 물론 그럴 수도 있겠죠. 우리 솔직해집시다. 그래서 이번 기회가 더 탐이 나는 거 아닙니까? 이렇게 커머스의 지분을 싸게 인수할 기회가 앞으로는 절대 없을 테니까요.”

“뭐. 아깝긴 하지만 어쩔 수 없죠. 뭐든 급하게 먹으면 탈이 나는 법입니다.”

“말투는 저보다 오래 산 사람 같군요.”

“그런가요?”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옆으로 살짝 까닥였다. 그러자 김선녀 여사는 실소를 머금으며, 비꼬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과연, 당신같이 욕심이 많은 사람이 과연 그럴 수 있을까요?”

그녀의 말처럼, 나는 욕심이 많다.

그래서 이런 기회에서 겨우 50억만 받아 내는 것은 내 성에 차지 않는다.

나는 뒤로 돌아, 김선녀 여사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녀의 눈을 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니요. 제가 아니라 여사님이 더 조급하신 것 같군요.”

“……!”

“그럼 제가 제안을 하겠습니다.”

“당신이요?”

“왜요 싫으십니까?”

“그래요. 한 번 들어나 보죠.”

“여사님의 돈으로 산 커머스 주식을 저에게 옮겨 주십시오.”

“제 주식이라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요.”

모르쇠로 나오겠다는 건가?

하지만 그러기에는 이미 늦었다.

난 김선녀 여사가 최구열 이사와 관계가 있다는 것을 확신하니까.

“최구열 이사의 명의로 산 주식을 저에게 옮겨 달라는 말입니다. 전부 다.”

“……!”

꽤 놀란 표정의 김선녀 여사.

그녀는 멍하니 내 얼굴만 바라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정적이 이어지고.

“양쪽에 다리나 걸치는 것은 여사님 스타일이 아닐 텐데요?”

나는 고개를 좌우로 젓고 다시 등을 돌렸다.

그러자 등 뒤에서 김선녀 여사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지훈 씨!”

“…….”

“……어떻게 알았습니까?”

“여사님에게만 사람이 있는 게 아닙니다. 제 주변에도 사람은 많습니다.”

침대의 팔걸이에서 들었던 기억.

김선녀 여사는 분명 이정우 이사가 아닌 최구열 이사에 대해서만 말했다.

또한, 회사 사정에 대해서도 제법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

김선녀 여사는 이정우 이사가 아닌, 최구열 이사에게 투자하고 있다는 말이다.

나는 고개를 돌려, 놀란 표정의 그녀를 확인하고 다시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때.

“하하하하.”

크게 웃는 김선녀 여사.

자신이 가진 패를 들킨 사람치고는 놀라울 만큼 당당하다.

점점 더 궁금해졌다.

과연 이제 어떤 패를 꺼내서 나를 설득하려 할지 말이다.

내가 문고리를 잡자, 그녀는 나에게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둘이 얘기해야 할 것 같군요. 미선 씨는 잠깐 나가 있어요.”

그녀의 지시에, 미선이라는 간병인이 내 옆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후, 김선녀 여사에게 가 보라는 손짓을 했다.

나는 간병인이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몸을 돌렸다.

그러자 김선녀 여사는 침대 팔걸이를 잡으며 몸을 더 일으켜 세웠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보죠.”

“…….”

“내가 왜 최구열이 아닌, 당신을 선택해야 합니까?”

“이미 선택하신 것 아닌가요?”

“내가요?”

“그래서 최구열 이사가 아닌 저를 부르신 거겠죠.”

팔걸이에서 들었던 단편의 기억.

나는 그것들로 지금의 상황을 추리했다.

8개월 전, 최구열 이사는 2천억이라는 막대한 투자금을 들고 왔다.

언론에서는 역시 최구열이라고 떠들어댔고, 그의 회사 내 입지는 더욱 단단해졌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한 명의 투자자에게 나왔을 확률이 높다.

나는 그때 최구열 이사가 가져온 2천억이라는 돈이 지금 김선녀 여사의 돈이라 가정했다.

그때 내준 지분은 겨우 9%.

그 당시 주식의 가치에 20분의 1 정도만 내준 것이다.

그 돈은 미래에 대한 투자금이었고, 아무도 매각하려 하지 않았기에 그 정도의 금액이 필요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6%의 지분이 매물로 나왔고, 이를 매입할 수 있는 첫 번째 옵션은 바로 나다.

한 마디로 우선권이 있는 내가 아니면, 이렇게 싸게 살 수 없다는 말이다.

또한, 얼마나 급했으면, 처음 보는 사람을 자신의 병실까지 불렀을까?

얼마나 간절했으면, 손녀딸이 아닌 자신이 직접 나서는 것일까?

이런 의문까지 더해지자, 지금의 상황은 더욱 명백해졌다.

결국, 2천억으로 9%를 얻었던 그때와 50억으로 2.5%를 얻을 수 있는 지금.

똥줄이 타는 것은 내가 아닌 그녀라는 것이.

“당신은 나에게 뭘 해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나를 떠보는 김선녀 여사.

내 가정이 맞았다면, 지금은 내가 아니라 그녀가 나에게 매달리는 것이 맞다.

“제가 드릴 수 있는 것은 처음에도 말씀드렸습니다. 정식으로 상장하면, 그때 주식을 양도해 드리겠다고요.”

“겨우 그게 다입니까?”

“이 정도면 충분하죠. 뭘 더 드리겠습니까?”

나는 이런 싸움에 능하다.

그래서 지금까지 내가 원하는 것들은 다 얻어 왔다.

아무리 김선녀 여사가 남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사람이라 해도, 내가 원하는 것을 전부 다 얻어 낼 것이다.

“젊어서 그런지 참 겁이 없군요.”

“그 말, 칭찬이라 생각하겠습니다.”

또다시 정적이 이어졌다.

이런 싸움에서는 지금과 같은 순간이 중요하다.

먼저 말을 꺼내는 순간, 자신이 가진 패를 하나 내주는 꼴이 될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김선녀 여사 또한 이를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지그시 눈을 감고 아무런 말없이 침묵을 유지했다.

숨 막히는 정적.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 소리가 상당히 거슬린다.

하지만 참아야 한다.

내가 지금 원하는 것은 50억이 아닌, 그 이상이니까.

“후…….”

김선녀 여사의 긴 한숨 소리.

백기를 내 보일 것인가?

나는 그녀의 입술이 떨어지길 기다렸다.

그리고.

“어디까지 알고 계십니까?”

본능적으로 자신이 가진 패를 까지 않는구나.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둘 중 하나다.

내가 예상하는 것들을 사실처럼 떠드는 것과 아니면 대충 둘러 대고 끝내는 것.

싸움을 빨리 끝내고 싶은 나는 전자를 택했다.

내 생각이 틀렸다면 바보가 될 것이고, 맞았다면 이 싸움을 이 한 방으로 끝낼 수 있을 것이다.

“지난번에는 2천억을 투자해서 9%를 얻어 가셨죠. 이번엔 50억으로 2.5%입니다. 제가 그 이상 뭘 더 해 드리겠습니까?”

“……!”

“그래서 최구열 이사가 아닌 저를 선택하셨겠죠.”

김선녀 여사는 내 말을 듣고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빌어먹을. 틀린 것인가?

너무 경솔했다. 이제 바보가 되는 것만 남았구나.

하지만.

“정확하네요.”

그녀의 입에서 떨어진 그 말에, 나는 드디어 이 싸움을 끝내고,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내 입가에 새어 나오는 미소.

승리한 사람이 가져갈 수 있는 여유가 내 말투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좋습니다. 우리 법무팀을 통해서 최구열이 아닌 당신에게 힘을 실어 줄 방법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시죠.”

끝났다. 이 힘든 싸움이 끝이 났다.

나는 이정우 이사의 6%와 최구열 이사가 가진 9%를 뺏어 올 것이다.

그럼 내가 가진 5%에 15%를 더해 20%가 된다.

김상만 회장의 28%, 정근영 대표의 21%.

다음의 세 번째 대주주가 되는 것이다.

밖으로 나와, 의자에 앉아 있는 간병인에게 들어가 보라는 신호를 보냈다.

아무도 없는 VIP 병실 앞 대기실.

다리가 후들거려서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빈 의자에 앉아 긴 한숨을 내쉬었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에 가득했고,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았다.

*   *   *

다음 날 아침.

승리의 후유증은 꽤 오래갔다.

멍하니 앉아 있는 내 옆으로 김태하 팀장이 다가왔다.

“뭐 해? 아침부터 뭐 그렇게 멍을 때려?”

“…….”

“이번 조직 개편의 후유증인가?”

“태하야.”

“응?”

“나 잠깐 나갔다 올게.”

김태하 팀장은 내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이마에 손을 짚으며 물었다.

“어디 아파? 열은 없는데?”

“아직 진정이 안 돼서 말이야.”

“왜?”

“그런 게 있어. 잠깐만 나갔다 올게.”

나는 상의를 걸치고, 1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미국에 있을 이정우 이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사님.”

- 요! 원지훈이. 잘 지냈어?

“네. 그럭저럭이요. 이사님은 어떠세요?”

- 난 최고지. 하하하

잘되고 있나 보다.

그의 목소리와 웃음소리로 현재 상황을 모두 파악할 수 있었다.

“모레 들어오시죠?”

- 그래. 그나저나 지훈아 돈은 다 준비했어?

“네, 들어오시면 바로 진행하도록 하죠.”

- 와 원지훈이! 살아 있네! 겨우 5일 만에 120억을 다 모으고 말이야.

“죽을 것 같으니까 그만하시고요.”

- 왜 어디 아파?

“네 덕분에 죽다 살아났습니다. 공항에 마중 나가도 되죠?”

- 하하하 그럼 나야 고맙지.

“그럼 공항에서 뵙겠습니다.”

- 오냐!

전화를 끊자, 곧바로 휴대전화의 진동이 울렸다.

나는 액정의 발신자를 확인하고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네, 원지훈입니다.”

- 어딘가? 잠깐 봤으면 하는데?

평소와 다르게 상기된 목소리의 최구열 이사.

그는 개인에게 전화하는 사람이 아니다.

특히 나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외근 나와 있습니다.”

- 그래? 언제 들어오지? 내가 급해서 말이야.

김선녀 여사가 생각보다 빠르게 움직이는구나.

그는 이제 알았을 것이다.

자신이 조직 개편이라는 작은 프레임이 갇혀 있는 동안 내가 무엇을 했는지를.

“퇴근 전에나 들어갈 수 있을 거 같습니다.”

- 그래? 알았네. 기다리지.

앞으로 6시간.

이제부터 그의 피가 마르기 시작할 것이다.

나는 최대한 그를 초조하게 만들 생각이다.

그래야 자신이 내세울 수 있는 패를 모두 꺼내 보일 테니까.

전화를 끊고, 손목의 시계를 확인했다.

어딜 가서 놀아야 할지…….

잠시 고민하다가, 김재열 사외이사에게 얘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사님! 어디세요?”

- 집이야. 하아…….

자다 깬 목소리의 김재열 이사.

“아직 주무신 거예요?”

- 왜? 뭐 할 말 있어?

“네 할 말이 너무도 많네요. 이사님에게 혼도 나야 하고요.”

- 뭐?

“요즘도 애들 팽이치기 좋아하죠?”

- 갑자기 왜 이래?

“팽이 잔뜩 사 갈 테니까 잠깐만 기다려요.”

- 너 무슨 일 있지?

김재열 사외이사는 절대 김선녀 여사와 상종하지 말라고 했다.

내가 이길 수 없는 상대라고 생각했기에 그랬을 것이다.

“김선녀 여사님을 만났습니다.”

- 야!

“걱정 마세요. 원하는 건 다 얻었으니까.”

- 뭐?

“얼굴 보고 얘기하시죠.”

나는 씩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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