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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듣는 회사원-97화 (97/223)

<기억을 듣는 회사원 97화>

98. 욕망은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증식되는 것

*   *   *

“부장님! 부장님!”

오후 5시.

천우식품에 보냈던 김준위가 땀을 뻘뻘 흘리며 달려왔다.

“잘했어?”

“네, 내일까지 연락 주겠답니다.”

“그럼 아직 성공은 아니라는 말이네?”

“아닙니다! 내일 꼭 연락 올 겁니다.”

김준위가 확신에 찬 표정으로 답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이글거리는 눈을 보며 물었다.

“그렇게 믿는 이유는?”

“천우의 김명운 부장이 직접 연락해 준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아직 연락은 안 온 거잖아.”

“그야 그렇지만, 천우에서 승인을 했으니까, 미국 농장을 잘 설득해 줄 겁니다. 제가 부장님이 주신 미끼를 던졌거든요.”

“그걸 믿어?”

“네?”

김준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나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한 발 더 다가갔다.

“지금 다시 갔다 와. 준위 씨 앞에서 직접 메일이나 전화를 하라고 해.”

“저 부장님…….”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의 김준위.

그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천우는 매번 일 처리가 늦는 회사야. 앉아서 기다리면 1년 후에 메일이 올 수도 있어.”

“……!”

“그래서 까칠한 박지훈 대리가 천우를 담당하는 거야.”

김준위는 그제야 내 말뜻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래. 필요하면 내일 그쪽으로 바로 출근해도 돼.”

“아……. 네.”

김준위가 달려 나가고 30여 분이 지나자, 펫 팀의 이안나와 특판팀의 김현희가 밝은 표정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그들 역시, 거래처의 말만 믿고 회사로 돌아온 것이었다.

나는 그들을 밖으로 다시 내보내고, 책상에 기대어 섰다.

“현희는 어때요? 잘했죠?”

자신의 팀 인턴, 김현희에게 베팅한 마성근 팀장.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김현희의 진행 사항을 물었다.

“아마 3일 이상 걸릴 겁니다.”

“3일이요?”

“그럼 다른 애들은요?”

“다 마찬가지겠죠.”

내가 준 숙제를 완료하면, 이들은 MD에 대해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제품을 소싱하고, 기획하며, 소비자를 설득하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보람된 것인지.

또한, 허드렛일만 주던 선임들도 그들을 다시 보는 기회가 될 것이다.

마성근 팀장은 등을 파티션에 기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숙제가 끝나면 인턴들도 조금은 MD다워 지겠군요.”

“아마도요.”

“이제 현희랑 미나에게도 제대로 된 일을 나눠 줘야겠어요.”

나는 마성근 팀장의 어깨를 툭 치고, 자리에 앉았다.

업무에 집중하던 도중, 구석에 열어 둔 사내 메신저의 알림이 울렸다.

- 원 부장. 퇴근하기 전에 잠깐 내 방으로 와.

이정우 이사의 메시지.

나는 알겠다는 답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요! 원지훈!”

그 사이에 스타일이 바뀐 것인가?

오랜만에 보는 이정우 이사는 깔끔한 슈트가 아닌, 빈티지 남방과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는 커다란 여행용 가방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어디 가세요?”

“라스베이거스! 와우!”

이정우 이사는 양팔을 벌린 채로 혀를 굴렸다.

“거긴 왜요?”

“여긴 너무 춥잖아.”

장난기 가득한 표정의 그가 나를 툭 치며 발동을 걸었다.

“그럼 따뜻한 카지노에 박혀 살려고요?”

“아니. 내가 왜?”

“그럼, 술이나 마시면서 놀 게 뻔한데, 왜 거기까지 가요?”

“궁금해?”

“네. 궁금해 미치겠습니다.”

내 말에, 이정우 이사는 씩 웃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투자해 주겠다는 든든한 재력가가 나타나서 가는 거야.”

커머스의 주식을 더 확보하려는 것인가?

그는 흥미를 잃고 손을 뗄 것으로 보였는데…….

“커머스 주식을 더 확보하시려고요?”

“아니. 여긴 별로 재미가 없어. 재미 봤을 때, 빠져야지.”

그는 BO푸드의 김지욱 상무에게 주식의 권리를 위임했다.

빠질 거라는 말은 주식을 팔겠다는 말인데…….

“빠져요?”

“응. 커머스가 내 주종목도 아니고, 슬슬 갈아타려고.”

“그럼 가지고 계신 주식은요?”

“당연히 팔아야지.”

“김지욱 상무한테요?”

“글쎄.”

왜 글쎄라는 단어를 쓴 것일까?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는 뜻일까?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나는 이정우 이사의 옆에 있던 여행용 가방을 가리키며 물었다.

“오래 계세요?”

“아니 한 일주일?”

“가방만 봐서는 일 년인데요?”

자연스럽게 여행용 가방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최구열을 생각하다니. 내가 미쳤지. 미쳤어.>

<아예, 김상만 회장한테 가 볼까?>

<최지욱, 이 미친놈은 돈도 없이 말만 뻔지르르하고.>

<김재열……. 이 인간 말을 믿어?>

이정우 이사는 최구열 이사에게는 좋은 감정이 없다.

김상만 회장이 주식을 살 이유도 없다.

최지욱 상무는 BO푸드의 주식을 확보하느라 돈이 없을 것이다.

끝으로 김재열 사외이사.

왜 그가 이정우 이사와 만났을까?

“왜 배웅이라도 해 주게?”

이정우 이사는 여행용 가방의 손잡이를 잡은 내 손을 가리키며,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원하신다면.”

“그래 주면야 나야 땡큐지. 안 그래도 짐이 많아서 좀 짜증이었는데.”

나는 여행 가방을 끌고, 그의 뒤로 바짝 붙어서 걸었다.

잠시 후.

앞장서서 걷던 이정우 이사가 갑자기 뒤로 돌아섰다. 그리고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넌 어때?”

“뭐가요?”

“어제 김재열 이사를 만났어.”

“그래서요?”

“야. 원지훈, 나한테도 숨기려고 하는 거야? 이거 너무 섭섭한데?”

“…….”

“장상익 이사가 가진 주식을 네가 인수할 거라면서?”

김재열 사외이사가 내 얘기를 했구나.

장상익 사외이사와의 약속은 앞으로 3일 후.

혹시나 생길 변수에 대비하기 위해서, 주주명부에 이름을 고치기 전까지는 말을 하지 않으려 했다.

이정우 이사는 내 표정을 살피고,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지훈아. 내가 가진 주식. 탐나지 않아? 무려 7%야.”

“…….”

“너라면 이 주식을 제대로 쓸 것 같은데 말이야. 어때?”

탐난다. 미치도록 탐난다.

하지만 이정우 이사의 7%를 사려면 최소 140억이 필요하다.

140억이라…….

“얼마나 시간을 주실 수 있죠?”

“일주일.”

나는 여행용 가방을 이정우 이사에게 밀어 주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혼자 가실 수 있죠?”

“응?”

“어린애도 아니고……. 바퀴 달린 가방 끄는 게 뭐가 그렇게 힘들다고 그래요? 전 그럼 바빠서.”

“그래. 아무리 원지훈이라고 해도 일주일에 120억은 빠듯하겠지. 가 봐. 시간 없으니까.”

120억이라…….

시세보다 싸게 팔려는 건가?

아니다. 이정우 이사는 절대로 그런 인간이 아니다.

나는 돌아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다시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전부 다 넘길 생각이 아닌가 보군요.”

“응.”

“그럼 뭔가요?”

“6%는 투자자들의 돈이라 돌려줘야 하고, 1%는 내 돈이야.”

“그래서요?”

“나도 노후 보험 하나쯤은 있어야지. 안 그래?”

욕망은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증식되는 것.

커머스의 놀라운 성장 속도에 가능성을 본 그는 자신의 돈을 그대로 묻어 둘 생각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욕망을 인정했다.

“그거 든든한 보험이 되겠군요.”

“응. 내 생각에도 그래.”

내가 가진 1%에 4%를 더하고, 거기에 6%를 더한다면,

총 11%.

아직은 부족하지만, 이 정도로도 우선은 첫 번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나는 씩 웃고, 뒤로 돌아 김지영 이사의 사무실로 향했다.

*   *   *

“왔어?”

김지영 이사는 기운이 없는 듯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나는 그녀의 책상 옆으로 걸어가 책꽂이에 등을 기댔다.

“이정우 이사는 미국에 간다네요.”

“이정우 이사 보고 온 거야?”

“네.”

“그래. 이정우 이사는 재미있게 사는 사람이니까…….”

근심이 가득한 표정이다.

나는 책상의 앞으로 걸어가 한쪽 모서리에 기대어 앉았다. 그리고 부드럽게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녀는 내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회장님이랑 얘기해 봤어. 근데…….”

별로 좋지 않구나.

그녀의 표정에는 이미 답이 나와 있었다.

“가요.”

“어딜?”

“데이트하러.”

그녀는 씩 웃고, 자리에서 일어나 옷걸이에 있는 외투를 입었다.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홍대 거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버스킹을 하는 사람들이 노래와 춤을 췄고,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박수와 환호성이 가득했다.

우린 거리의 사람들을 보며, 말없이 걸었다.

머리핀을 파는 노점상.

유난히 반짝이는 은색 머리핀이 내 눈에 들어왔다.

“하나 사 줄까?”

“응?”

내가 노점상을 가리키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게 지훈이가 나에게 처음 주는 선물이 되는 건가?”

“우리 딴 데로 가자. 좀 더 좋은 곳으로.”

잡고 있던 손을 잡아당기자, 그녀는 손에 힘을 주고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노점의 머리핀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난 저게 제일 좋을 거 같은데?”

그리고 그 핀은 내 눈에 들어왔던, 작고 반짝이는 은빛의 핀이었다.

“괜찮겠어?”

“응. 난 좋아.”

“정말?”

“응. 나 저거 사 줘.”

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노점의 앞으로 가서 핀을 사고, 그녀의 머리에 직접 꼽아줬다.

노점의 작은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는 김지영 이사.

그녀는 기분이 좋은지 환하게 웃으며, 내 볼에 입을 맞췄다.

우린 거리를 구경하며 한참을 걸었다.

그리고 인테리어가 잘된 한 카페 앞에 멈춰 섰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이 가게를 본 우리는 거의 동시에 탄성을 내뱉었다.

“와.”

“예쁘다.”

“밥 먹기 전에 케이크 한 조각 먹을까?”

“응.”

김지영 이사는 내게 팔짱을 끼고 아이처럼 즐거워했다.

우린 밖이 잘 보이는 창가의 자리에 앉아, 케이크와 음료를 주문했다. 점원이 돌아가자, 김지영 이사는 물 잔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안 궁금해? 회장님이 무슨 말씀하셨는지?”

나는 고개를 좌우로 젓고, 벽에 매달려 있는 스피커를 가리켰다.

“이 노래 들어 봤어?”

“뭐?”

“안드레 가뇽의 조용한 날들.”

김지영 이사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 지훈이, 가뇽도 알아?`

“물론이지. 내가 이래 보여도, 교양과 학문에 능통한 사람이야.”

그녀는 고개를 약간 틀며,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그 순간, 내가 잘못 꼽아 줘서 그런지 덜렁덜렁 엉성하게 매달린 핀이 눈에 들어왔다.

“잠깐만.”

핀을 고쳐주려고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지훈아. 미안해.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 같아. 회장님은 내 편이 되어 주시지는 않을 거야.>

기억 속에서도 아빠가 아닌, 회장님이라 부르는구나.

얼마나 무서우면 저럴까?

내가 그 무서운 사람에게 떠밀었구나.

나는 핀을 다시 꼽아 주며,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자. 다 됐어. 누구 여자인지 참 예쁘네.”

“치…….”

미안했다.

내 욕심 때문에, 그녀를 이 싸움으로 끌어들인 것이 너무도 미안했다.

힘들었을 것이다.

아빠라고 부르지도 못하는 회장님을 상대하는 것이.

나는 다시 한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냥 웃어. 그게 더 보기 좋으니까.”

“…….”

“이제부터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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