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100화>
101. 당신이 어떤 담보를 가졌는지
- 미안하다. 기보 시설 자금은 20억이 맥스래.
40억을 약속했던 함중식 사장의 전화.
이럴 줄 알았다.
그는 행동보다 말이 먼저인 사람으로 이런 경우가 다반사였다.
이로써 필요한 돈은 다시 50억.
제조업체들의 주머니 사정을 뻔히 알기에 이제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미팅 중에 술을 마신 탓에 차를 세워 두고 택시로 집 근처까지 왔다.
그리고 찬바람을 맞을 생각으로 택시에서 내려 천천히 걸어갔다.
그때.
끼이이익!
검은색 대형 세단이 내 앞을 막아섰다.
초보 운전인가?
별로 위험하지 않았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차를 비켜 걸었다.
“원지훈 씨!”
나를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검은색 슈트 차림의 건장한 남자가 대형 세단의 운전석 위로 팔을 올리고 있었다.
“누구시죠?”
“잠깐 시간 좀 내주십시오.”
“왜요?”
“뵙고자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누가요?”
“가 보시면 압니다. 조용히 모셔 오라고만 들었습니다.”
누굴까?
누가 이런 식으로 나를 데려오라고 했을까?
궁금하긴 했지만, 인상이 좋지 못한 남자를 선뜻 따라가기는 쉽지 않았다.
나는 최대한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한 손을 허공에 휘휘 저었다.
“누군지 몰라도 내일 낮에 오라고 하세요.”
“대표님께서 좋은 제안을 드릴 것이라는 말도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대표님?”
입을 꽉 다문 남자.
더 물어봤자 답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대충은 예상이 갔다.
찾는 사람이 누구일지 말이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소굴로 들어가야 하는 법.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가 손짓하는 세단의 뒷좌석에 올라탔다.
깔끔한 고급스러운 세단 안.
짙은 여자 향수 냄새가 진동했다.
조금 전까지 누가 탔었는지, 시트에 약간의 온기도 남아 있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팔걸이를 오른손으로 훑었다.
<마켓 프레시가 뭔데?>
처음 듣는 젊은 여자의 목소리다.
정말 내가 생각하는 그녀가 맞을까?
만약 아니라면, 이 사람은 누굴까?
나는 계속해서 차 안의 구석구석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할머니는 왜 이런 놈을 보자는 거야? 아 귀찮아 죽겠네.>
<맨날 꼰대들만 만나다가 이제는 꼬마를 만나라고 하고. 언제는 내 맘대로 하라면서.>
꼬마는 나를 말한 것 같고.
할머니라면…….
김선녀 여사의 손녀 이현아.
김명진 차장에게 그녀가 나를 찾는다는 말을 들었기에, 이 정도는 쉽게 추리할 수 있었다.
그녀는 나를 왜 보자는 걸까?
김명진 차장의 말처럼, 투자에 관해 얘기하려는 것일까?
근데 왜 이런 식으로 부르는 걸까?
김재열 사외이사는 절대 상종하지 말라고 했는데, 내가 만나도 되는 걸까?
머릿속에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이현아 대표입니까?”
“네?”
“저를 보자는 사람이요.”
내 확신에 찬 목소리에,
운전하는 남자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왜 저를 보자는 겁니까? 그것도 이런 식으로요.”
“저는 정중히 모셔 오라고만 들었습니다.”
“이게 정중한 겁니까? 그리고 어디로 가는 겁니까?”
“여기서 3분이면 도착합니다.”
잠시 후, 목적지에 도착한 것 같았다.
차가 멈춰 서고, 내가 앉아 있는 자리의 뒷좌석 문이 벌컥 열렸다.
“어이! 여기가 당신 자리…….”
말끝을 흐리는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
남자처럼 짧은 머리에, 한쪽 귀에 10개가 넘는 피어싱.
키는 160 초반으로 보였고, 눈화장이 짙어서 마치 록 밴드의 보컬 같았다.
또한, 유난히 크고 맑은 눈을 가진 그녀는 순진한 아이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녀는 나를 물끄러미 보며, 차 문을 잡은 채로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이현아 대표?”
내가 묻자,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차 뒤로 돌아가, 반대쪽 문으로 들어와 앉았다.
“잘생겼네.”
“네?”
“일단 얼굴은 합격.”
“뭐하는 겁니까?”
“듣는 거랑 다르게 성격은 좀 까칠하네요. 그래도 뭐 잘생겼으니까 봐준다.”
“이봐요!”
“아, 됐고. 올해 몇 살? 한 스물다섯?”
그녀는 양손으로 턱받이를 하며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많은 사람을 만나 봤는데, 이 여자는 참 독특한 캐릭터였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마치 내 입에서 자신이 원하는 답이 나오길 기다리는 것 같았다.
“서른입니다.”
“어머 동안이네. 동안이야. 오빠라고 불러도 되죠?”
할머니의 영향 때문인지,
그녀의 말투에는 약간의 경상도 사투리가 섞여 있었다.
“이현아 대표님이시죠?”
“만나는 사람은 있어요? 나 어때요?”
“내 스타일은 아닌데?”
그녀는 입술을 삐쭉 내밀며, 양미간을 구겼다.
마치 김지영 이사처럼.
“치……. 거짓말.”
“소문처럼 버릇이 없군요.”
“누가 그래요? 나 버릇없다고?”
“누구든 다요.”
“이름 딱 대요. 내가 가서 그냥 다 조져 버릴 테니까.”
“어쩌지? 이름이 기억이 안 나는데?”
“역시 얼굴값 하네. 좋아 그 성격도 합격.”
“우선 112에 전화나 좀 합시다. 여기 어린 꼬마가 날 납치했다고.”
“꼬마? 그리고 내가 무슨 납치를 해요?”
“지금 이게 납치가 아니고 뭡니까?”
그녀는 태연했다.
그리고 내 얼굴을 물끄러미 보며 희미한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계속 그렇게 해 봐요. 나 지금 심하게 심쿵하니까.”
어이가 없었다.
이 정도로 내 말을 받아치는 사람은 본 것은 참 오랜만이다.
여자는 잠시 내 얼굴을 보다가, 운전석 옆의 시계를 바라봤다. 그러자 차 밖에 서 있던 남자가 내 쪽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라는 손짓을 했다.
“여기가 어딥니까?”
차 밖으로 나온 내 질문에, 이현아 대표가 갑자기 팔짱을 끼며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할머니 병원.”
“병원?”
“오빠를 보자고 한 건 내가 아니고, 할머니니까.”
난 눈치가 빠르다.
30년 동안 남의 기억을 들어와서 그런지, 대충 눈빛만 봐도 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여자는 다르다.
너무 순수하고 초롱초롱한 눈에서는 그 어떤 생각도 읽을 수 없었다.
그녀는 갑자기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친한 척을 했다.
만난 지 10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나는 그녀에게 잡힌 팔을 빼내며,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대표님은 원래 이런 식입니까?”
“뭐가요?”
“사람 대할 때 항상 이러냐고요.”
“아뇨. 오빠한테만 특별히 이러는 건데? 왜 싫어요?”
“네, 싫어요! 그리고 오빠라는 말도 듣기 거북하군요.”
“그럼 뭐라고 해요? 형? 아니면 이모? 나보다 나이 많은 남자한테 당연히 오빠라고 하는 거 아니에요?”
“차라리 아저씨가 좋겠네요.”
“아저씨도 괜찮지. 나 그거 10번은 봤는데.”
할 말이 없다.
이건 지나치게 순수한 것인지, 정말 고단수인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할머니는 어디 계십니까?”
“19층 VIP실에 있어요. 아 참! 이거 가지고 가고.”
그녀는 주머니에 있던 카드를 꺼내, 내게 건네고 말을 이었다.
“이 병원은 참 웃겨요. 이 카드 없으면 면회도 안 시켜 주거든요.”
나는 카드를 받아 들고, 아무런 말없이 엘리베이터의 앞으로 걸어갔다.
* * *
19층 VIP실.
병실은 4개가 전부다.
그리고 환자가 있는 곳은 1901호 한 곳뿐이다.
나는 병실 앞에 있는 김선녀라는 이름을 확인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넓은 병실 안.
간병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나를 보고는 고개를 숙였다.
“원지훈 씨죠?”
“네.”
“기다리고 계십니다.”
여자는 나를 병실 침대에 누워 있는 김선녀 여사의 앞으로 데려갔다.
하얀 머리를 곱게 빗은 노파.
철부지 손녀와는 다르게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했다.
노파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눈을 지그시 감으며 입을 열었다.
“보시다시피 제 상태가 이 모양이라서. 여기까지 오시라고 했습니다.”
경상도 사투리가 약간 섞인, 정중한 말투다.
보면 바로 짜증을 내려고 했는데, 목소리의 무게감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이해합니다. 근데 저를 왜 부르신 건가요?”
“광고쟁이 놈이 말 안 했나요?”
광고쟁이라면 이정우 이사를 말하는 것인가?
“이정우 이사요?”
“그래. 그놈 이름이 이정우였지. 나한테는 잘 부탁한다고 하더니, 정작 당신에게는 아무런 말을 안 했나 보군요.”
이정우 이사가 나를 소개했다고?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그가?
이건 정말 상상도 못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그녀에게 다시 물었다.
“이정우 이사가 무슨 부탁을 했습니까?”
“당신이 돈이 없을 것 같으니까 돈을 좀 내주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좀 알아봤습니다.”
“뭐를요?”
“당신이 어떤 담보를 가졌는지를.”
그녀는 눈을 떠,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리고 광고쟁이 놈 덕분에, 재미있는 것들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는 김선녀 여사.
나는 그녀의 생각이 궁금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를 데려왔고, 이정우 이사는 무슨 말을 한 것인지 말이다.
그녀가 자주 짚었을 것 같은 침대 옆의 팔걸이를 움켜잡았다.
<어린놈이 제법이네.>
<구열이 그놈이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정확했지.>
<어떻게 볼수록 구열이 놈과 닮았을까? 재미있어. 참 재미있어.>
구열이는.
이정우 이사가 아닌 최구열 이사를 말하는 것이다.
왜일까?
분명 방금은 이정우 이사의 소개로 나를 알았다고 했는데…….
왜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
나는 노파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래서 답은 찾았습니까?”
“네. 찾았죠. 당신이 가지고 있는 담보가 꽤 쓸만하다는 것을.”
노파의 매서운 눈빛이 내 온몸을 훑었다.
얼마나 매서운지,
마치 도로 한복판에서 벌거벗겨진 채로 서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뭘 그렇게? 보십니까?”
“담보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은 종이 쪼가리가 아니라, 말과 머리에서 나오는 겁니다.”
“…….”
“하나만 묻죠. 최종 목적지가 어디입니까?”
김선녀 여사에 대한 소문은 자자하다.
신 내림을 받은 무당이라는 소문.
평생 관상을 봐 와서 누구보다 사람을 정확히 본다는 소문.
너무도 신중해서 절대 손해를 보지 않는다는 소문 등.
실제로 만나 보니, 그 소문들이 왜 생겨났는지 알 것 같았다.
또한, 그녀가 계속 짚었던 침대 옆의 이 팔걸이.
아까부터 얼마나 많은 기억이 들려오던지.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김형민이는 틀렸어. 빨리 회수하라고 해야지.>
<박정운, 이 미친놈은 돈이 들어가니까 변하는구나. 역시 똑같은 놈이었어.>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돈을 빌려 주거나 투자한 것인가?
누군지도 모르는 수많은 사람에 대한 평가들이다.
역시 보통의 사람은 아니구나.
하지만 나도 만만한 사람은 아니다.
김선녀 여사만큼은 아니겠지만, 다양한 사람에게서 그들의 숨기고 싶은 기억을 들으며 살아왔다. 그래서 이럴 때 목적을 꺼내야 쉽게 얻을 수 있다는 것쯤은 안다.
“이미 많이 조사해 보신 것 같은데,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겠죠?”
“그래요. 원하는 게 뭡니까?”
“50억이면 됩니다. 우선은 제 명의로 사지만, 상장하면 2.5%의 지분을 양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흠…….”
미간을 구기는 김선녀 여사.
그녀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간병인이 그녀를 부축하고 침대를 기울이며 앉을 수 있도록 해 줬다.
“별로네.”
“네?”
“실제로 보니까 담보 가치가 조금 떨어지는군요. 조사하라고 보낸 놈들이 일을 잘하지 못했나 봅니다.”
“……!”
“500억을 내 드리죠. 대신 내가 요구하는 것을 가져오세요.”
“테스트하겠다는 겁니까?”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원하는 것이 뭡니까?”
김선녀 여사가 한 손을 내밀자, 옆에 있던 간병인은 책꽂이에 있는 노란 서류 봉투를 들고 와 내게 건넸다.
내가 봉투 안의 종이를 꺼내 보려 하자, 그녀는 내 팔목을 잡고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우선 내 사람 하나를 그쪽에 두고 시작하죠.”
자신의 사람을 두겠다고?
그때 서류 봉투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기억.
<조건은 최구열이랑 같다. 딱 그 정도 그릇만 돼 주면 되는 거야.>
최구열 이사와 같은 그릇이라.
미안하지만 완전히 헛다리 짚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당신의 옆에 내 사람 하나를 심어 놓겠다는 말입니다. 최소한 이 정도는 해야 당신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최구열 이사의 옆을 항상 맴도는 사람.
이름도 모르고 대화를 나눠 본 적도 없는 비서실장이라는 그 남자.
김선녀 여사의 사람이었구나.
도대체 둘은 무슨 관계일까?
왜 김선녀 여사는 최구열과의 관계를 밝히지 않는 것일까?
더군다나 이정우 이사의 핑계를 대면서.
내 손목을 잡은 힘없는 그녀의 손을 떼어 내고, 서류 봉투를 그녀의 침대 위로 올려놓았다.
“그만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